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강해(04) 성경적인 참된 예정론은 어떤 것인가?(04)(엡1:3~14)_20201-11-11(수)

by 갈렙 posted Nov 1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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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bGczvYuP6MI
날짜 2020-11-11
본문말씀 에베소서 1:3~14(신약 301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교회론,하나님의구원경륜,삼위일체하나님,예정론,칼빈의예정론,성도의견인,성경적인구원론,한번구원영원한구원인가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어떤 뜻을 품고 계셨을까? 에베소서는 우리의 시간을 천지창조 이전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한 분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시고 하시는 일을 그때에 이미 정하셨음을 알려준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서 1장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이다. 그것은 사람이 창조되거나 타락한 후에 나온 것 아니기에,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만세전 예정론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정론은 에베소서의 사상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그것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것을 우리가 잘 모르면 이미 얻은 구원이라도 잃어버릴 수가 있다.

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회람서신으로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책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를 위한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에베소서는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 말씀이 창세전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베소서를 통하여 교회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가 어떻게 탄생하였으며,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품이고, 관심의 대상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교회는 천사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던 놀라운 비밀이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에베소서 1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에 관한 창세전의 계획과 그 목적을 밝히는 위대한 찬양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지난 3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살펴보았는데, 특별히 예정론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획을 따라 교회를 산출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결국 만세전의 예정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이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칼빈의 2중예정과는 어떻게 다르며, 하나님께서 진정 말씀하려고 하는 예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오늘은 네번째 시간으로서, 하나님의 예정 부분에서 "견인교리"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구원은 영원한 것이며 안전한 것인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구원예정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엡1:3~14의 말씀에 따라, 지난 3번의 시간을 통하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예정이 창세전에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예정은 결코 개인구원예정이 아니었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즉 하나님께서는 많은 피조물 가운데 특별히 인간을 선택하시어 그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고 그들을 하늘나라의 기업을 잇게 할 상속자로서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보편적으로 알려진 예정론은  에베소서가 말하는 예정론과 다르다. 사실 우리나라에 보편적으로 소개된 예정론은 칼빈의 예정론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개인에 관한 이중구원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의 예정론"이란 성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사람들 중에서 어떤 개인을 각각 예정하셨는데,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하시고, 어떤 이는 영원한 멸망으로 예정하셨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우리(사람들) 중에 어떤 특정한 개인을 구원하기로 창세전에 예정하셨다는 말씀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럼, 어떻게 개인구원예정이 나왔을까? 