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강해(01) 유다서 어떤 책이며 무엇 때문에 기록했는가?(유1:1~7)_2022-02-09(수)

by 갈렙 posted Feb 0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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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WC8_XIAWeN4 [혹은 https://tv.naver.com/v/25059062 ]
날짜 2022-02-09
본문말씀 유다서 1:1~7(신약 397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유다서,송신자,수신자,기록동기,주의형제야고보,베드로후서,영지주의자들,쾌락주의,성육신부인,믿음의싸움,대주재,예수님의하나님되심,이단심판

유다서는 신약성경 중 공동서신의 책들 가운데 맨 마지막 번째에 해당하는 책이다. 그리고 내용도 비교적 짧다. 25절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짧은 편지를 통하여 상당히 많은 영적인 진리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특히 조직신학적인 입장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너무나 귀중한 진리들을 소개해준다고 하겠다. 그리고 왜 이 책이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이 책이 들려주는 예수님은 대체 누군지를 오늘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유다서는 25절의 아주 짧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의 신앙에 관한 상식적인 생각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많이 묻는다. 구원론에 있어서,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그리고 성령론에 있어서, 정경론에 있어서 기존의 신학적인 개념을 뛰어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책의 배경이 헬라적인 문화가 아니라 히브리적인 문화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은 더더욱 증폭된다. 그리고 신약성경 중에서 공동서신을 읽어보았던 독자라면 그는 이 책을 읽을 때에 자신의 눈을 다시 한 번 깜빡일 것이다. 왜냐하면 유다서의 내용이 베드로후서와 너무나 유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책을 썼을까? 베드로인가 아니면 유다인가? 이 모든 질문을 오늘 하루에 다 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몇 번의 강해시간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다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책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들려주는 교훈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중에서 오늘은 유다서 강해의 첫 번째 시간으로서 ,이 책의 개론적인 부분을 살펴보려고 한다. 과연 누가 이 책을 썼으며 그리고 누구에게 쓴 것인지 그리고 왜 유다는 이 책을 써야만 했는지를 중심으로 유다서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맨 나중에 그리스도론에 관하여도 조금 터치하고자 한다.

 

2. 이 책은 누가 썼는가?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2가지로 소개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유대교적인 배경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 이 책 곳곳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는가? 그것은 2가지다. 첫째로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로는 그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다(유1:1). 먼저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다. 편지를 쓸 때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로 표현한 사람은 이 책의 저자만 아니다. 특히 사도바울도 역시 자신을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롬1:1). 여기서 '종'이라고 함은 단순히 일꾼이나 심부름꾼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종'이라는 개념은 '노예(둘로스)'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음을 철저히 아는 자가 주인의 분부만을 기다릴 때에 이 표현을 쓰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을 준비가 되어있으며, 오직 주님만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겠다는 굳은 의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의 저자가 아주 겸손한 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둘째로 이 책의 저자인 유다는 자신을 '야고보의 형제'라고 소개한다.

 

