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05)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10가지 일들(갈2:1~5)_2021-04-21(수)

by 갈렙 posted Apr 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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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r8BxPlm8xlU
날짜 2021-04-21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2:1~5(신약 264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십자가에못박힌그리스도,고린도의역사,약하고두렵고떨었던바울,그리스도께서십자가에서이루신일,고린도전서2장강해

교회가 분열로 아파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분열을 이겨내게 하는 최고의 묘약은 무엇인가? 바울은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라고 제시한다. 대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무엇을 처리하셨기에, 바울은 교회분열의의 해결방안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인가? 거기에는 바울 자신이 선교정책으로 삼았던 방식이 나오게 된 중요한 사건이 등장하게 된다. 이제 바울의 간증의 들어보자. 그래서 우리에게도 분열의 아픔이 있다면 이것으로 실마리를 찾아보자.

 

1. 들어가며

  고린도교회 안에는 10가지 중요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자신이 고린도교회를 개척하고 1년6개월동안 머물러 심혈을 기울였던 고린도교회가 어지럽혀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낸다. 이 편지는 고린도교회를 사랑하는 바울의 마음이 배어 있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하는 아비의 마음이 묻어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갖가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을까? 그중에 첫번째 문제는 "분열"의 문제였다. 바울은 교회가 이미 4개의 파로 나뉘어져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그들의 분열과 파벌을 잠재우고 교회가 하나될 수 있도록 하나의 묘안을 제시해야 했다. 그런데 그가 제시한 방법을 들었을 때에 사실 아무도 댓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바울의 선교관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분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이 제시한 해결책으로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바울은 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하려고 노력했으며, 그것이 분열의 아픔을 딛고 하나되게 해주는 묘책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특별히 오늘은 고린도교회가 "고린도"라는 항구도시에 세워지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처리하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을 성령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오늘도 성령의 놀라운 계시가 이 메시지를 듣는 모든 분들에게 함께 하길 바란다. 

 

2. 고린도 교회의 분열의 문제를 바울은 어떻게 해결했는가?

  바울은 글로에에 속한 사람으로부터 고린도교회의 분열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자 바울은 우선적으로 고린도교회을 칭찬하면서 그들의 분쟁에 문제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기들을 지도해준 지도자를 따라 4개의 분파로 분열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교회를 개척했던 바울을 따르는 바울파, 바울의 뒤를 이어 부임하여 교회를 성장시킨 아볼로파,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베드로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게바파,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리스도파, 이렇게 4개의 분파로 갈리어 있었다. 모두들 자기들을 가르치고 그리고 자기들에게 세례를 준 노선을 따라 분파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자 바울은 어떻게 한 몸인 교회가 여러 개로 나뉠 수 있느냐며 책망한다. 그리고 자신은 고린도교회에 간 것은 자신이 세례를 주려고 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러 간 것이며, 더욱이 고린도교회에서 직접 세례를 준 것은 몇 명 안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록 자신이 세례를 주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라 말한다. 물론 아볼파도 그랬고, 게파파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았느냐에 따라서 혹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에 따라 다른 분파로 분열할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진 공통분모 곧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되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러면서 교회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아니고서 교회는 분열과 분파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요했다. 

 

