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09) 음행한 자들을 교회는 어떻게 치리해야 하는가?(고전5:1~13)_2021-05-19(수)

by 갈렙 posted May 1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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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VRVSOXMtIAU
날짜 2021-05-19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5:1~13(신약 268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교회의순결성과거룩성,음행,근친상간의죄,누룩,음행하는자와교제금지,출교,죄의영향력,권징의실행,

교회에 음행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소문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으니까 쉬쉬하고 덮어버리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행한 처방전대로 그 사람을 징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나은가? 그리고 만약 교회에서 그런 문제를 다룬다면 어떤 방법과 절차를 따라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권징조치가 왜 교회에서 시행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와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오늘은 교회에서 잘 시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바람직한 권징방법이 무엇인지 그 실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교회에서 음행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교회에서 발생한 일이니만큼 부끄러운 일이지 남들에게 소문나지 않도록 쉬쉬하면서 은혜롭게 처리한다는 미명하에 없던 일로 여기고 덮어버리는 것은 좋은가? 아니면 그 문제의 당사자에게 교회가 공식적으로 절차를 밟아 징계처분을 내려야 하는가?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당면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인 도덕적인 무질서 문제 중에서 성적인 문란행위에 대해서 오늘 본문말씀으로 그 답을 제시한다. 고린도 교회의 청년이 자신의 계모를 취하는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 교회내에도 음행의 죄가 용납되는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따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성도의 생활을 감독해야 할 고린도교회는 도덕적 권위와 질서가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냥 그 문제를  덮어버리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어떤 처리를 명령했을까? 그리고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도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문제들을 처리할 것인가?

 

2. 고린도전서 5장의 내용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 당면한 10가지 문제에 대한 바울의 훈계와 책망을 기록한 책이다. 그중에서 1장부터 4장까지는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문제를 다루었다. 교회가 4개의 분파로 나뉘어져서 자신의 지도자를 추켜세우면서서 파벌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인삿말을 시작으로 하여 교회의 분쟁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단락에서 음행의 문제를 언급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교회 내에 음행의 문제가 이미 발생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묵인하고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자 교회가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도바울은 교회는 반드시 이 문제를 놓고 결의하여 적어도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자에게 출교라는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을 명령한다. 

  한편, 근친상간의 음행 죄를 다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5장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는 교회 안에 발생한 근친상간의 범죄자를 단죄할 것을 명령하는 부분(1~5절)과, 이어 범죄자가 교회에 미칠 수 있는 악한 영향력을 고려해 교회가 그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징조치인 출교를 시행하라고 촉구하는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3. 일반적으로 음행의 죄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음행의 죄에 대해 성경은 먼저 율법의 십계명에 언급하고 있을 만큼 인간이 지켜야 할 아주 중요한 계명의 하나로 취급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간음이나 음행의 죄가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근친상간의 죄는 두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을 만큼 율법은 단호한 조치를 명령하고 있다(출20:14, 레20:10~11). 그렇다면, 음행이나 간음의 죄에 대해 우리 주 예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그리고 지금은 부활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처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을까? 

  먼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한 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예수께서는 천국백성의 윤리를 다루고 있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하여 이 문제를 언급하셨다(마5:27~32). 그 말씀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간음이란 행동으로만 간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다(마5:28).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음행한 이유 없이 이혼한 자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있어서 재혼이란 오직 배우자의 사별의 경우에만 해당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더욱이 사도바울은 재혼을 한다고 할지라도 믿는 자들 안에서 재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고로 성도들은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고전7:10~11). 배우자가 음행한 경우라도 이혼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이혼하면 평생 혼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마5:32, 마19:9, 막10:11~12). 