그것은 구원이 신적 작정으로 시작된다는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칼빈이 이어받아 나온 결과물로서, 그것은 결코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시되 어떤 개인을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하시지 않았으며, 어떤 개인을 만세전에 멸망에 처하기로 예정하지도 않으셨기 때문이다. 에베소서가 말하는 예정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 중에 주님의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임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예정의 대상은 어떤 특정개인이 아니라 사람들 중에 "불특성 다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예정론을 가장 대변해주는 가장 좋은 예가 마태복음 22장에 나온다. 그것은 어떤 왕이 자기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것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말씀이다. 왕은 자신의 아들의 잔칫날이 다가왔을 때에 혼인잔치에 약속된 사람들을 데려오도록 자신의 종드을 보낸다. 하지만 약속했던 사람들은 한사코 사양하고 잔치자리에 오지 않았다. 어떤 한 사람은 밭에 일하러 간다고 가버렸고, 또 한 사람은 사업하러 간다고 가버렸다. 그러자 왕이 대노하였다. 그리고는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초청받은 자는 합당하지 않으니, 사거리 길로 가서 만나는 대로 사람을 혼인잔치에 데려오라고 시킨다. 그러자 그의 종들이 나가 자초지종을 아뢰고 잔치자릿수만큼 사람을 채추게 된다. 이것이 이 비유의 대강스토리다. 그리고 이 비유를 들려주셨던 주님께서 최종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초청함을 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 그렇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초청하는데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우선 초청대상으로 삼으셨다. 하지만 막상 그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을 때 그들은 아들의 혼인잔치에 오기를 거부하고 말았다. 그러자 주님은 자리를 이방인들로 하여금 채울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경륜인 것이다. 이미 초청대상자에 예정되었어도 거부한 자들은 잔치자리를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선 초청 대상은 아니었지만 그 다음으로 이방인들에게 구원받을 기회가 넓게 열려지게 되었다. 구원받을 기회를 유대인이 발로 걷어차버렸기 때문이요, 모든 민족으로 확대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따라 이방인에게도 그 기회가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에 기쁘게 응답하게 된다. 그러자 혼인잔치에 손님이 가득차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정이란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것이 아니라 구원 안으로 초청받았을 때에 그것에 반응하는 자가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구원받을 자는 이미 개인별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잔치자리 숫자만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누가 그 자리에 채워질른지에 대하여는 정해진 불변의 작정이 없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초청하실 때에 그 초청에 감사함으로 응하는 자가 예정안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개인구원예정과 개인멸망예정을 만세전 예정을 언급하면서,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들어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에서와 야곱의 경우는 만세전에 어떤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건이 결코 아니다. 두 민족이 어떻게 쓰임받을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사라의 입을 통하여, "큰 자(형=에서)가 어린 자(동생=야곱)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신 것 뿐이다. 그러므로 야곱과 에서의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구원예정이 아니라 그들에 관한 사역예정이며, 개인예정이 아니라 두 민족의 쓰임에 관한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세전예정론에 한 번 빠진 자들은 도무지 칼빈의 이중예정론의 영향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하지만 오늘날 진리를 따라가고자 하는 성도들은 교단교리나 신학자의 말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 일점일획도 빼버리거나 더하지 않는 말씀을 따라가고자 한다. 그것은 유대인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계획이다. 지금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회개하고 믿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초청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초청에 응하는 자는 구원을 받겠지만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전능한 하나님일지라도 그들을 구원하시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누구든지 구원으로 초대를 받았다면 그는 즉시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야할 것이다. 

