갈라디아서강해(04) 율법의 행위와 믿음 그리고 언약과 율법의 비교(1)(갈3:1~29)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by 갈렙 posted Aug 2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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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AHSYeJQBPOM
날짜 2020-08-26
본문말씀 갈3:1~29(신약 304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이신칭의,율법의행위와믿음,아브라함의믿음,믿음의3단계,구원의여정,칭의와회개와순종,예수님의칭의론,바울의칭의론

한 때 "오직 믿음"이 통용되는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는 그렇게 말해야 했던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믿음을 입술로만 고백하면 다 구원받는다는 산데만주의로 인하여 원래의 종교개혁의 취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참 믿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칭의를 얻게 되는지, 어떻게 할 때 구원을 받게 되는지 혼탁한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 사도바울이 진정 가슴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로 그 원초적인 믿음과 칭의 그리고 구원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끝까지 읽는 이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1. 들어가며

  갈라디아서는 어떤 책인가? 바울은 자신의 몸이 아픈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부름받은 소명을 이루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나가 복음을 전파한다. 그리하여 세운 교회가 갈라디아 교회들이다. 그런데 이 교회들이 자신이 전해준 순수한 복음에서 쉬 떠나 이내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자 통탄한 마음으로 그들을 깨우쳐주기 위해 쓴 복음의 변증서가 바로 갈라디아서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는 때로 무서우리만큼 강한 어조가 나오기도 하며, 동시에 아비가 어린 자녀에게 들려주는듯한 자상함도 묻어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통해 진짜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며, 바울이 정말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어떻게 사도로 부름을 받아 쓰임받던 사역자였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분석하여 써내려간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 곧 "율법과 복음"의 비교는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신앙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들려준다. 오늘 이 시간은 지난 주까지 살펴본 갈라디아서 1~2장 곧 바울의 사도직과 그가 전한 복음의 변증에 이어, 갈라디아서 3~4장의 기독교 교리의 첫 개시 부분으로서, 이신칭의와 그리고 이신칭의가 무엇인지 들려주는 아브라함의 전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바울이 들려준 "이신칭의"란 무엇인가?

  바울은 갈라디아서 1~2장을 통하여 자신이 전한 복음과 사도직의 신적 기원에 대해 소상하게 밝혔다. 그리고 자신이 전한 복음 이외에 복음은 설령 하늘에서 온 천사가 전해준 것이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했다. 그리고 갈라디아교회들이 자신이 전한 복음을 그렇게 쉽게 떠나, 예수님을 믿어야 되지만 거기에다가 할례를 받고 율법도 준수해야 한다는 이상한 복음을 좇아가는 보고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사람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얻게 되며, 어떻게 성령을 받는지 그 원리를 말한다. 그 핵심은 바로 갈라디아서 2:16이다.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통하여만 가능하다고 언급한다. 아무리 율법의 조항들을 잘 지킨다 할지라도 사람은 결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서 십계명(도덕법)과 다른 의식법들을 주셨다. 그런데 사람은 그 모든 법을 다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연지사다. 아담의 범죄 이후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야 했다. 그런데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이미 증거를 받은 것으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칭의다. 우리는 결코 의롭지 않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인하여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람이 의롭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3.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신칭의)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가?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바울이 외쳤던 "이신칭의"를 잘못 이해하거나 과대포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칭의를 받게 되며, 칭의를 받은 자에게 구원은 이미 따논 당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이 없기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 그러니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와는 다른 주장들이다. 바울은 믿음만으로만 칭의를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칭의가 곧 구원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전통 아래에 있는 개신교인들 중에는 오직 믿음만 있으면 자신의 구원문제는 이미 끝났다도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와 오늘날 잘못 알려진 이신칭의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몇 가지 개념들이 있다. 우리가 가진 개역성경에서는 "칭의"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만 주어지는 것처럼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오직"이라는 단어가 이 본문에 들어있지 않다. 우리말 성경번역가가 "오직"이라는 부사어를 거기에다가 집어넣음으로써 잘못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면, 갈2:16의 말씀을 헬라어원문으로 보자. 

