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5-27 사도행전강해(32) 바울일행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전도(행17:1~15)

by 갈렙 posted May 27,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유투브 주소 https://youtu.be/nFlhzdlRiDY
날짜 2015-05-27
본문말씀 사도행전17:1~15(신약 216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사도행전강해, 사도행전 17장,2차전도여행, 바울과 실라,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전도, 유대인과 헬라인, 말씀을 받는 자의 자세

  복음을 전파할 때 과연 어떤 것이 최종적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 요인일까?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과연 어떤 자가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 하나님을 알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가 열심을 품게 된다면 과연 어떤 열매를 맺는 것일까?

  사도행전의 이야기(1~28장)는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에게로 복음이 확산되어 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사도바울의 복음전파(행13~28장)는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는 복음과 그 복음의 결과들을 담고 있다. 특별히 사도행전 17장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똑같이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유대인들은 멸망으로 들어가나 이방인들을 구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체 무엇이 이러한 결과를 낳게 했던 것일까?

  사도바울일행의 제2차전도여행도 이제 중반에 접어들었다. 안디옥에서 출발하여(행15:40~41), 육로를 따라 수리아와 길리기아 그리고 더베와 루스드라 그리고 드로아에서의 막힘과 마게도냐인의 환상(행16:1~10)이 있었다. 이어지는 발칸반도의 전도의 여정(행16:11~181:17)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바울일행은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를 지나 데살로니가에 이른다(행17:1). 오늘날의 데살로니가는 그리 크지 않은 7만명의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바울 당시 이 도시는 인구 200만이 거주하던 거대도시였다. 특히 이 도시는 로마의 식민도시가 아니라 자유도시였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기에는 참으로 좋은 도시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 도시에 있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전파를 집요하게 방해했다. 결국 데살로니가교회는 유대인들이 거의 없는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당시 이 도시인구의 절반이 유대인들이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이었으니 얼마나 전도하기에 안성맞춤이었을까? 하지만 결과는 딴 판이었다. 당시 데살로니가에는 많은 수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곳 회당 안으로 들어가 안식일에 율법말씀을 가르침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그때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는 다윗과 같은 왕이 아니라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대속의 어린양이라는 사실을 선포했다. 그리고 세 번째 안식일에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설득력있게 권면했다. 복음자체를 들려주는 것도 복음전파에 큰 힘이 되지만, 그 복음을 전해들은 자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일이야말로 복음전파의 최종결실의 정도를 알려주기에 적합하다. 

  이때 복음을 들고 권면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두 패로 갈리었다. 유대인들은 오히려 바울을 시기질투했다. 그리고는 이내 바울을 없애버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갔다. 하지만 헬라인 개종자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다음 전도지 베뢰아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양상이 나타났다. 똑같이 안식일에 나아가 회당에 앉아있는 유대인들과 개종한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이들 모두는 다같이 바울이 말한 것이 정말 율법에 나와있는지를 찾아보는 신중함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러더니 그들은 정말 율법과 선지서들에 기록된 메시야가 수난받고 죽임당하는 메시야임을 알게 되었고(사53:4~6)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참된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뢰아교회는 데살로니가교회와는 달리 유대인과 헬라인 함께 구원받은 놀라운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구원은 어떤 사람이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선포된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 데살로니가에 있던 헬라인들은 바울의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살전2:13), 베뢰아에있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를 살펴봄으로서 말씀에서 증거하고 있는 메시야를 믿어 구원을 받게 되었다(행17:11).  

  율법말씀을 알되 피상적으로 알고 자기가 필요한 것만을 선별하여 알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했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말한 이미 오신 메시야가 예수님인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복음을 알려면 성경에 기록된 그 말씀 그대로를 믿으려 애쓰는 성도들이 되라. 그렇지 않는다면, 오히려 자신의 알퍅한 성경지식으로 인해 사탄의 미혹에 빠져 주님을 대적하는 자로 설 수도 있다. 참된 진리를 알려하지 않은채 갖게 되는 종교적인 열심은 사탄만 이롭게 할 뿐이다. 사탄은 과연 어떻게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을 잡아썼을까? 그들은 율법과 선지서에 기록된 메시야를 듣고도 그분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울일행을 따라가는 군중들을 보고는 시기와 질투심이 발동하여 참된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일행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선한 양심을 버렸고 악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정잡배 즉 깡패들을 동원하여 바울일행을 체포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자기들의 뜻대로 되지 않자, 그들은 데살로니가에서 80km 떨어진 베뢰아까지 쫓아가서 바울의 복음전파를 집요하게 방해하였다. 과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율법말씀의 핵심은 사실 그리스도이시다(요5:39). 율법은 그리스도의 출현 즉 탄생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다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롬1:2~4).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구원을 위해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율법과 선지서를 들여다보면, 메시야는 다윗과 같은 메시야가 아니라, 고난받는 메시야 즉 채찍에 맞고 치욕을 당하고 결국에는 죽임당하는 메시야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메시야가 그때에도 그들의 메시야였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메시야이시다. 하나님의 종의 길은 결코 평탄하거나 넓은 길이 아님을 알라. 그 길은 좁고 힘든 길이다. 당신이 진정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도 각오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빌1:29).

  또한 마지막으로 우리는 베뢰아형제들의 아름다움 섬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겠다. 이들은 바울을 피신시켜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그들은 바울을 다음 도시까지 안전하게 이동하도록 돕되 무려 320km나 떨어진 아덴까지 배웅을 가 주었다. 집밖에 나와 골목어귀까지 배웅해도 상당한 일인데, 베뢰아의 형제들은 바울이 아덴에까지 배웅해 주었던 것이다. 사실 베뢰아에서 아덴까지 가는 길을 베뢰아 형제들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았겠는가? 왜냐하면 바울은 아시아의 길리기아성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게도냐지방 사람이었던 베뢰아사람은 바울이 부탁하지 않았지만 그 일을 자처했다. 그렇다. 말씀사역을 제외하고는 성도들도 주도적으로 목회자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 복음전파는 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오 주여, 나도 이런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800_2015-05-27 사도행전강해(32) 바울일행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전도(행17;1~15).ts_000609855.jpg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