 

3. 칼빈의 예정론의 5대 교리와 그 핵심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칼빈의 예정론의 핵심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그것은 그가 1559년에 썼던 기독교강요(최종판)를 보면 잘 살펴볼 수 있다. 특별히 기독교강요(최종판) 제3권의 21장부터 24장에 예정론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자 후대의 칼빈의 후예들은 거기에 나온 칼빈의 구원사상을 5가지 교리로 정리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들 그것을 "칼빈의 5대교리"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내 칼빈의 제자였다가 돌아섰던 알미니우스에 의해 칼빈의 예정론이 틀렸다는 것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칼빈의 5대교리를 제대로 한 번 이해하려면, 이것이 생성되었던 과정을 좀 이해하고, 왜 오늘날 칼빈주의가 장로교의 근간이 되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세한 사항은 전의 에베소서 강해시간(1, 2, 3)에 나와 있으니 그것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오늘은 간략하지만 에베소서 1:3~14에 나오는 말씀을 중심으로, 칼빈의 5대교리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특별히 성경의 견해와 칼빈의 5대교리를 비교해보고자 한다. 그것은 과연 칼빈의 주장이 성경적인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의 5대교리가 에베소서에서는 순서가 약간 다를 것이이다. 하지만 5대교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떤 것이 먼저 앞선 것이다고 말하기는 조금 곤란하다. 그럼, 칼빈의 후예들은 칼빈의 예정론의 5대교리를 이렇게 정리해서 말했을까? 그것은 "1)전적타락(전적무능력), 2)무조건적인 선택, 3)제한속죄, 4)불가항력적인 은총, 5)성도의 견인"이 그것이다. 그러나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예정론의 교리를 정리해 간다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사..."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을 가지고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을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어떤 개인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게 개인을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다는 말씀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어떤 대상을 정할 때에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그 대상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로서, 누구든지 초청하는 구원의 소식을 듣고 반응하여 주님 앞으로 나온 자를 선택하신다는 것이다. 만세전에 구원받기로 선택함을 입은 어떤 개인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피조물인 천사들과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천사가 아닌, 인간을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내용은 교회가 탄생할 때까지 비밀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천사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것었으며, 그 비밀의 핵심은 결국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하늘의 상속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둘째, 에베소서 1:7절에 의하면, 이번에는 칼빈의 5대교리 중에서 2 가지가 나온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라는 말씀을 통해서는 "불가항력적인 은총"의 교리가 나왔고,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에서는 "제한속죄'라는 교리가 나왔다. 그렇다면, 과연 "불가항력적인 은총"과 "제한속죄"라는 칼빈의 교리는 진정으로 성경에서 나온 것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아니올시다"이다. "불가항력적인 은총"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선택된 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도록 은혜를 베푸시면 그 은혜에 아무도 저항할 수 없다는 교리다. 하지만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파괴되었지만 남아있는 자유로 하나님의 역사를 지금도 거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예수믿어 성령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판국에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주님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나아오지 않는 유대인들을 보고 얼마나 안타까워하셨는지 모른다(요5:40,계3:20). 그리고 "제한속죄"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성부께서 택한 자들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누가 구원받을 것인지를 예지예정하셨음으로, 구원받을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둘 다 성경적인 견해는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속죄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딤전2:4,요일2:2). 다만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속죄의 피의 효능을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가능항력적인 은총을 베풀어주셔야 하는 이유를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는 데에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타락하여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초청할 때에 그것에 아무것도 반응할 수 없을만큼 타락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을 죄인취급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을 악하다고 정의하며, 선을 전혀 행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이라고 몰아간다. 그러나 그건 아니다. 인간이 비록 아담의 범죄로 타락했으나, 선을 전혀 행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 다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시려고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의 속죄사역에 절대적으로 기인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전적인 무능력자요 악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상태를 마12:20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말이다. 인간은 상한 갈대이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언젠가는 꺾여져서 죽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꺼져가는 등불이기에 그대로 놔두면 언젠가는 꺼져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자는 죽어가는 상태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고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4. 성도의 견인교리는 과연 성경적인가?

