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강해(09)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1)(갈 5:1~26)_2020-10-07(수)

by 갈렙 posted Oct 0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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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zH_eE8HZZM0
날짜 2020-10-07
본문말씀 갈라디아서 5:1~26(신약 308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자유, 그리스도인의자유,자유대헌장,율법,종살이,그리스도,사랑섬김,성령인도,성령을따라,성령의열매,육체의일들,성령과그영,영과그영

1. 들어가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누구나 자유가 주어져 있다. 하지만 이 자유가 어떤 자유인지를 잘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잘못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란 대체 어떠한 자유인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게 해주는 인간의 의지는 루터가 말하는 노예의지처럼 앞으로 한 발자국도 스스로 내딛지 못하는 의지인가 아니면 정말 인간의 의지에 따라 조정될 수 있는 자유의지인가? 우리는 갈라디아서 5장을 통하여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과연 무엇을 위한 자유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졌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조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에 대하여 놀라운 새로운 빛이 비춰지기를 바란다. 

 

2. 갈라디아서 5장의 위치는?

  갈라디아서 5장은 일종의 "실천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고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가 과연 어떤 성질을 갖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실 갈라디아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갈1~2장까지로서, 일종의 "변론편"이다. 여기는 바울이 전한 복음의 신적 기원과 사도직의 신적 기원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둘째로, 갈3~4장은 일종의 "교리편"이다. 여기에는 율법의 행위과 믿음을 비교하고, 율법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율법의 한계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고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과 자유로운 아들에 관한 비교가 나온다. 그리고 셋째로, 갈5~6장의 말씀은 교리편에 이어지는 말씀으로써, 이것은 일종의 "실천편"이라 하겠다. 그것은 약속을 믿어 성령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갈라디아서 5:1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대헌장(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어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2~12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것인가?"에 대한 말한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준수하려는 자의 일례인 할례준수를 들어서, 할례준수의 무익성과 그 해악성을 언급한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13~6:10에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에 대한 해설로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를 말하는데, 그것은 사랑의 섬김을 실천하는 일이며,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인 것을 언급한다. 

 

3. 노예의지와 자유의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갈라디아서 5장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그것에 대한 올바른 사용에 관한 말씀이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집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신학적 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의지"에 관한 말씀이다. 언젠가 루터는 종교개혁을 펼쳐나감과 동시에 늘 노예의지론을 강조했다. 사람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죄를 짓기 위한 의지 곧 노예의지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서 종교개혁자 칼빈은 성도의 견인(보존)을 주장하면서, 인간에게는 더이상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해버렸다고 말했다. 이것을 일컬어 후대사람들은 "전적인 무능[력]"이라고 교리화시켰다. 이는 아담의 타락은 육체와 영혼에 있어서 전적인 타락이므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면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달을 수도 없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 편으로 맞는 말이지만, 한 편으로는 틀린 주장이기도 하는데도 말이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전적인 무능은 잘못된 교리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에 반응할 수 있는 어느정도의 의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향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나님께서 다 해주셔야 된다고 한다면,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구원과 영생을 얻도록 당신에게 나오기를 초청하지 말았어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늘 죄인들을 초청하셨다. 즉 부른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비록 타락했어도 하나님께서 초청하시면 그것에 반응할 수 있는 정도는 갖고 있다는 것을 증거해준다. 그래서 인간의 의지가 비록 죄를 짓는 노예의지가 되어버렸어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면 그것에 대해서 반응할 정도는 남아있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는 것이다. 특히 예수께서 인간의 상태를 정의하실 때에 이사야 42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며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마12:18~21)" 그렇다. 인간은 상한 갈대이며 동시에 꺼져가는 심지인 상태인 것이다. 그대로 가만히 둔다면 인간은 꺾여지고 말 것이며, 불도 그만 꺼지고 말 것이다. 그래도 인간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상태에 있다. 자유의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그것에 반응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자유의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선을 전혀 행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이 아니다. 다만 스스로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반응할 수 있는 정도는 되는 것이 또한 우리 인간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있다. 그래서 죄인들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스스로 구원으로 나아가기가 턱없이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인일지라도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면, 인간은 자신의 손을 내밀어 주님을 붙잡고 그분의 구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정도는 된다. 그래서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임으로 구원의 노정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이자 주님으로 모셔들일 때에 주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을 보내신다는 것이다(갈4:6). 여기서부터 인간에게 있어서 놀라운 변화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전에만 해도 인간은 죄를 짓기를 더 좋아하며 그만 죄에 넘어가는 노예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심으로 인하여 죄의 욕구보다 더 강한 성령의 욕구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과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받은 자의 삶의 모습은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는 죄된 본성을 가진 육체를 쳐 복종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성령의 의지를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율법에 얽매였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준 장본인이기 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받을 모든 저주를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저주와 속박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늘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자유는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있는 자는 다시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율법에 매여 있기를 원하는 자 곧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3가지를 말했다. 

  첫째,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할례를 받는다면 그에게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는 무효화되어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갈5:2). 둘째,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할례를 받은 자들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떠앉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와 해방을 경험한 자유인이 도로 저주 아래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갈5:3).셋째,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는 모든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이미 끊어졌고, 은혜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갈5: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오직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만이 효력이 있다고 한 것이다(갈5:6).

