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강해(03)이웃사랑 계명 실천과 행함 없는 믿음의 허구와 실상(약2;1~26)_2022-04-06(수)

by 갈렙 posted Apr 0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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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pRdwIFZJ_gw [혹은 https://tv.naver.com/v/26081592 ]
날짜 2022-04-06
본문말씀 야고보서 2:1~26(신약 37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야고보서강해,차별대우금지,이웃사랑계명실천,행함없는믿음,구원과칭의,사도바울의칭의,야고보의칭의

왜 성도들은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는가? 과연 믿음만 붙들고 있어도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구원을 받아서 장차 천국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오늘 야고보서 2장과 마주 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했던 이신칭의의 복음과는 색깔이 상당히 다르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것은 설마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버리고 야고보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인가? 여기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1. 들어가며

  야고보서는 총5장의 108구절로 이루어진 야고보가 쓴 서신이다. 야고보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A.D.49년 직전의 교회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만약 이 저작이 A.D.45~49년의 기록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현재 신약 27권의 성경책 가운데에서 가장 빨리 기록된 성경책을 접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은 내증에 따르면, 로마의 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아마도 스데반의 죽음 이후 A.D.34년경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핍박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아니었나 생각 된다. 그런데 그때 당시 흩어진 유대인들 중에는 일부가 안디옥으로 건너가서 A.D.40년경 하나의 교회를 세웠으니 그 교회가 바로 '안디옥교회'다. 그런데 이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중심의 교회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교회를 위해 바나바를 파송했고 바나나는 사울을 데려다가 같이 사역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다가 로마의 전 지역으로 흩어진 나머지 사람들은 안식일이 되면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출석하였고 거기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러므로 야고보서는 이러한 정황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때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2가지 위험에 직면해 있었으며 또한 아주 잘못된 일도 행한 채 있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한 편으로는 그들을 위로하려고 이 편지를 썼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오늘은 그가 쓴 제 2장의 말씀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흩어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여러 정황들이 많이 포착된다. 대체 이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또한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인가? 그것들 중에서도 야고보는 이들을 향하여, 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을 말해야 했는가? 왜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던 것인가?

 

2.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이때 야고보서라는 편지를 받고 있는 이들은 대체 어떤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으며,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인가? 우선 이들이 누군지에 대해서 야고보서 2장이 들려주는 정보부터 살펴보자. 이들은 첫째, 매주일 유대인 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2절). 둘째, 이들 중에는 가난한 자들도 있었고 부자들도 있었다(6절). 그런데 셋째, 이들은 가난한 성도들을 돕고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외면하고 있었다(8~11절). 그것은 율법에 기록된 이웃사랑하기를 자기의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을 어기고 있었던 것이다. 넷째, 이들은 유대인들이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21절). 여기서 '우리'라 함은 야고보와 이 편지의 수신 대상이 다 유대인들이라는 정보를 알려준다. 이들이 유대인들인 것은 '회당'이라는 표현과 아울러 율법말씀의 인용하고 있고 그리고 구약의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인 '아브라함'과 여호수아에 나오는 '기생 라합'을 예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이들이 유대인인 것을 말해준다. 다섯째, 이들은 자유의 율법인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있었다(15~16절). 여섯째, 이들은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예수님을 '영광의 주님"으로 믿고 있는 이들이었다(19절,1절). 이들은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이다. 

 

3.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이며,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그 원인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먼저,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2가지였다. 첫째로, 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그들은 종교적인 핍박도 같이 겪고 있었다(5절). 그럼 이러한 어려움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당시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어려움을 끼치고 있는 자들은 두 부류였다. 하나는 동족 유대인들이었으며 그리고 또 하나는 나중에 더 설명하겠지만 로마 황제로 추정이 된다. 그렇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동족에 의하여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가? 그리고 왜 로마 황제예배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했던 것인가? 먼저, 이들이 같은 동족의 유대인들로부터 겪고 있던 어려움부터 살펴보자.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도 역시 안식일이 되면 유대교 회당으로 나가서 기도를 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그때 유대인들로부터 잘못된 것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바로 회당에 손에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복장을 하고 들어오는 부자들에게는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지만, 남루한 옷을 입고 들어오는 가난한 자들은 외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유대인들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의 수신자들도 역시 이것을 고스란히 배워서 그대로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야고보는 유대인 부자들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정확히 알려준다. 부자들은 첫째로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자들이라고 말했다(6절). 그리고 둘째로, 부자들은 사실 이 편지의 수신자를 압제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6절). 그리고 셋째로, 부자들은 오히려 그들을 법정으로 끌고가서 세우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예배 모임 중에 유대인으로서 부자들이 왔을 때에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고, 가난한 자가 들어왔을 때에는 저기 서 있든지 아니면 자기들의 발판 아라에 있으라고 말한다는 것은 분명히 죄라고 지적한다(3절). 