갈2:16 우리는 사람은 율법의 행위들로부터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온 채 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서가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도 역시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들로부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신실성)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기 위한 것이다. 율법의 행위들로부터는 모든 육체가 의롭다함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선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에는 율법의 행위로부터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된다는 말도 실은 없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칭의를 얻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일반적으로 이 문구에 대해서, 신학자들 간에 2가지 상이한 해석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바,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의롭게 되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할례를 받는 것으로도 안 되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도 안 되고, 선행을 해서도 안 되고, 금식과 참선을 하는 것으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갖고 있는 신실함을 통하여 우리가 칭의을 얻을 수 있는 해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구약의 예언을 따라 도성인신하시고 또한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것들을 신실하게 다 이루심으로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는 칭의가 인간에게 주어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믿음"에 해당하는 "피스티스"라는 단어가 원래는 "충성됨, 신실함, 신실성"이라는 어근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어근상 "순교자"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칭의가 주어진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성되이 자신의 사명에 충실함으로 인하여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의 신실성이 없었다면 우리 죄인들이 칭의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러한 두번째 해석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잘 들어보지 못한 견해알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번역본이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특별히 우리말 성경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해 놓았으니, 자신이 믿음만 있으면 자신에게 칭의는 따놓은 당상이요, 이미 자신은 가지고 있으니 자신의 구원은 안전하다고 여겨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헬라어에는 "오직"이라는 단어가 있지 않다. 만약 "오직"에 해당하는 거기에 단어가 있었다면 "모노스"는 단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지만 그 단어가 없다. "아니라면"이라는 부정어를 "오직"이라는 단어어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글성경만 읽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만 있으면 칭의를 얻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라는 말은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번역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격적 소유격으로 번역해야 하는가? 그것은 전자의 번역이 훨씬 원문에 가깝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갈2:16의 말씀 자체가 그것을 반증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인 것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바울도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사람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이미 알아온 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본문을 번역할 때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충성됨, 신실함"이라는 뜻을 가지고서 번역함이 좋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이 본문을 주격적인 소유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칭의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다른 것으로는 결코 인간이 칭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라는 문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그분을 충성되이 믿는 것을 통하여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다. 그렇다. 우리가 칭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때의 "믿음"이란 그분을 우리가 믿는 것 때문에 어떠한 환난과 고난을 받게 된다 할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를 가지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심지어 순교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만큼의 충성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갈2:16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4. 칭의를 얻었으면 그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인가?

  오늘날 바울이 말하는 칭의에 관한 문제는 단지 "오직 믿음"이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는 것만은 아니다. 두번째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칭의"가 회개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칭의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믿음"과 더불어 "회개"를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눅18:9~14). 그것은 바로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다. 칭의는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오직 믿음만"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동반될 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칭의에 대해 세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칭의"가 곧 구원인가 하는 문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칭의를 받았으면 자신은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칭의가 거져주어진 것처럼 구원도 거져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을 믿어 칭의를 얻었다면 자신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아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칭의는 구원의 여정에 들어선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지 칭의가 구원을 다 이룬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도 칭의에 대해서 로마서(3~5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롬5:9)이라고 말했다. 바울은 칭의를 받은 자가 그것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앞으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진노에서부터 장차 구원을 받을 것이다(혹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언급한 것이다. 칭의가 곧 구원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롬5:9의 말씀을 헬라어로부터 직역해보자.

롬5:9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분의 피 안에서(피로서) 더욱 더 많이(더 많은 것에서) 의롭게 된 후에,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그 진노로부터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혹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서 믿고 받아들였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분의 피로 더욱 더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분을 통하여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고로 구원은 우리가 죽는 그날에 완성되는 것이지, 결코 자신이 믿던 그 순간에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여정에 첫 발을 내디뎠던 것을 가지고 "예수는 예수님을 믿었으니, 그럼 당신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이러한 선언이 결국 많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평생을 두고 회개할 것을 잊게 만들어버린다. 평생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미 믿었으니, 자기가 믿는 순간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받았다고 여겨버리는 것이다. 아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함으로써만 예수님의 피에 의하여 용서받을 수가 있다(요일1:9,7). 이를 거꾸로 말하면, 회개를 통해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죄가 아니라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회개해야 한다. 

