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강해(05) 하나님의 예정의 본질과 계시를 위한 바울의 간절한 기도(엡1:11~23)_2020-11-18(수)

by 갈렙 posted Nov 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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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N2bJ7SHbeZM
날짜 2020-11-18
본문말씀 에베소서 1:11~23(신약 310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성도의견인교리,바울의기도,지혜와계시의영,부르심과기업과능력,그리스도의5대능력,교회는그의몸,교회의첫번째정의

하나님이 작정하신 예정은 과연 오늘날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중예정인가 아니면 그것과는 다른 것인가? 예정론을 잘못 이해하다보면, 운명론에 빠지거나 아니면 무사안일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인 예정론을 알아야 한다. 바울의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맺혀지게 될 열매를 말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산출이었다. 이땅에 존재하지만 장차 하늘에서 거할 사람들의 조직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예정의 요체와 더불어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위해 빌었던 간절한 기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비밀을 제대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1. 들어가며

  에베소서는 아주 깊은 책이다. 만세전의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경륜은 결국 이 땅에서는 교회의 산출로 귀결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경륜에 따른 교회의 산출에 대해서 에베소서를 통해서 만나볼 수 있다. 바울은 이 편지의 서두에서 간단한 인사를 한 후(엡1:1~2), 곧바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소개한다(엡1:3~14). 그것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인간이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하늘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기업을 물려받은 상속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사도바울은 기도문형식으로 소개한다(엡1:15~23). 그것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서 마음의 눈이 떠질 때에라야 비로소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것을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며 그분의 엄청난 능력들이 이제는 성도들에게 머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의 핵심이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하나님의 구원경륜 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예정론의 핵심골자인 견인교리를 좀 더 들여다보고, 이어서 바울의 기도와 그의 첫번째 교회론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2. 칼빈의 예정론 가운데 "성도의 견인"은 과연 성경적 교리인가?

  에베소서 1:3~14은 예정론을 말할 때는 항상 등장하는 본문이다. 그렇다면, 칼빈이 주장했던 "이중예정론"은 과연 성경에 근거한 것일까? 놀라운 사실은 엡1:3~14과 그 어디에서도 이중예정론을 지지해줄만한 확실한 성경구절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지지해주는 성경구절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뒷받침해줄 성경구절은 발견하기 매우 어렵다. 왜 그런지는 우리는 지난 4번의 시간을 통하여 어느 정도 살펴보았다. 오늘은 칼빈의 이중예정론교리 가운데 5번째 항목에 해당하는 "성도의 견인"교리가 과연 성경적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1,618년 도르트회의에서 결정했던 "칼빈의 5대교리"(전적 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인 은총, 성도의 견인) 가운데 맨 마지막에 위치해 있는 "성도의 견인"교리는 칼빈의 예정론의 꽃과 같다. 왜냐하면 이 교리에 따르면, 한 번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은 절대 구원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결론 성도의 견인교리는 구원의 불변성과 안전성을 가르치는 교리인 것이다. 한편 "칼빈주의 5대교리"를 분석했던 에드윈 팔머는 성도의 견인교리를 이렇게 5가지 특징으로 소개한다. 첫째, 한 번 구원 받으면 계속해서 구원받는다. 한 번 믿으면 멸망할 수도 없고 지옥에 떨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둘째, 한 번 믿은 그리스도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믿는다. 그러므로 성도는 끝날까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셋째, 한 번 구원받은 자는 설령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오래 참아주시어 그를 구원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그가 아주 멸망받는 일은 없다. 넷째, 그러므로 한 번 얻은 구원은 영원히 보존된다. 다섯째,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영원히 안전하다. 