3. 야고보의 형제 유다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유다의 형제로 소개되고 있는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한 세 명 정도 만날 수 있다. 하나는 세배대의 아들로서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라는 예수님의 제자가 있다(마4:21, 10:2) 그는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에 최초로 순교한 사도였다(행12:2).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세배대의 아들인 야고보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 야고보의 형제는 유다인 것인지 요한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예수님의 제자로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도 있다(마10:3, 막3:18, 눅6:15, 행1:13). '작은 야고보'라고도 불렸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그의 형제가 '요세'였다(막15:40).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 유다는 알패와의 아들인 야고보의 형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상정할 수 있는 인물은 예수님의 친동생인 야고보가 남아 있다. 예수께서는 친동생들로 적어도 4명의 남동생들과 2명이상의 여동생들을 두었다. 남동생들의 이름으로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여동생들도 있다(마13:55, 막6:3). 마태복음에 따르면 유다는 야고보의 막내동생으로 보이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유다는 야고보의 둘째 동생으로 나온다. 그러나 적어도 야고보를 형제로 둔 유다는 예수님의 친동생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대교회의 모든 전승들은 이 책의 저자인 유다를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로 본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소개할 때에 "야고보의 형제"라고 말한 것은 당시 이 편지를 쓰고 있던 시기에 '야고보'는 너무나 잘 알려진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자신을 예수님의 친동생이라고 직접적으로 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소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4. 이 책은 누구에게 쓴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어느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수신자를 대부분 지역에 관련하여 명기를 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고린도에 있는 교회(고전1:2)" 혹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엡1:1)"이라고 수신자를 명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서에는 어떤 특정 지역이 나오지 않도 다만 어떤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음을 밝히는데, 그 대상이 누군지를 3가지로 쓰고 있다(유1:1). 첫째,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요, 둘째,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이미 사랑을 받은 있는 자들이자, 셋째, 그리스도에게 지켜주심을 받은 채 있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란 그 공동체가 곧 교회라는 것을 말해주며,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채 있는 이들이요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지켜주심을 받고 있으니, 상당히 구원에 가까운 성도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편지와 아주 유사한 편지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25절 가운데 19절이나 일치하는 또 하나의 편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베드로후서'다. 그런데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베드로후서의 기록목적과 유다서의 기록목적이 아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나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와 '유다'는 매우 친유대적인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편지의 수신자는 아무래도 바울적인 복음이 아니라 베드로적인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베드로가 편지를 보냈던 수신자들을 살펴보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이니만큼 유다서의 수신자들도 친유대적인 사람들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은 자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5. 이 책은 왜 쓴 것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는 왜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유1:4). 그렇지만 유다는 먼저 이 편지의 서두에서 원래 자기가 편지를 쓰려고 했던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기본적인 구원론에 관하여 그들에게 써보내기를 원했다는 것이다(유1:3). 왜냐하면 유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아들의 지키심을 받은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써 보내려고 하였는데, 그들이 받은 "일반으로 얻은 구원" 곧 모든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구원에 관하여 쓰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갑자기 심각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가만히(몰래) 들러온 어떤 사람들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들은 이단세력을 가리킨다. 이들이 누군지를 보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이들은 영지주의 이단 세력으로서 은밀하게 믿음의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이들은 옛적부터 심판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이라고 말하였다(유1:4).

 

6. 유다서의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가만히 침투해 들어온 이단세력이란 대체 누구인가?

  당시 교회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온 이단세력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이 누구인지에 관하여 유다는 3가지로 언급을 한다(유1:4). 첫째는 이들은 경건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둘째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색욕거리,호색,성적인 방종)으로 바꾸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로, 그들은 유일한(단 하나의 홀로) 대주재(세상의 소유자와 주인, '데스포테스')이자 그리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 세력이 바로 A.D.1세기 후반부에 활동한 "초기 영지주의자"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영(靈)은 선하고 육(肉)은 악하다는 이원론에 따라 영과 육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쾌락주의자와 금욕주의자, 이렇게 둘로 갈라지게 되는데, 유다서에 등장하는 영지주의자는 바로 전자인 쾌락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영과 육은 서로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보고 육으로는 어떤 죄를 지어도 영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들어 음란을 죄악시하지 않았기에 교회를 야금야금 도덕적으로 부패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을 지고지신의 하나님 곧 육체를 가지지 않는 최고의 하나님으로 보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예수님의 성육신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었기에 때문에 문제가 아주 심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도들에 있어서 예수님의 성육과 죽음을 부인하는 것은 인류의 구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기존 성도들에게 영지주의자들의 침투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급히 서둘러 유다가 이 편지를 쓰게 된 것이다. 한 번 얻은 믿음의 도를 허물어 뜨리려는 이단들의 세력과 맞써서 힘써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유1:3).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들의 영향을 받아 색욕거리를 좇다가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믿음으로 죄용서를 받지 못한채 멸망으로 치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7. 이 책의 내용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유다는 어떤 내용을 이 책에 담은 것인가? 이 책의 내용은 비록 이 편지가 짧은 글이라 할지라도 서신서의 형식을 잘 갖춘 책인 것인 만큼 서론부과 본론부와 결론부를 가지고 있다. 먼저 서론부(유1:1~4)에는 송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인삿말이 나오고(유1:1~2) 이어 이 편지를 쓴 목적이 나온다(유1:3~4). 그리고 본론부가 나온다(유1:5~23). 이러한 본론부의 내용은 이단자들의 죄악상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단에 대한 경계와 성도들의 바른 신앙 자세를 언급하고 있다. 즉 바른 믿음의 터 위에 자신을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주 예수의 재림을 소망하는 가운데 하나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론부(유1:24~25)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송영으로 끝을 맺는다

 

8. 이 책의 저자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소개하고 있는가?