 

5. 갈라디아성도들은 어떻게 되어서 성령을 받아서 거듭나게 되었는가?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되게금 신실하게 믿는 것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게 된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하여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서 사람들아"하면서 책망했다(갈3:1). 왜 그랬을까? 그것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사도바울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 때문에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칭의도 받았고 성령까지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 할례를 받는 등의 율법의 행위들도 필요하다는 거짓형제들의 말에 금방 속아넘어가버린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다시 그들의 과거를 상기시켜서 말한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과연 율법의 행위로부터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부터냐?"(갈3:2) 그랬다. 베드로가 이방인이었던 고넬료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도, 할례를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씀듣는 중에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던 일이 있었다(행10:44~45). 그러자 고넬료 가정의 이방인들도 자기와 똑같이 방언을 말하였고 하나님을 높이 찬양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었던 갈라디아 사람들도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에베소의 사람들처럼, 오직 복음을 듣고서 믿음으로 인하여 성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충성되이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할례도 받고 안식일도 지키며 절기도 지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에게 그러한 행위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어 여기는 것이라고 강하게 책망한다(갈2:21). 만약 누군가가 율법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으려고 시도한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마침내 끊어질 것이고 은혜에서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했다(갈5:4).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만으로 칭의가 불가능함을 시인하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시작했던 그들이 이제로 할례를 받는 등의 육체로 끝마칠 작정이냐고 꾸짖는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고 그리고 능력을 행하게 하신 일이 어찌 다 율법의 행위 때문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듣고 믿음을 통해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엄하게 꾸짖엇던 것이다. 

 

6.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어 의롭다함을 얻었는가?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어떻게 해서 아브라함이 칭의를 얻게 되었는지 사례를 들어 차근차근 설명한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생기기 430년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써 칭의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할례를 받기 전의 상황에서, 믿음을 통하여 칭의를 받은 사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적인 할례가 결코 구원의 표가 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칭의가 주어진다고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3:6~7)" 그렇다. 이 말은 아브라함이 칭의를 얻게 된 데에는 그가 행했던 어떤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육체에 할례를 행해야 비로소 사람이 칭의를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오히려 믿음을 통하여서 칭의가 주어진다고 말한 것이다. 

 

7. 아브라함의 칭의는 그가 처음 믿었던 것으로서 온전한 것이었는가?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브라함의 칭의에 대해서 아주 얄팍한 논리에 그만 함몰되어 빠져나오지 못한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칭의를 잘못 이해하여 믿음만 있으면 자신은 이미 칭의를 받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에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던 것처럼, 자기들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있다면, 이미 의롭다 여김을 받은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 믿을 때에 주어졌던 칭의가 과연 장차 복을 얻기에 합당한 칭의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칭의는 그 뒤에 따라오는 "회개"와 "순종"을 통해 비로소 온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칭의를 얻게 된 것은 창세기 15장에 나온다. 하지만  이내 그의 칭의는 흔들리고 만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ㅎ한 채, 자신의 육체를 따라 범죄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무려 13년동안이나 떠나신다. 그것이 바로 창16장과 17장에 걸쳐 나온다. 그리고 드디어 창세기 22장에 갔을 때에, 비로소 아브라함은 자신의 순종을 통해서 그의 믿음이 온전하다는 것을 인정받게 된다. 그렇다면, 창세기 15장에서 22장에 이르기까지 아브라함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이것을 알아야, "시작으로서의 칭의"와 "과정으로서의 칭의" 그리고 "완성으로서의 칭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칭의과정을 살펴보자. 