  그렇다면, 성도의 견인교리의 근거로 내세우는 성경구절은 대체 어떤 것인가? 지금부터는 성도의 견인교리의 근거로 내세우는 중요한 구절들이 과연 이 교리를 지지하는 말씀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로마서 8:38~39이야말로 성도의 견인교리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이 말씀에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으니, 한 번 구원 받으면 그는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대단히 억지 주장이라고 아니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이 말씀은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확신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불변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끊을 수 없으리라"는 말도 미래형이다. 끊을 수 없도록 확정되었으니 그것이 변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이다. 더욱이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문맥을 따라가서 롬8:28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자, 그래서 현재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고 있는 자"라고 되어 있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랑에게 끊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바울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변함이 없다면 어떤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끊어질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그리스도를 멀리해버린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에게서 끊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롬8:38~39은 성도의 견인에 관련한 성경구절이라고 말할 수 없다. 

  둘째, 요한복음 5:24을 그 근거로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고 또한 예수님을 보내셨던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는 자는 영생을 가지는 것이 분명하다(현재능동태). 그런데 어떤 이는 이 본문을 오해하여서 믿음으로 이미 영생을 가졌기 때문에(과거형), 앞으로 가질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은 가졌다(과거)가 아니라 가진다(현재)로 되어있다. 중요한 것은 이미 믿음으로 얻은 영생을 다시 잃어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은 한 번 영생을 잦게되면 그것을 잃어버리지 아니하는가? 그건 아니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이미 기록되어 있는 자라도 영적 싸움에서 지는 자는 결국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진다고 예수께서 경고하셨기 때문이다(계3:5). 그리고 믿음 안으로 들어왔으나 파선한 자가 있다는 성경말씀도 있기 때문이다(딤전1:19~20).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성령을 받아 구원받은 자라도 타락하면서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히6:4~8). 그러므로 한 번 영생을 가졌어도 그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성도는 죽는 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도 성도의 견인교리의 명확한 근거라고 말할 수 없다. 

  셋째, 요한복음 6:37, 39절의 말씀은 너무나 확고한 근거라고 말한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이 말씀과 요10:28~29의 말씀을 두고,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으로서, 구원받은 자는 결코 탈락할 수 없다고 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말씀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죄송하지만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한글성경이나 영어성경이나 오역한 본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한글성경이나 영어성경이나 이 말씀은 헬라어에서 직역한 것이 아니다. 왜곡되이 번역해놓은 대표적인 성경구절들이기 때문이다. 먼저,요6:37을 보면, 한글이나 영어성경이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것은 결코 "사람(남성)"이 아니라 "어떤 것(중성)"이다. 그러면 헬라어원문에서 이 문장을 직역해보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하여 다다를(도착할) 것이다. 그러면 나를 향하여 오고 있는 이를 나는 결코 밖으로 내쫓지 않을 것이다(요6:37)". 그렇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보내주고 있는 것은 만세전에 구원하기로 선택해둔 그러한 사람들이 아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를 구원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요3:35, 마11:27, 요17:7). 그러한 것들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권세 등 무수한 것들이다. 그래야 예수께서 전지하고 전능한 자로서 자기에게 구원얻기 위해 나아오고 있는 자들을 다 구원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6:39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번역되어있지만, 실은 이 구절도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고 있는 것이 "사람(남성)"이 아니라 "어떤 것(중성)"이다. 이 본문도 헬라어원문에서 직역해보자. "그런데 나를 보내셨던 분의 뜻은 이것이다. 그가 내게 이미 주신채 있는 모든 것은 내가 그것으로부터 잃지 아니하고 오히려 마지막 날에 내가 그것을 단번에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그렇다. 이것도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남성명사)으로 바꾸어 번역함에 따라, 꼭 아버지께서 구원받을 자를 미리 선택하신 후 그런 자들만을 예수님께 보내주시는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세전에 어떤 구원받을 개인을 정해놓으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주님께로 나와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며 또한 진리의 완전한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딤전2:4). 