  그렇다면 왜 성경에서는 음행의 죄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말하는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음행의 죄는 사람의 몸 안에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몸은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 곧 성령의 전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창기의 지체로 만들기 때문이다(고전6:18~19). 믿는 자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것과는 정반대의 행위를 해서 되겠는가?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7)"라고 말이다. 또 하나는 음행의 죄가 교회의 거룩성과 순결성을 손상시키는 매우 중대한 범죄가 되기 때문이다.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지만 음행의 죄는 누룩과 같아서 그것이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히 크다. 그러므로 이러한 범죄가 교회 안에 용납된다면 순결하고 거룩해야 할 교회는 금새 부패한 집단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음행의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돌이키지 아니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엄중한 처벌만이 그를 기다리게 된다. 즉 구약성경에서는 음행중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되어 있다(레20:10~11, 신22:22). 또한 부활승천하사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분께서는 그러한 사람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계21:8). 이어 사도바울도 이런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했다(고전6:9~10). 그러므로 음행의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는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음행의 죄는 심각한 범죄인 것이다. 

 

4. 고린도교회 내에서 일어난 근친상간의 죄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처리할 것을 명령했는가?

  어느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든는다. 그런데 그러한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었다. 그 내용인즉 어떤 형제가 자신의 아버지의 여인을 취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성도들의 태도였다. 아무도 그 문제를 놓고 탄식하지 않았던 것이다. 덮어두려고 했던 것 같아 보인다. 그 문제를 놓고 통한히 여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그 아들을 교회에서 쫓아내지도 않았던 것이다. 참고로 이 사건에 등장하는 "여인"은 아버지의 '귀네'(여인, 여자, 아내, 첩)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 그녀가 아버지의 둘째부인이었는지 그리고 그 형제의 아버지께서 지금도 살아 계신지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팩트는 어떤 아버지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의 여인과 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패륜적인 범죄행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 형제는 왜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고린도 도시의 문화와도 많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고린도에서 음행은 비일비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적인 문란함은 이 도시의 신전에서도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프로디테(미의 여신)의 신전에는 창기가 항상 상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음행을 제사의식의 하나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문화가 교회 안에도 들어온 것이다. 그것을 교회는 묵인하고 있었다. 교회는 그것을 용납했으며 제재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자성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그 문제를 단호하게 취급하라고 한다. "내가 몸으로는 떠나 있지만 영으로는 이미 그를 판단한 상태에 있으니, 그를 주 예수의 이름과 능력으로 사탄에게 내주도록 하라. 그래야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얻게 할 것이 아니겠는가?(고전5:4~5)"

  그런데 오늘날까지 사도바울의 이 말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이들이 상당하다.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사람이 음행을 저질러도 예수 잘 믿으면 그 일로 인해 육신은 혹 멸망당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영은 구원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성경말씀을 잘못 이해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그로 하여금 주 예수의 날에 구원얻게 하려한다는 문장은 가정법 문장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말함은 그를 교회에서 내쫓아서 그가 사탄에게 고통받다가 회개한다면 턱걸이라도 해서 구원얻게 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범죄는 교회가 공적으로 그것을 치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성범죄에 대해 두려워할 뿐더러, 당사자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 다른 죄에 대해 음행의 죄를 저지른 자들이 교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말했는가?

  그렇다면 교회 내의 성범죄는 왜 다른 죄에 비하면 그 죄가 크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음행에 따른 죄의 파급력이 실로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작지만 온 덩어리에 퍼지는 누룩과도 같다고 비유했다(고전5:6). 지금도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빵을 만들 때에 발효된 밀가루의 일부를 떼어 놓는다. 그리고 다음에 만들 빵에 그것을 집어넣어 빵 전부를 부풀게 한다. 그것이 작지만 다음에 만들 빵을 온통 또한 발효시킨다. 고로 사도바울은 교회 안에 음행을 조금이라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사실 바울이 그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할 때에는 교회 안에 누룩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새부터 묵은 누룩이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온 교회를 부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누룩에 의해 오염된 성도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유월절 양이신 예수께서 희생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또다시 묵은 누룩을 교회 안에 들여온 것이다. 그러자 왜 그것을 내버리지 않고 있느냐고 호통을 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예배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절기를 지키는 것들과 같은 것인데, 이제 성도들이 예배할 때에는 묵은 누룩이나 악하고 사악한 누룩을 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누룩이 없는 빵, 순전하고 진실한 빵 곧 불순물이 들어있지 않는 순수한 빵과 같은 말씀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고전5:7~8). 