  창15장을 보자. 여기에는 먼저 시작으로서의 칭의가 나온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나이 84세 때에 일어났다. 그가 부름받을 때의 나이가 75세였으니, 9년여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하지만 처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바 "네가 나를 따라온다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창12:2)"는 하나님의 약속은 도무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양자를 들이려고 하였다. 자기집에서 낳고 길러진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로 들이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은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오로지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나는 자라야만이 "네 씨"라고 일컬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캄캄한 밤 중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여주면서, 하나님께서는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이러한 하나님의 그 말씀을 고대로 믿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주셨다(창15:6). 이것이 아브라함에 있어서 칭의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창16장에 가면 그가 금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범죄하게 되었다는 것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 뒤 1년이 지났지만 그래도 자식이 없자, 아내 사래의 말을 듣고 사래의 여종 하갈을 데려다가 자식을 낳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낳은 자식이 이스라엘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뒤 13년동안 아브라함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가 잘못 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가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다. 그 이야기가 창17장에 나온다. 그리고는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누군지를 소개하신다. "나는 엘샤다이(전능자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이는 하나님께서 못하실 것이 있겠느냐는 말씀이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인간적인 생각을 생각해내어 네 후손을 억지로 만들었다. 그것은 나를 전능자로 믿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러나 이제부터 네가 진정 네 잘못을 깨닫고 나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따라오려고 한다면 너는 네가 잘못한 것에 대해 회개를 표시를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네가 실수하고 잘못했던 도구로 사용했던 네 고추의 끝을 잘라내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할례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것을 두고 해석하기를, 아브라함이 그때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무할례시에(84세 때에) 믿음으로 받았던 의가 비로서 인쳐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했다(롬4:11). 그리고 그가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육의 몸을 벗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하였다(골2:11).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할례였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례와 같은 것으로 회개의 표시라는 것이다(골2:12). 고로 그때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받은 칭의에 허물어뜨리는 죄를 지은 것에 대한 회개의 표시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믿음을 가져서 칭의를 얻은 자라도 다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과 다시 죄를 짓게 되면 회개를 통해서 다시 칭의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회개의 표시로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뜻에서 자기 집안의 식솔들 중에서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한꺼번에 다 할례를 시행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일은 자기가족을 몰살의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었으나 그는 그러한 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창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아브라함의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취될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처음에 희미했던 것이 이제 점차로 확실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의 모습을 한 채 두 명의 천사들과 함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다. 그리고 그분은 두 명의 천사를 소돔과 고모라성으로 보내신다. 그리고 홀로 남아서 아브라함에게 드디어 아브라함의 자손이 어떻게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될 것인지를 들려주신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태어나는 아들을 통해 성취하시겠다는 것이었다. 즉 "내가 내년 이맘 때에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고 하신 것이다. 그러자 사라가 장막문 뒤에 있다가 속으로 웃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나이는 이미 89세, 남편의 나이도 이미 99세가 되어 소망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사라의 반응을 아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4)" 그리고 다시 1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런데 정말 사라에게 아들이 생겨졌고 아들을 낳게 된 것이다. 그가 바로 이삭이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아는가? 그 모습이 창세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한복음 8장에는 나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기뻐 소리쳤으며)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그랬다. 그때 아브라함은 이삭이 태어난 것을 보면서 뛸듯이 기뻐하며 즐거워했던 것이다. 왜 그랬는가? 그것은 이삭을 보아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아들로 다시 오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믿음에 관한 예표였다. 다시 말해, 그때 아브라함이 낳았던 이삭은 예수님에 관한 예표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때가 차매 여호와께서 아들의 모습으로 오셨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그 말씀이 성취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여호와께서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아들로 오실 때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되고 그 약속을 따라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비로소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잘 몰랐던 것이다. 아들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성취될 것이고, 그 일로 말미암아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탄생하게 될 것임을 당시의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브라함은 나에게 이렇게 하지 않았느니라(요8:40). 아브라함은 여호와가 올 때에 그렇게 기뻐하였으며 환영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 그 여호와께서 아들의 신분으로 왔는데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탄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최초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비로소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창22장의 사건으로 가보자. 그리고 시간이 다시 흘러 적어도 25년 내지는 37년의 시간이 흘러갔다(이것은 학자들마다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성년이 된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저함없이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아들을 묶어 칼로 아들의 심장을 찌르려고 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급히 천사를 보내 아브라함을 막아섰다. 그리고 놀라운 약속을 주셨다. 그것은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들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기 때문이니라(창22:16~18)"고 하신 것이다. 그랬다. 아브라함은 비로소 그의 한 명의 씨를 통해서 복을 받게 될 것이고, 천하만민도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그러자 그후로는 아브라함을 더이상 시험하지 않으셨다. 