  넷째, 마지막으로 요10:28~29의 말씀도 그 근거라고 주장하는 핵심 요절 말씀이다. 하지만 이것도 번역을 잘못하고 있는 본문이다. 특히 "그들"이라는 대명사에 대한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에서 빚어낸 실수요 오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우선 요10:28~29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부터 살펴보자. "내가 그[것]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것]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것]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여기에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가 나온다.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양들을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시고 있고 그것을 예수님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 같이 해석된다. 하지만 헬라어대문자사본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헬라어소문자사본에서는 "그들"이 "남성,단수 대명사"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대문자사본에는 "중성 단수 대명사"로 되어 있다. 사실 소문자 사본은 후대에 나온 사본이고, 대문자 사본은 먼저 나온 사본이기에, 소문자사본과 대문자사본이 다를 경우에는 당연히 대문자사본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한글성경 각주에 보면, 남성 단수 대명사가 아니라 중성 단수 대명사로 해석하는 어떤 사본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고로 보다더 원문에 가까운 대문자사본으로 요10:28~29을 번역하면 이렇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양들)에게 시대의 생명을 주고 있다. 그러면 그것들은 그 시대까지 스스로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무도 그것들을 장차 내 손으로부터 밖으로 낚아채가지 못할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 이미 나에게 주신 채 있는 그것(중성,단수)은 모든 것들(만물)보다 더 크다. 그러므로 아무도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낚아채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양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러면 이 시대까지 양들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 양들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께서는 그 생명을 그가 죽는 날까지는 빼앗지 않을 것이기 대문이다. 또한 그렇게 빼앗기지 않도록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있는데, 이것은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 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사탄이] 낚아채가도록 놔두지는 않으며 지켜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이 본문의 원뜻이다. 하지만 "그들"에 대해서 개역개정성경에서는 "남성 복수"인 "그들"로 번역하고 있는가하면, 남성 단수로 번역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헬라어대문자사본은 중성 단수로서, "아버지께서 이미 예수님에게 주신 채 있는 그것"을 가리킨다. 또한 28절에서 주님께서 양들에게 주시는 한 번 생명을 주시면, "영원히" 멸망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라는 문구는 "에이스 톤 아이오나"라는 것으로 "그 시대까지, 그 시대동안"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한 번 이 땅에서 성령을 통해 생명을 받은 자는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그 생명은 보존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거나 주님을 부인했다면 그가 죽는 날에 그 생명을 보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날에 성령께서 그 사람을 떠나갈 것이기 때문이다(엡4:30). 또한 100번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영생을 받는 이들은 누군가? 그것은 "그것들"이다. 곧 27절에 나와 있는 "양들"이다. 양들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영생이 주어지는 양들은 누구인가? 그것은 27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고,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 양들"이다. 고로, 예수님을 믿었던 자라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있고, 주님을 따라가고 있지 않는 자는 시대의 생명을 소유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요10:28~29의 말씀도 성도의 견인교리를 지지해주는 성경구절이 될 수 없다. 

 

3. 에베소교회를 향한 노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제 노사도였던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간절한 기도를 드린다. 에베소서에는 바울의 기도가 두 번 나오는데, 3장에도 한 번 더 나온다. 그런데 1장의 기도를 보면, 그가 하나님의 경륜의 산물인 교회를 향하여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를 엿볼 수가 있다. 그는 먼저 에베소교회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에 감사를 표현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성령)"이 주어짐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기를 바란다고 기도하였다(엡1:17). 그렇다면, 만약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 곧 나에게 지혜를 주고 계시를 주는 영(성령)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면 서서히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아지게 되는 것이다. 곧 영의 눈이 떠지게 되는 것이다(엡1:18).