  그런데 이 책의 특징은 이단에 대한 경계에 관한 말씀 가운데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정의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 번에 걸쳐 외경들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저자인 유다는 이러한 외경의 기록을 인용하여 심판의 확실성을 증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외경들에 대한 기록에 관하여는 다음 번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고, 오늘은 유다가 언급하는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가 하는 것을 우선 살펴보도록 한다. 유다는 이때 이단세력에 대항하여 성도들이 그들과 제대로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신성에 관한 정의인데, 그 정의는 실로 놀랍기만 하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인 유다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로서, 히브리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소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 유다는 히브리파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을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은 다음의 2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첫째, 유다는 예수님을 홀로하나이신 유일한 '대주재'라고 소개한다(유1:4). 그는 예수님을 "홀로 하나이신(유일한) 주재"라고 소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재'라는 용어는 헬라어로 '데스포테스'라는 용어로서, 세상의 소유자요 절대 주권자 곧 세상의 주인이라는 뜻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오직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로만 사용되었던 용어다. 고로 누가복음 2장에서 선지자 시므온도 자신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재여(데스포타),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라고 하였던 것이다(눅2:29). 뿐만 아니라 유대인으로 구성된 초기 예루살렘 성도들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대주재여(에스포타), 천지와 바다와 그것들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행4:24)"이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에게서 사용할 수 있는 이 칭호를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는 예수님에게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두 분일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있으며,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이시다. 그런데 예수님을 한 분 하나님이신 여호와에게만 칭할 수 있는 용어로 칭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용어를 유다가 예수님의 칭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도 사용하고 있고(벧후2:1), 이미 천국에 들어간 순교자들도 예수님을 칭할 때에 사용하는 칭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계6:10)"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시지만 그분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 자신이신 것이다(사9:6).

  둘째, 유다는 예수님을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난 '여호와'라고 소개한다(유1:5). 유다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지만 두번째로 믿지 아니했던 자들을 멸망시키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소개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말 성경에서는 헬라어원문에 따라 번역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은 구약의 여호와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만 거의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다는 분명하게 말한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시고 그들 중에서 당신을 불신하고 당신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자들을 광야에 엎드려뜨리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마누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마1:23). 그러므로 삼신론적 삼위일체 신앙을 가진 자들은 이 부분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에 가보라.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에 누가 앉아계시지를 보라. 요한계시록에서는 천상에 계시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는 이를 예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계21:5~6, 22:12~16).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비로소 하늘에 계신 분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고, 이 땅에 계시는 분은 자신을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존재가 가능하시니 하늘에는 아버지가, 이 땅에서는 아들이 동시에 존재가 가능하게 되신 것이다.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이다. 

 

9. 나오며

  유다서는 히브리적인 신앙의 사고를 가진 예수님의 친동생 유다가 기록한 독특한 신약성경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의 서신들 속에서는 발견하기 쉽지 않은 부분들도 더러 발견할 수가 있다. 그중에서 예수님의 한 분 하나님 되심과 여러 외경들에 대한 자유로운 인용은 상당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만 굳어져 있는 자들에게, 예수께서 한 분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다소 생소하기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쓰신 신약 27권의 신약성경을 선물로 받았다. 그중에 우리는 유다서라는 독특한 편지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이 예수님의 친동생이었던 야고보가 쓴 '야고보서'가 말씀하고 있는 칭의관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정의하고 있는 야고보서를 사도의 저작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보면 루터가 야고보서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는 그 시대의 안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거의 다 공개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지금의 성도들은 종교개혁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영적의 실제와 신학의 공간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온전하지 못했던 것들이라도 이제는 온전히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므로 유다서가 삼위일체적인 접근방식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의 접근방식에서 예수님이 누군지를 소개해주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랍고 새롭기만 하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거나 축소된 예수님에 대한 실체를 보다 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 번에는 영지주의 이단의 실체가 무엇이며, 더불어 천사의 창조와 타락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습을 소개해주고 있는 외경들의 기록을 통하여 성도들이 영적인 선한 싸움을 싸울 때에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022년 02월 09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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