3.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교만을 어떻게 잠재웠는가?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탄생했으며 또한 고린도교회의 성도의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언급하면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도 자신을 자랑할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언급한다. 그들이 고린도교회에서 자신을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은 자기들은 원래 별 볼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을 자녀가 될 수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사를 풍성히 부어주시고,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신분이나 직업이나 사회적으로 고귀한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린도"라는 도시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알아야 한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그리스의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더불어 고린도는 그리스에 속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로마는 이 세 도시들을 묶어서 하나의 속주로 다스렸는데, 그 속주의 이름을 "아가야"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아가야의 수도가 바로 고린도였던 것이다. 당시 인구 40만의 거대도시가 바로 고린도였다. 하지만 고린도가 이렇게 큰 도시가 되었던 것은 얼마 안 되었다. 왜냐하면 로마가 고린도를 쳐들어 왔을 때에 고린도가 로마에 끝까지 항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가 완전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로마가 전쟁할 때에는 조금은 신사적이었다. 공격하려는 도시가 항복해오면 그 도시를 파괴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치를 허락했다. 다만 속주로서 통치해야 했기에, 통치자를 그리 보내 다스렸고, 그 도시에는 세금을 부과했다. 그런데 고린도는 그러한 것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자 로마는 항복하지 않는 고린도를 철저히 파괴했다. 정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도록 파괴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도시에 살아남은 자들은 다 포로로 잡아가서 노예로 넘거버렸다. 그래서 수백년동안 고린도는 폐허도시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로마가 전쟁을 마친 퇴역군인들을 위해, 잿더미로 변한 고린도를 그들 처소로 허용해주었다. 그러자 전쟁 때마다 텐트를 치고 다리를 놓았던 퇴역군인들은 자신이 평소 때 하던 기술들을 총동원하여 고린도를 번드르한 도시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고린도 도시는 아름다웠지만 대신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하층민일 수밖에 없었다. 장교가 아닌 퇴역 말단 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왜 그들이 그렇게 교만해졌는지를 책망하면서, 그들이 원래 어떤 사람들이었지를 상기시켰다. 그들을 첫째로, 높은 헬라철학을 공부한 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지위가 높은 권세있는 정치가들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그들은 상류계급에 속한 귀족출신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지혜롭지도 못하고 가진 것도 별도 없고 높은 신분이나 지위도 가지지 못한 자들을 선택하시어 지혜롭고 강하고 가지고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천하고 멸시받고 가진 것 없었던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고, 은사를 풍성히 주신 예수님만 자랑하라는 것이다. 이것인 고린도전서 1장 하반부의 말씀이다.

 

4. 바울은 왜 고린도에 갔을 때에 약해지고 두려워하고 떨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고린도에 갔을 때에 약해졌고 두려워했으며 심지어 떨었다고 증언하였다. 왜 그랬을까?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선교철학 곧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만을 증거하기로 했다는 그의 철학이 나오게 된 배경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도 고린도지역에 전도하러 가기 전까지 그는 은근히 자신의 탁월한 언변능력과 헬라철학에 대한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였던 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이 1차전도여행을 갔을 때 그는 거의를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 2차전도여행을 하면서 드디어 하나둘씩 교회를 개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두다 작았다. 그런데 2차전도여행 때에 엄청난 규모의 교회를 개척하게 되는데, 그 교회가 바로 "고린도교회"라는 교회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해서 고린도에서 상당히 큰 선교의 열매를 맺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에 약해졌고 두려웠고 떨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고린도에 오기 직전 바울은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깨달은 교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헬라철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스토아철학자도 있었고 에피쿠로스철학자들도 있었기에,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창조의 하나님을 고상하게 전하는 방식을 취했었다. 왜냐하면 헬라철학자들은 만물의 기원에 관하여 아주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완전 실패였다. 그렇게 유명한 헬라철학자들의 도시에서 전도의 열매를 거의 맺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아덴에 가기 전에 머물렀던 지역들은 작은 도시였지만 그래도 거의가 다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2차전도여행하면서 교회를 세우지 못한 곳은 오직 아덴(아테네) 뿐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때에 비로소 결심을 하게 된다. 고상한 척하며 자신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을 자랑하는 전도방식의 복음전파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가 다음으로 선택한 고린도에 왔을 때에는 걱정이 많이 되었다. 왜냐하면 헬라의 도시에 왔으나 헬라철학을 이야기하자니 선교의 열매가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구속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단도직입적으로 전하자니, 과연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나타나지 않던 주께서 밤의 환상 중에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바울을 격려하는 것이었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9~10). 그러자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가 누군지 그리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만을 중점적으로 증거하였던 것이다. 그랬더니 정말 1년 6개월 만에 고린도 지역에 엄청난 규모의 크기의 교회를 개척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10가지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전했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란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지난 시간에 "그리스도"가 누군지에 관해서는 공부를 했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에서 이루신 일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지난 시간에도 잠깐 살펴보았지만 바울은 "십자가"의 이미를 의무나 사명 그리고 고난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소극적인 것들을 처리하는 도구이자 장소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와 옛사람과 옛창조에 속한 것들을 포함하여 약 10가지를 끝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와 옛사람과 옛창조에 속한 것들이 살아있는 한 사람들은 자기자랑고 교만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처리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고 실천하는 자들 중에는 결코 자신을 자랑하거나 교만한 사람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와 옛사람과 옛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끝내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가져가셔서  끝내버린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와 죄들을 끝내셨다(롬7:18~20, 8:1~2, 6:22, 엡1:7, 골1:14). 예수께서는 자기의 육신에 죄를 정한 후에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음에 넘기셨다(롬8:1~2). 한 마디로 죄값을 치르신 것이다. 그럼 그분이 치르신 죄값은 자기의 죄값이었는가? 누구의 죄값이었는가? 그것은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해 전가받았던 인류의 죄값이었다(요1:29).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류의 죄값을 처리하는 것이었다(롬6:23, 고전15:3~4). 그러므로 주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누구나 둘째사망의 고통이 주어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이미 그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류에게 들어온 죄된 본성(원죄)으로부터서도 해방을 받는다(롬6:22). 왜냐하면 죄된 본성보다 더 강력한 성령을 우리 마음 가운에 보내셔서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성령을 좇아 행하는 모든 자들을 주님은 죄된 본성에서 해방시키시고 계신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을 이길 수 있게 만들어놓으셨기 때문이다(롬8:1~2). 그래서 모든 성도들은 누구나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죄들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때에 죄들이 용서되기 때문이다(엡1:7, 골1:14)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사탄마귀와 귀신들을 처리하셨다(요일3:8, 히2:14, 골2:15).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셨다. 왜냐하면 죄없는 예수님을 그가 십자가에서 불법적으로 죽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탄의 불법적인 행동은 결국 자신이 가진 사망권세를 내어놓게 하였다(히2:14). 그래서 그때 이후 사탄마귀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예수님께 빼았기게 되었고 그것을 넘겨받은 예수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그것을 갖고 계신다(계1:17~18). 정확히 말하면 그날 사탄이 죽인 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사탄마귀는 저 지구 땅속 음부로 쫓겨난다. 또한 그날 십자가 주위에 몰려들었던 귀신들도 자신의 최고사령관이 예수님께 패하였기 때문에 무장해제당하고 만다(골2:15). 그러자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는 권세를 이제는 믿는 자들에게 내어주셨다(막16:17~18).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은 위임받은 예수님의 권세를 이용하여 귀신을 쫓을 수가 있게 되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그날 십자가에서 세상도 함께 처리하셨다(요일2:16, 갈6:14, 요일5:19,4). 사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말을 들어 그의 말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셨던 세상 모든 만물에 대한 권한은 마귀에게 넘어가고 말았다(눅4:4). 그때 이후 온 세상은 마귀 수중에 들어갔다(요일5:18).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귀를 처단하심으로 세상도 같이 처리하셨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와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들인데 이 모든 것이 그날 처리됨으로 이런 것들이 더이상 성도들을 주장할 수 없게 하신 것이다(요일2:16). 

