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강해(06) 율법을 주신 목적과 그 한계(1)(갈3:10~4:11)_2020-09-09(수)

by 갈렙 posted Sep 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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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0XyYxqprygg
날짜 2020-09-09
본문말씀 갈라디아서 3:10~4:11(신약 304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율법의행위와믿음,율법의저주,성령의약속,언약을믿음,아브라함의복,율법의역할,율법의한계

바울이 말하는 "율법"과 "율법의 행위들"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이해할 때에 갈라디아서는 밝히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율법의 행위들은 유대율법주의자들이 칭의를 얻는 데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나아가는데 율법은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율법의 행위들은 사실 걸림돌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예수님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오늘은 그것에 대해 알아보자.

 

1. 들어가며

  갈라디아서는 바울로부터 전도를 받아 구원을 얻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유대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미혹을 받아 처음 믿음에서 떠나자, 무엇이 참된 복음이며 무엇이 바른 신앙의 삶인지를 책망하고 바로잡기 위한 책이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의 1차전도여행을 통하여 세워진 교회들로 추정되는데, 그들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하여 칭의를 얻고 성령도 받고 능력도 받은 자들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자라도 율법의 의식(규례)들도 지켜야 구원얻는다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꾀임에 넘어가게 된다. 그러자 이 사실을 듣게 된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과 자신이 전해준 복음이야말로 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신적 기원을 밝히면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칭의를 얻게 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밝혀준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자들이라면 이제라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갈라디아서의 다섯번째 시간으로서, 율법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율법의 한계 및 율법은 폐기되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은 그 첫번째 시간이다. 

 

2. 사람이 복을 얻으려면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얻는가 아니면 듣고 믿음을 통해서 얻는가?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로부터 직접 복음을 들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를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복을 받는다는 것이었고 실제로도 그랬었다. 하지만 바울 이후에 들어온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이와는 많이 달랐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예수님을 이 믿은 자라도 그는 할례를 받아야 하고(갈5:3~4), 각종 규례들 곧 날(안식일)과 달(월삭)과 절기(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칠칠절,나팔절,초막절)와 해(면제년, 희년)를 지켜야 하며(갈4:10~11), 음식도 정결한 음식만 먹어야 하며,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이방인과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만 바울의 가르침을 버리고 새로운 유대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그들을 향해 강경한 어조로 책망하였다. "너희가 칭의를 얻고 성령을 받은 것이 과연 율법의 행위들을 지켜서였느냐 아니면 듣고 믿어서였느냐?(갈2:16,3:2)" 그랬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지켜서 의로움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범죄하여 죽음이 그들의 죄값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인류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결국 죄사함도 받고 칭의도 얻고 성령도 받고 구원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성도들로 하여금 바울이 전했던 순수한 복음에서 떠나도록 미혹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이 정말 칭의를 얻고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의 행위들이 있어야 하는가? 바울은 말한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었는데, 그가 유대율법주의자의 주장을 따라 다시 할례를 받고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만드는 자들이라고 했다(갈2:21).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율법의 저주들을 속량하시기 위함이었는데(갈3:13), 예수님을 믿은 자가 다시 율법의 규례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량을 헛되이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은총을 믿어서 칭의도 얻고 성령도 받는 것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면서, 율법의 행위들로부터 복을 받으려 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게 될 뿐이라고 지적하였다(갈3:13).

 

3.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받았는가?