  그런데 칼빈의 이중예정론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맨 마지막인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다. 이 교리는 한 번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된 자들은 결코 믿음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사람이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계속해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한 번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결코 멸망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끝까지 유효하며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교리가 성경적이며 사실인가? 정말 사람이 한 번 믿음을 가져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는가? 그건 아니다. 이미 믿고 회개하여 구원의 노정에 들어온 자라도 결국 탈락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마7:21~23, 딤전1:19,4:1, 고전9:27, 히6:4~8,4:1,10:26~29, 약2:14,26, 계3:5) 즉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과 야고보장로와 히브리서기자와 요한계시록을 보면, 이러한 예는 엄청 나다. 한 번 영생을 가졌다고 해서 그 영생을 결코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자들은 한 번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여 믿음을 가졌으면 그는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한 증거로서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련성경구절은 거의 대부분 미래형이거나 소망들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말씀중에서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은 역시 요한복음 6:37,39과 요한복음10:28~29의 말씀이다. 오늘은 시간관계상 앞에 나와있는 요한복음 6:37과 39의 말씀만 우선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성경이나 영어성경은 거의 다 이 말씀을 왜곡하여 번역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번역본들이 헬라어원문과는 다른 번역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중성단수"로 번역해야 할 단어를 "남성단수" 내지는 "남성복수"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요6:37,39의 말씀을 한글성경으로서 살펴보자.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위의 두 말씀을 한글성경으로만 보면, 아버지께서 당신이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을 예수께로 보내주면 그들이 모두 예수님께로 나아갈 것이며, 그런 자를 예수께서는 결코 내쫓아내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들 중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구원할 것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성경은 그러한 말씀이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헬라어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그것을 먼저, 요6:37의 말씀을 헬라어에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요6: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착할, arrive)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오고(come) 있는 이(사람)을 나는 결코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에게 도착하고 있는 것과 예수님에게 오고 있는 것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헬라어원문에 의하면, 아버지께서 예수께 주셔서 예수께 도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것"(중성, 단수)이다. 그러나 '모든'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기에, 중성 복수적인 의미다. 그런데 대한민국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약 20여종의 성경들은 이 단어를 "중성 단수(~하는 것)"로 번역하지 않고, "남성 단수(~하는 자/~하는 사람)" 내지는 "남성 복수(~하는 자들/~하는 사람들)"로 번역하고 있다. 즉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고 있는 것은 "사람"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예수께 주시는 것은 "어떤 것"으로, 예수님에게 구원받으려고 나아오는 자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구원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주시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에는 "아버지의 능력, 아버지의 권세, 아버지의 지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힘" 등의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오역은 요한복음 6:39도 역시 마찬가지다. 한글성경으로 보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던 분(아버지)의 뜻이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으로 마지막날에 그들을 부활시켜 구원하는 것이라고 읽힌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은 그러한 뜻이 아니다. 여기서도 "중성 단수"를 요6:37의 말씀처럼, "남성 단수"로 바꾸어놓았다. 그럼, 헬라어원문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요6:39 그런데 나를 보내셨던 분의 뜻은 이것입니다. 그가 내게 [이미] 주신 채 있는 모든 것을 내가 그것으로부터 잃지 아니하고 오히려 마지막 날 안에 내가 그것을 단번에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렇다. 아버지의 뜻은 아버지께서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을 예수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것들로서 곧 능력과 권세와 지혜와 사랑 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그것으로 자기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마지막 날에 드러내 보여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칼빈주의의 예정론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성경번역자들의 한계를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구원론의 관점을 흔드는 것이기에, 이것을 그냥 두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 이제는 성경의 원문 그대로 번역하여, 예수님과 사도들이 증언했던 구원론의 관점으로 성경을 다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이 그대로 열릴 수가 있는 것이다. 

 

5. 나오며

  칼빈의 예정론은 사실 그의 처음으로 출판했던 기독교강요(초판, 1536년)에는 나오지 않았던 내용이다. 그의 기독교강요 제2판(1539년)부터 들어가기 시작한 예정론은 이제 제4판(최종판, 1559년)에 이르서는 많은 분량(1장에서 4장으로)으로 늘어났고, 그것은 결국 칼빈의 구원론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이는 사람이 믿고 회개하여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의 예정에 따라 구원얻는 것이라고 바꿔치기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오게 된 배경을 보면 왜 이러한 구원론이 나왔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중세시대가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을 구원의 요소로 집어넣어서 잘못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빈은 믿음으로 얻은 구원론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 예정에 의한 구원론으로 바꾸어놓았다. 그것도 "개인구원예정론"이자, "이중예정론"으로 말이다.  만약 칼빈의 이중개인구원론이 성경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폭군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횡을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묵인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권리를 인간에게 강요하시는 폭군이 아니시다. 그분처럼 사랑이 많으시고 인애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시다. 그분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시는 그러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분이 스스로 공의를 허물어뜨린다면 하나님은 심판자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의로우셨다. 그러나 사랑도 많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과 만세전의 계획을 따라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예정함을 입은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중 어떤 개인이 만세전에 예정함을 입은 것이 아니다. 믿고 회개하는 자의 불특정 다수를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도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구원에서 탈락될 수도 있다.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 아니라, 두렵고 떨림으로 이뤄가야 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은 가장 확실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항상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얼마든지 성령의 음성을 거부하고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핍박과 죽음 앞에서 얼마든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과 회개로 일차적인 구원을 이뤘지만 그것을 지키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믿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아야 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무슨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즉시 즉시 회개하여 죄가 나의 구원의 발목을 붙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1월 11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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