  그러나 당시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와 성도들을 어지럽히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사도바울은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고 했다. 들의 적은 누룩 곧 작은 율법주의적인 오류들이 결국 온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갈5:7~9).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요동케 하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했다(갈5:10). 사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할례를 전파했더라면 그는 아무런 핍박도 받지 않았을 테지만, 그렇게 되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골로 갈라디아성도들을 어지럽힌 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거세하듯 잘못된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고 권면하였다(갈5:11~12).

 

5.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대체 무엇을 하라고 주신 자유란 말인가? 그것은 그것으로 자신의 육체에게 기회를 주어, 마음껏 죄지으라고 주신 자유가 아니다(갈5:13).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약속의 자손인 예수님을 믿어 자유를 얻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자유로서, 죄된 본성으로 가득 찬 육체를 따라가야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갈5:16).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주신 순전한 자유를 가진 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첫째, 그 자유로서 오히려 사랑으로서 서로에게 종노릇해야 한다고 했다(갈5:13). 그리고 둘째, 자기를 성전 삼고 거하시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하며, 영의 인도를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갈5:16~18). 

 

6.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런데 믿는 자들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누군지도 정확히 모른 채, 어떻게 해야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자가 많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아직까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기는 이미 모든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제는 지신이 어떤 죄를 짓더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모든 인류의 죄값을 다 치렀을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모든 인류의 죄값을 속량하고도 남음이 있는 피이기는 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회개하지도 않은 자의 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며, 아짓 짓지도 아니한 죄까지 용서해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통하여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후에는 우리를 성전삼고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지, 마음껏 죄를 지으라고 주신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때 성령의 인도함을 잘 받을 수 있는가? 사도바울은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갈5:18). 왜 사도바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고 말하지 않고, 영의 인도를 받으라고 말했던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성령"과 "사람의 영"과 그리고 둘이 "연합된 영"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 "성령"이라는 용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모두가 다 의역이었다. "거룩한 영"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안 나오기 때문이다. 다만, 정관사가 붙어있는 "그 영"이거나 정관사가 붙어있지 않는 "영"이라는 단어만 나올 뿐이다. 특히 갈5:18에 나오는 성령은 "그 영"도 아니라 그냥 "영"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5:18에 나와있는 "영"은 무슨 영인지를 알아야 하고, 또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먼저, 갈5:18에 나오는 "영"은 무슨 영인가? 그것은 "성령"이 될 수도 있고, 성령과 사람이 하나된 "그 영"이 될 수도 있으며, "거듭난 사람의 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특히 갈5:18에 나오는 영은 수식어나 정관사가 정확히 붙어있지 않기에, 사람의 거듭난 영을 가능성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런데 잘 알파시피, 사람들은 자신의 영의 상태에 따라 두 종류의 사람들로 구분되고 있다. 하나는 사람의 영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의 영과 보혜사 성령의 영이 하나된 연합된 영일을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갈라디아서 편지는 이미 믿음으로 성령받은 자들에게 보낸 편지이기에(갈3:2). 이 사람들의 영은 불신자의 영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으며, 최소한 거듭난 성도들의 영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것을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된 영으로서 "그 영"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단순히 "영'이라고 언급하여서,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갈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거듭난 사람 자기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더 강조할 때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6:17에서 "주와 합하는 자는 하나의 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후3:17에는 "이제 주님은 그 영이시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주 예수께서 성령으로 믿는 자들 속에 내주하시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믿어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모두에게 다 자신의 영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죽는 그날까지는 성령과 우리의 영은 분리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죽는 그날에는 성령과 우리의 영의 분리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런 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자들이지만 지옥에 떨어질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결코 지옥에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영 속에 들어오시는 성령의 인도를 잘 받아야 한다. 그 영을 슬프게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엡4:30). 만약 계속해서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도 성령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아 지은 죄를 회개하지도 않는다면 그가 죽는 날에 가서 성령께서 그를 떠나시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성도들은 반드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분의 책망에 순종하여 회개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성령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성령께서 떠나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7. 나오며

  예수께서 오심으로 인류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 죄된 본성 안에만 갇혀 있던 사람들이 성령으로 인하여 죄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전까지, 사실 모든 인류는 죄된 본성에 갇혀 그것들에게 종노릇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이 범죄하고 있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율법을 통하여 모든 인류는 죄를 깨우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한정되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임시법인 율법에 갇혀있는 자들을 놓아주고 인류의 새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아들의 신분으로 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에는 저 하늘로 되돌아셨고 대신 우리 영 속에 내주하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성도들과는 천양지차 다른 성령의 경륜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이제는 성령께서 직접 우리에게 죄를 깨우치시고 바른 길을 안내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잘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성령이 누구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잘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귀신을 성령으로 잘못 알고 잘못 인도받을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잘 몰라 성령의 인도를 잘 따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믿는 이들의 영 속에 들어와 우리의 영과 하나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전6:17). 한 마디로 우리가 죽기까지는 성령은 나의 영과 분리될 수 없는 연합된 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 곧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사람의 영에 더 강조점을 두어 말하면, "영의 인도"라고 말할 수 있고, 성령에게 더 강조점을 두어 말한다면, "성령의 인도"도 될 수가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제 성도는 성령과 하나된 사람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는 자기 안에 성전삼고 들어와계시는 성령의 인도를 잘 따라가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주 이 시간에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2020년 10월 07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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