  이어서 사도바울은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으며 또한 하늘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을 아브라함이 제일 처음 알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랬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신다는 약속을 그대로 믿었다(창15:6). 그러자 그의 믿음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쉽게 말해 그때 칭의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들어와 갈라디아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분들은 아브라함이 처음 가졌던 자신의 믿음이 자신이 받은 칭의를 계속해서 효력있게 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가 얻었던 칭의가 곧이어 없어질 위기에 처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의 가진 믿음이 흔들려서 그만 범죄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칭의 사건이 있고 난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한 채 육체를 따라 큰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창16:1~4). 즉 자신의 아내의 여종인 하갈을 취하여 후손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위를 잘못 되었음을 그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기 위해, 무려 13년 동안이나 아브라함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리고 13년 이 지난 후에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행위를 회개할 것을 요구하셨다(창17:1).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몸에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었다(창17:10~11). 다시는 자신의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겠다는 것을 몸에 새기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정리해보자. 칭의는 사실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얻는다. 어떤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있어서 주님께 칭의를 얻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얻었던 칭의가 영원무궁토록 불변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칭의는 얼마든지 취소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가 회개하기를 요구하셨던 것이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온 집안 남자들을 다 데려다가 할례를 행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칭의를 비로소 인쳐주셨다(롬5:8). 그제야 그때 그가 믿음으로 받았던 칭의가 드디어 견고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칭의를 얻은 성도라 할지라도 한 번 믿음으로 얻은 칭의가 영원불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얼마든지 믿음에서 흔들릴 수 있고 믿음에서 떠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통해 얻은 칭의가 소실되지 않도록 늘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회개만이 자신이 믿음으로 얻은 칭의를 보존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그랬기 때문이다. 고로 만약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얻은 칭의가 영원토록 불변할 것이라는 생각하에, 그만 죄짓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는 죽는 그날 칭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주하시게 된 성령께서도 구속의 날까지만 성도를 인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엡4:30).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계속해서 거부하고 또한 죄를 책망하시는데도 회개하기를 거부한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는 자신이 지은 죄들을 속죄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죽는 날 자기 안에 내주하시던 성령께서 그 사람을 떠나가게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브라함이 받았던 칭의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축복은 그가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고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뒤에도 우리는 결코 자신의 믿음을 배반하지 말아야 하며, 믿음에서 떠나가지도 말아야 한다. 혹시 죄를 지었더라도 즉시 회개하여 다시 칭의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한다. 

 

4. 오늘날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복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믿음만 있으면 자신도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것은 과거 예수님 당시, 할례만 받으면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아브라함이 받았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자들의 생각과 같다. 역시 오늘날에도 자기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칭의도 얻고 하늘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당시 아브라함이 복을 받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어서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은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다시 찾아오게 되면 아브라함 자신에게 아들이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가리킨다(창18:10,14). 그후 1년만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게 되자 아브라함은 뛸듯이 기뻐했다(요8:56).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오신 증표였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 복을 주시겠다고 다시 약속하셨고 그 약속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다시 말해, 온 천하 만민은 다 여호와께서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복을 받게 된 것이다(창22:17~18).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께서 아들로 오신 예수님(요8:24,28,58)을 나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되신 그분을 우리가 나의 구원자로 믿을 때에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칭의도 얻고 하늘의 상속자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구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값을 처리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을 믿을 때에 내가 지은 죄값을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또한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이 전수되어ㅗ, 나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도 되어 하늘의 기업을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5. 율법이 언약보다 더 중요한가 아니면 언약보다 율법이 더 중요한가?

  그러므로 우리가 이상과 같은 사실을 통해 정리하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언약)보다 오히려 430년 뒤에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결코 약속보다는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갈3:17). 사람들도 서로간에 한 번 약속했으면, 그 뒤에는 그것을 누구도 폐하거나 더하지 못하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어찌 언약 뒤에 제정된 율법이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폐하거나 혹은 거기에다가 다른 것을 더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갈3:15). 사실 칭의를 얻거나 하늘의 상속자가 되는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회개할 때에 주어는 것이지, 결코 율법을 지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갈3:18). 사실 나중에 또한 살펴보겠지만, 율법은 사람이 자신이 무슨 죄를 지어서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이 상실될 위기에 처해있음을 알려주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갈3:19). 

 

6.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과 그 역할은 무엇인가?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보다 430년 뒤에 주어진 율법은 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 사도바울은 율법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다만,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복을 받지 못하고, 율법규례들을 지켜야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미혹하는 자들을 책망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썼다. 그는 결코 율법폐지론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강조한 것은 사람이 율법의 규례들을 지켜야만 비로소 칭의도 얻고 성령도 받고 하늘의 상속자도 된다는 거짓된 속임수에 미혹받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임시로 주어진 법이기 때문이요(갈3:19),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를 그 근본적인 이유를 가르쳐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갈3:24). 다시 말해 율법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필요성을 깨우쳐주기 위해 중간에 임시로 주어진 법이라는 것이다(갈3:23).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율법이 과연 어떤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보았을까? 사도바울은 첫째, 율법은 범법하므로 더해진 것이라고 말했다(갈3:19a).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이 자신이 법을 위반했는지도 모른채 있기 때문에 "당신은 법을 위반 것이오"라고 알려주기 위해 추가로 주신 말씀이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 그 행위들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율법의 전 조항들을 다 지킬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 이미 죄된 본성이 사람 속에 주입되어 들어있고, 죽는 그날까지 사탄마귀가 귀신을 통하여 우리를 미혹하기 때문에 죄에서 온전히 벗어나서 의만 행하고 살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것을 지켜서 자신이 의로운 자인 것을 드러내라고 주신 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일종의 자기자신의 상태를 비춰보아 자신의 상태를 알게 해 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다. 