 

6. 성도가 교회밖에서와 교회안에서 음행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후 사도바울은 근친상간의 음행의 죄와 아울러, 고린도전서를 보내기 전에 써 보냈던 편지에서 언급했던 음행의 문제를 꺼낸다. 그것은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했던 권면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시정하기 위해서여였다(고전5:9). 왜냐하면 그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에 일부가, 바울의 편지글에 나오는 내용 곧 "도무지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과도 사귀지 말라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만일 음행하는 자와 사귀지 않으려 한다면, 세상 밖으로 떠나가서 살라는 말이냐로 받아친 것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만일 그리하려면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서 은둔생활을 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바울이 말했던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것은 교회 내에 형제라고 불리는 자가고 음행을 하고 있다면 그런 자들과는 사귀지 말라는 뜻이었다고 바로 잡은 것이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야 원래 죄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바로 잡으시겠지만, 교회 안의 사람들 중에 음행하는 자들은 교회 공동체가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해서라도 그것을 바로잡지 않게 되면 결국 교회는 자기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상실해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7. 음행하는 자를 교회가 단호하게 출교조치를 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왜 교회 내에서 음행하는 자들을 엄격하게 바로 잡으라고 명한 것인가? 그것은 교회적으로 보았을 때에 가장 거룩하고 순결해야 할 교회가 음행으로 더럽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고전3:17). 그러면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고전6:9~10), 최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기 때문이다(계21:8). 그리고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 사람이 사탄의 시험을 받으면서 만일 회개하게 된다면 비록 그의 육신은 멸망당하겠지만 그의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고전5:5). 또한 이 과정 전부를 지켜보고 있는 성도들도 이 일로 경성하여 함부로 음행의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음행의 죄를 범한 자를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권징 시행방법을 따르면 될 것이다. 예수께서 형제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마18:15~18). 그것은 첫째,  개인이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는 것이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아니한다 둘째로, 두 세 증인을 데려가서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들으면 그 형제를 얻는 것이지만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셋째, 교회에 그러한 사실을 공표하고 교회에서 치리를 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취급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때 교회공동체가 결정한 사항에 대해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결정으로 인정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마18:18). 고로 우리는 교회가 오늘날 공적으로 기도하고 범죄자들을 합법적으로 치리하는 권위가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 일을 통해 범죄자가 자신의 죄를 빨리 뉘우치고 돌아서게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면 사탄의 밥이 되지 않을 것이고, 용서함을 받아서 순수한 떡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는 예수께서 가르쳐준 범죄자에 대한 징계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있다. 교회가 치리를 시행하려고 하면 금방 다른 교회로 교적을 옮겨버리기 때문이다. 아니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세상 법정으로 자신의 문제를 끌고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바울의 권면의 말을 새기고 또 새겨야 한다. 개인이든 교회공동체든 사람에게 징계를 받으며 그것으로 끝날 수 있는 문제이지만, 그 문제를 그대로 놔둔 채 있으면 결국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려가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긍휼없는 심판만이 그의 분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할 수만 있으면 징계를 받더라도 여기서 징계를 받고 회개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주님 앞에 갔을 때에는 더이상 회개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교회에서 범죄자들을 치리하고 있는가? 그런데 겁도 없이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함께 찬송하고 예배하는 뻔뻔스러움도 극치를 이루고 있다. 장차 그의 후손이 받을 어마어마한 징계를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이 명백할 때에는 도망치듯 교회를 빠져나가 다른 교회로 옮겨버리기 쉽상이다. 그러니 징계조치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도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가르쳐준 권징의 처방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실제로 출교조치는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바로잡아주지 않는다면 그 영혼이 결국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관심을 갖고, 그가 회개하여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2021년 05월 1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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