  넷째,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육신을 처리하셨다(롬8:3~4, 5~6, 7~8, 12~13, 갈5:16~17). 예수께서는 자기의 몸에 인류의 죄를 전가받으신 후에 십자가로 가져가셨고 그 몸을 죽음에 넘기우셨다. 그리하여 죄된 본성으로 장악된 육신은 죽음에 넘어갔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의 육신은 더이상 우리 자신을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도적으로 육신에게 내주기 전까지, 육신은 결코 우리의 몸을 함부로 주장할 수 없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육신을 자신의 주인으로 알고 따라간다면 그는 지금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될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으며,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처리된 육신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성전삼고 거하시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갈5:16~17).

  다섯째, 그리스도께서는 옛사람도 십자가에서 함께 처리하셨다(롬6:6, 엡4:22~24). 옛사람이란 타락한 본성을 따라 행하는 옛날의 나 자신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성령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날 십자가에 자신의 육신을 못박으셨다. 그리고 그 육신이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 타락한 본성을 따라사는 옛날의 우리 자신, 그것이 옛사람인데, 예수께서 그날 옛사람도 같이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그래서 그날 못박혀 죽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나 새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우리는 새 사람이다. 

  여섯째, 그리스도께서는 그때 자아도 처리하셨다(갈2:20, 마16:24~25). 여기서 '자아'란 사람의 혼을 가리킨다. 그런데 뱀이 하와를 꼬일 때에 혼이 어떻게 되었는가? 그만 사탄의 말에 미혹되어 비정상적으로 커졌다. 그래서 뱀의 말을 순종하고 말았다. 그러자 인간의 자아도 뱀에게 속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는 '자아' 곧 인간의 혼은 지금도 더러운 본성이 지배하는 육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실 때에 우리의 자아도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셨다는 것을 믿으으로 주장해야 한다(갈2:20). 타락한 혼도 같이 못박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 자아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고로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자기자신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려는 혼에게 자신을 내어줄 것이 아니다(마16:24~25). 그러면 이미 죽은 자아를 다시 살려내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일곱째,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처리하셨다(갈3:19, 13, 23, 4:9~11, 롬7:1~2). 다시 말해 그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따라 자기자신을 죄값으로 내어주셨다. 그래서 죄값을 치르셨다. 이것은 결국 율법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죄값은 이미 치러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에 우리 자신도 죽었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시체를 율법이 더이상 정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강하고 힘센 율법이라도 죽은 시체에게까지 율법의 힘을 드리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있을 때에만 적용되는 법이기 때문이다(롬7:1~2).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르는 순간 우리도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을 때에 율법으로부터 우리도 자유케 된 것이다. 