  더욱이 이때는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는 때였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는가? 야고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A.D.45~49)는 로마의 제4대 황제인 글라우디오(Claudius, 재위A.D.41~54)가 통치하던 시기였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사도행전에 등장하고 있는 '글라우디오'를 가리키며, 바울이 항소하려 했던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황제 때에 중요한 3가지 일이 있었다. 첫째는 이 황제가 통치하던 시절에 천하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이다(헹11:28). 그래서 민심이 흉흉해진 것이다. 둘째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는 것이다(행18:2). 그리하여 유대인들이 이탈리아를 떠나 타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때 로마인이었던 브리스길라도 자신의 남편이자 유대인이었던 아굴라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고린도로 이주하여 고린도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방령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불안한 마음을 더 갖게 만들었다. 셋째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자신의 조부인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조모를 신으로 예배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석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두어서 유대인들로부터 반감을 산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더욱더 가난한 자들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들도 위태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주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로마인들로부터 좋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부자인 유대인들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으며, 로마인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아물러 신앙(종교)생활의 어려움도 같이 겪어야 했던 것이다. 

 

4. 야고보서 2장에서 야고보가 행한 책망과 충고는 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러므로 야고보는 부자들을 향하여 첫째로, 그들이 자기의 동족인데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그들을 책망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전인 율법말씀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지만 그 율법말씀을 따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교회의 성도들 중에도 부자가 있었지만 이들은 역시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멀리하는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부자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특히 영광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인 교회의 성도들을 엄히 책망하였다. 이들은 그때 영광의 주님으로 하늘에 계시지만 한 때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낮고 천한 육신을 입으시고 마굿간에 태어나셨으며,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아파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는데, 지금 영광의 주님을 믿는 수신자들은 가난한 자를 더욱 더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4절). 그러므로 야고보는 그들에게 "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을 준수하라고 권고한다(8절). 왜냐하면 다른 율법 말씀은 잘 지키고 있어도 이웃사랑 계명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지금 율법을 범하고 있는 자라이기 때문이다(8~9절). 그러므로 야보고는 그들을 향해 엄하게 충고한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동도 하라는 것이다(12절). 다시 말해, 자유케 하는 율법 곧 복음은 성도들에게 어떤 의무를 강조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말씀을 들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라는 것이다. 그래야 심판 날에 주님으로부터 긍휼이 있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13절). 그렇다. 우리가 충분히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지 않고 끝내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못한다면, 마지막 날 심판대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한 지체를 도울 수 있기를 바라며, 긍휼을 베풀며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5. 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인가?

  이어 야고보는 자신의 형제들이 궁핍하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 것은 자기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한다(15~16절).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서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14절).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17절). 그러한 믿음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14절). 그러므로 야고보는 유대인 부자들과 차별대우를 하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말을 전한다. 그것은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귀신들은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며, 뿐만 아니라 그렇게 믿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를 구원할 수는 없다. 왜 그러한가? 그것은 귀신들도 역시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지만, 귀신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야고보 당시에도 성도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믿는 이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받는 것이 아니다.  믿음에 따른 행위들이 뒤따라올 때 그 믿음을 가리켜 비로소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 우리에게서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된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자신에ㅐ게서 어떤 행위도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있으니 그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며, 또한 자신을 천국에까지 데려다 줄 것이며, 더욱이 자신을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사람으로 바꾸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헛된 일이다. 이것은 다 쓸모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입증이 되지 않는 믿음은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이 입증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인정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6. 칭의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가 아니면 행함으로 비로소 얻어야 하는가?