 

8.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처음에 그는 자기로 말미암아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며 자기가 큰 복을 받는데 그것으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들까지도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창12:1~3).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는 잘 몰랐다. 그러나 도저히 아들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하셨다. 그리고 하늘의 별을 보여주셨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것을 그대로 믿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축복해주었다. 그 믿음을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때 가졌던 믿음은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이내 불신앙적인 행동을 통해 다른 아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가 바로 이스마엘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13년동안 그를 떠나셨다. 그리고 다시 오셔서 그에게 회개라고 하셨다. 그것의 표시는 바로 "할례"였다. 그는 이제 두번 다시 자신의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을 것임을 육체에 새겼다. 그리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르겠노라고 할례를 행했다. 그러자 비로소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아들을 약속해 주셨는데, 그 아들이 태어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오신 증거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삭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회개를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되고 천하만민도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고로 이때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다시 오셔서 아들로 태어나심으로 모든 인류에게 복을 주실 것임을 그가 믿은 것이다. 그리고 아들 독자 이삭을 바치려 함으로 그것은 더욱 온전해졌다.

  그러므로 사도바울도 갈라디아서 3장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믿었던 약속은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뜻을 이룬다는 약속이었음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 약속은 여러 후손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씨 곧 그리스도를 통한 것이라고 언급한다(갈5:16). 그렇다. 사람이 처음 믿었을 때부터 그 믿음이 온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수를 통해서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다시 믿음은 회복된다. 회개할 때 믿음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그것은 확실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처음 믿었을 때 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의 출발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칭의를 얻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회개를 통해 온전한 믿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순종을 통해 확고해져야 한다. 이런 자들이 믿음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자들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9. 나오며

 우리는 언제부턴가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잘못된 교조주의 신앙에 빠져버렸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데만주의(Sandemanism)도 바로 그러한 인식론적 구원론의 하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정립할 때가 되었다. 회개가 동반되지 않은 믿음은 사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순종으로서 표현되지 않은 믿음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믿었던, 시작으로서의 칭의를 마치 구원인량 받아들인채,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구원받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위로하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했던 야고보서의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믿음에 있는가 우리의 믿음도 날마다 점검되어져야 한다다. 사실 우리는 예수께서 믿음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고 예수께서 칭의를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더 주목했어야 했다. 하지만 쉽게 믿고 쉽게 천국가고 싶어서, 예수님의 말씀은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주의 종들도 교인들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값싼 복음을 전파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그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입술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마다 비대면 예배로 전환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과연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니 두렵기도 하다. 앞으로는 믿음없는 자는 점점 더 주님으로부터 멀어져갈 것이다. 없는 자는 있는 것 까지 빼앗기고 말 것이다. 오, 그날이 이렇게 쉬이 찾아올 줄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 시험대에 놓여있다. 이 시기에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갈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미적미적거리다가는 세상사람으로 전락하기 딱 쉬워졌다. 큰 일이다. 정신차려야 한다. 그라기 위해서는 지금 나의 상태를 점검하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정상적으로 회복시켜야 한다. 그래서 언제라도 죽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주님이 오실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2020년 08월 26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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