 

4. 마음(영)의 눈이 밝혀지게 될 때 얻을 수 있는 3가지 유익한 점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 부어져서 우리의 영의 눈(영안)이 열리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우리는 영적인 3가지 비밀을 깨닫게 된다. 그것으로는 첫째,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 그분이 나를 위해 하늘에서 준비하고 있는 기업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된다. 셋째,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엡1:19). 오, 지금이라도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지게 되기를 기원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회개기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회개기도 되지 않으면, 악한 영들이 뱀들로서 우리 머리 속에 진득진득 붙어있어서 영의 눈이 잘 열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회개기도를 해야 한다. 회개기도는 조상들이 지은 우상숭배의 죄와 자신이 불러들인 자범죄들을 회개하는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 갖고계시는 5가지 놀라운 능력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얻으신 능력들은 대체 어떤 것인가? 사도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능력을 총 5가지로서 소개한다. 첫째, 부활의 능력이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엡1:20b)". 둘째, 승천의 능력이다.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1:20c)". 셋째, 뛰어남의 능력이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1:21)" 참고로 이 문장에 나오는 "통치(시작)"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은 다 높은 천사들의 계급을 일컫는 것이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은 모든 세상을 일컫는 표현이다. 넷째, 왕(다스림)의 능력이다.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으니(엡1:22a)" 왕으로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능력이다. 다섯째, 머리됨의 능력이다.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에 삼으셨으니라(엡1:22b)"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소명을 따라 하늘의 기업을 향해 충성하고 순종하심으로 예수께서는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며, 만왕의 왕이 되셨고 만주의 주가 되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셨다.

 

6.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런데 놀라지 말라. 예수께서 사람되심으로 인하여 순종하시고 충성하심으로 인하여 얻어낸 5가지 능력들을 교회에게 거져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다. 헬라어원문으로 엡1:22의 말씀을 읽어본다. "또한 그분(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그리스도)의 발들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그리스도)를 모든 것들 위에 교회에게 머리로 주셨습니다." 그렇다. 그리스도가 부활승천좌정하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후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약한 인간에게 강력한 능력을 가지신 예수께서 머리로 접붙혀진 것이다. 그러므로 몸의 지체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와 지혜 등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5가지 능력이 이제 교회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정의한다. "교회는 그(그리스도)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는 충만함이니라(엡1:23)"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 교회는 이제 머리이신 예수님의 지체들이 되었다. 그런데 몸의 영광은 사실 머리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 가치가 사람이라는 가치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가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이전에는 천사보다 못한 부족한 존재였으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우리는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존재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의 발 아래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이 우리 교회 위에 주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7. 나오며

  성경말씀은 하나라도 더해서도 아니 되고 빼서도 아니 된다.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된 신적 작정이 종교개혁기에 이르러서는 그만 개인구원예정론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어떤 개인에 대한 구원을 만세전에 예정하신 일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과 그 이후의 세대들은 그것을 정당화시켰고 교리로 만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예정의 계획을 세우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불특성다수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것이며, 천사가 아닌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로 예정해놓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오늘도 하나님의 예정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믿음을 끝까지 붙들고 회개함으로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받았으면 반드시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비록 이미 구원받은 자들의 대열에 합류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은 죽기전까지는 아직 완전히 정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이미 얻은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빌2:12). 이를 위해서 우리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충성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지은 죄들에 대한 회개를 날마다 해야 한다. 이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하늘나라의 상속자로 예정된 성도가 과연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에베소성도들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에베소서라는 편지를 써 보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편지에서 즉시 하늘의 신령한 복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구원경륜이 교회를 산출했음을 에베소서 1장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고 풍성한 하늘나라의 자녀가 되기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럴려면 지혜와 계시의 영이 부어지심으로 영의 눈이 열려져야 한다고 했다. 그때에 비로소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에 눈이 떠지게 되고, 그때부터 하늘나라를 위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분이 나를 이 땅에 보낸 목적에 따라 살기 시작하며, 하늘에서 기다리고 있는 풍성한 기업을 위해 달려가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룩해놓은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체험하면서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만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입은 자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만물의 지배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놓은 풍성함을 누리며 살아가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맡겨두셨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11월 18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