  이어서 야고보는 약2:20~26의 말씀을 통하여 이제는 칭의가 믿음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제시한다. 아브라함과 기생라합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에게 효력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야고보는 이때 창세기에 나오는 두 인물들 곧 히브리인이었던 '아브라함'이라는 남자 인물(창12~25장)과 여호수아서에 등장하는 이방인 '기생라합'이라는 여자 인물을 예로 든다(수2장). 이 둘은 믿음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다음의 2가지를 채웠던 자였기 때문이다. 첫째는 행위들을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비로소 온전케 되었다는 점이다(22절). 여기에서 '온전케 되었다'는 말이 완전하게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즉 아브라함도 자기아들 이삭을 제단에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에 비로소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뜻이다. 이때 비로소 그 믿음이 실제라는 것이 입증이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가 있으니, 그녀는 "기생 라합"이었다. 그녀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 또한 그녀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그녀는 언약의 자손이 아니라 천한 신분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그녀가 기생집을 하면서 소문을 들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는 신이 진짜 신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기꺼이 자기들이 믿었던 신을 버리고,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기로 결단을 한다. 그리하여 그녀가 최초로 행한 것이 여리고성을 정탐하려고 온 이스라엘의 정탐꾼 두 명을 은밀하게 숨겨두고 잘 도망가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기생 라합은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모든 가족과 친척들을 여리고성의 멸망으로부터 건져낼 수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에 따른 행위의 열매들이다. 그렇다. 자신이 이제 가을 나무가 되었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지 않은 나무라면 과연 이 나무가 열매맺는 나무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7. 바울의 칭의론과 야고보의 칭의론은 서로 상반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칭의론과 야고보가 말하는 칭의론이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칭의론은 모든 사람들이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고 하는 믿음이지만, 야고보는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같이 있어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칭의라는 것도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과 함께하는 믿음이어야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야고보의 칭의론이다. 그러하면 바울의 칭의론과 야고보의 칭의론은 서로 충돌하고 있다고 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욌는 자들이며,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역시 성경말씀에 이미 나와 있다. 야고보가 말하는 칭의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제대로 정립할 수만 있다면 이 문제도 역시 손쉽게 풀 수가 있을 것이다.

  야고보는 자신이 말하는 칭의는 다음과 같은 2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는 자신이 말하는 칭의는 선언적인 칭의가 아니라 그것이 성장하여 충만케 되는 칭의가 되었다는 것이다.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말도 안 되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신다.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것을 두고서 그를 의롭다고 칭하셨다. 하지만, 창세기 22장에 가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비로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칭의가 충만케 된다. 그러니까 창15장의 믿음의 칭의가 창22장에 갔을 때에 비로소 가득찬 칭의가 된 것이다. 또 하나는 아브라함이 이전부터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아들 독자 이삭을 제단에 바침으로 인하여 비로소 그의 믿음도 완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22절). 그러므로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칭의는 이제 시작으로서의 칭의이자, 선언적 의미의 칭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창세기 22장의 칭의는 완성으로서의 열매가 가득한 칭의라고 할 수 있다. 고로 이 사건은 아브라함이 이미 갖고 있었던 칭의가 어떤 것이었는지 입증이 되는 칭의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자신이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그것이 입증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완전한 믿음이라고도 할 수 없고 충만한 믿음이라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8. 나오며

  어떤 사람은 지갑이 회개를 해야 진정한 회개를 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이라도 기꺼이 남을 위해 내어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사람은 자기 욕심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에 진정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지가 그에게서 입증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이 풍성한 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주변환경이 좋지 않거나 자신의 앞날이 걱정이 될 때에는 쉽게 자신의 지갑을 열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는 즈음에도 여전히 똑같다면 어떡하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삶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오늘 나누었던 말씀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약2:19).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며 또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귀신이 갖고 있는 믿음과도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귀신이 갖고 있는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으며, 귀신이 갖고 있는 믿음 정도로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믿는 이들의 상당수는 지금도 시작으로서의 칭의가 인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자기에게 유효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니다. 자신이 이제 믿음생활을 시작했다면 그에게서 아직 행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완성으로의 믿음을 점검할 때인데도 자신은 시작으로서의 믿음은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과연 이 사람의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나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지금 진정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자신은 100미터 달리기 선수인데, 트랙의 출발 선상에서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선수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의 고백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의심해야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이제는 행함으로서 입증되는 믿음을 나도 갖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자. 그래서 그날에 가서 후회하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22년 04월 06일(수)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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