  여덟째,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옛 창조를 끝내셨다(고후5:17, 계21:1, 벧후3:20~13). 그리스도께서는 옛 창조에 속한 것들 모두가 같이 부패했고 같이 사탄의 본성이 주입되었다는 것을 아셨기에, 그것을 끝내시기로 결정하셨다. 그리고 오히려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시기롤 결정하셨다(고전15:45). 그러므로 교회는 이전에 없던, 전대미문의 새로운 유기체가 될 수 있었다. 주님께서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끝내시고 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셨기 때문이다(고후5:17). 그러나 옛창조에 속한 것들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전히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계21:1, 벧후3:10~13).

  아홉째, 그리스도께서는 그날 사망도 함께 처리하셨다(고전15:20, 요11:25~26, 고전15:55, 히2:1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실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가 마귀의 권세를 박살내셨다. 그가 죄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사탄에게서 빼앗으셨다. 그리고 직접 그 열쇠를 사용하여 사망과 음부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셨다. 이것을 "부활"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그날 예수께서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갖게 되셨을 뿐만 아니라 3일 뒤에는 그 권세로 음부의 문을 열고 나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은 사망이 계속해서 그를 붙잡아 둘 수가 없게 된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주님께서 멸망시키셨기 때문이다(히2:14).

  열째,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주도 함께 처리하셨다(신11:26~28, 렘17:5, 말2:2, 갈3:13, 3:10, 계22:3). 저주란 죄로 인하여 내려진 징계들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한 마디로 재앙이며 불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생명의 활동을 방해하고 기쁨과 복을 앗아가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히실 때에, 주께서는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저주까지 동시에 치르셨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으로 인하여 모든 저주에서 해방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그날 예수께서 저주를 끝내셨다는 표현을 잘 이해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날 예수께서 인류가 받아야할 모든 저주를 다 몸으로 받으셨음을 의미하지만, 그것에 내게 효력을 발휘하게 하려면 회개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죄를 지었을 때에 그러한 죄의 결과로 인해 이미 우리 몸과 삶과 자녀에게 저주가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받기 위해서는 과거의 죄들을 낱낱이 자백하여 털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 내 조상의 죄까지도 동시에 해당된다. 이것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저주로부터 깨끗하게 해주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요일1:9). 

 

6. 나오며

  왜 바울은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려고 했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능력이라고 말해야 했을까? 그것은 십자가에서 모든 악한 것들이 다 처리되었거나 끝장났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모든 소극적인 것들의 값을 처리하신 장소가 바로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가면 죄와 죄들을 비롯한 모든 악한 요소들이 다 거기에서 죽게 된다. 이는 그것들이 더이상 우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악한 자는 여전히 우리를 농락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주 가운데 살고 있다.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날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끝장내셨으며 처리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행한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뒤에 회개해야 한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귀신들이 우리 속에서 떠나가도록 하려면 우리의 입술로서 우리가 지은 죄를 자백해야 하기 때문이다(요일1:9). 그놈들도 우리 몸에 들어올 때에는 합법적으로 들어온 것이기에 나갈 때에도 합법적으로 나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합법적으로 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이 바로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은 죄들을 자백하는 회개를 할 때에, 그 자리가 하늘의 법정이 되고 그러면 무죄 선고가 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2천년전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형벌을 다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우리는 더이상 죄값을 치르거나 저주를 받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 몸에 남아있는 세력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놈들에게 나가도록 명령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놈들이 떠나가고 성령이 우리의 몸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우리도 우리의 못된 성질도 달라지게 된다. 이제는 우리의 성품과 언어와 행동이 사탄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분열도 사라지고, 분파도 사라지며,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게 된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며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게 된이다. 이것이 바로 분열의 최종해결책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4월 21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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