  둘째, 이어서 사도바울은 율법은 아들로 주어진 법이 아니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 안에서 제정된 것이라고 말했다(갈3:19b). 여기에 나오는 '중보자'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 서 있던 모세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왜 "천사들을 통하여"라는 말이 그 중가에 들어있는 것인가?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전통으로 내려온 이야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율법을 여호와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천사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세가 80세 때에 미디안 광야에서 양떼를 치다가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은 때에 그가 가까이 가서 더 자세히 보려다가 결국 그곳에서 여호와의 천사를 만나게 된다. 그때에 하나님께는 그때 여호와의 천사의 입을 통하여 모세를 부르셨고 또한 그에게 사명을 주셨다. 그러면 모세가 만난 것은 여호의 천사인가 아니면 여호와 자신인가? 그런데 마찬가지로, 모세가 40일금식 후에 시내산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에 과연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인가 아니면 이번에도 여호와의 천사를 통해서 받은 것인가?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입술과 손을 사용하여 그에게 율법말씀을 주신 것인가? 한편,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그때 모세에게 말씀을 전해준 자가 "여호와의 천사"였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사상은 유대인의 전통에 사실 뿌리 깊이 스며 있다. 그래서 율법과 구약성경에 조예가 있었던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그와같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그때 스데반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모세)은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말하고 있는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던 자라. 또한 그는 살아있는 말씀을 받았다. 우리에게 그것을 주기 위하여(행7:38)", "너희가 천사들이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7:53)" 그렇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기는 맞지만 천사의 중보의 손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 가운데서 가장 구약성경다운 책이라고 일컬어지는 히브리서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온다. "왜냐하면 천사들을 통하여 발설되었던 말씀이 견고하게 되었고, 모든 범죄함과 불순종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기 때문이라면, 우리가 [아들로 말미암아 주신]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겠느냐(히2:2)" 그렇다. 훗날 복음은 아들인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면 율법은 천사를 통하여 주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를 왜 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여호와께서 직접 나타나 아브라함에 주신 약속이 결국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에, 중간에 끼어들어든 율법이 약속보다 더 우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유대율법주의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사도바울이 율법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율법의 위치가 그렇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율법은 약속 다음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임시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제한적으로 주어진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바울은 율법의 기능과 역할을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는 율법의 한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하는데, 이후의 내용은 시간관계상 다음 주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7. 나오며

  오늘날에 이신칭의 교리는 많이 왜곡되어 있다. 왜냐하면 오직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오직 믿음"이라는 말도 성경에 나오지 않을 뿐더러,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그것은 아들로 오신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귀하고 소중한 일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에 들어있는 과정은 생략한 채, 그냥 "나는 예수님을 믿으니까 칭의도 받았고 구원도 이미 받았어"라고 쉽게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내가 할례를 받았으니까, 나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복도 받을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아니다. 믿음도 어떤 믿음인지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 어떤 약속에 관한 믿음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분명히 아는 자는 결코 성령을 외면하지 않으며 죄를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칭의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이내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 채 육체를 따라 행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받은 칭의가 보존되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처럼 할례와 같은 회개가 같이 있어야 한다. 회개 없이는 결코 한 번 가졌던 믿음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서 말씀을 들었던 아브라함도 믿음에서 떠나 육체대로 행한 것이 실제일진대, 다른 사람들은 이에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행위들로부터가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칭의를 얻는다고 말할 때에는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복음을 믿게 되었으니, 내게 율법 따위는 필요 없어"라고 말해서도 아니 된다. 율법은 제한적이지만 율법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았더라도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거역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율법의 역할은 계속해서 필요하다. 왜냐하면 율법을 모르면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고 있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성령의 음성에 따라 순간순간마다 책망을 받고 있다면, 그는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회개하겠지만, 만약 자신의 자유의지로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면 그는 율법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 회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율법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앞부분을 살펴보았다. 다음 주에는 그 나머지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율법이 지닌 한계점까지는 살펴보고자 한다. 

 

2020년 09월 0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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