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신부(49) 구약성경에 나타난 신부들이 알려주는 최종적인 영적 교훈(민수기13:30~14:3)_2021-11-04(목)
https://youtu.be/qVo07Da-gAY [혹은 https://tv.naver.com/v/23368426 ]
1. 구약성경에서 우리의 신랑되시는 예수님은 어떻게 비유되어 있는가?
구약성경에서 우리의 신랑되시는 예수님은 어떻게 비유되어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히브리어로 '고엘'로 비유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구속자(고엘)'가 되어 주신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사44:24).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기업 무를 자(고엘)'가 되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레25:25, 룻4:1). 그런데 '구속자'나, '기업무를 자'는 히브리어로도 동일하게 '고엘'이라고 단어이다. 그렇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고엘로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일을 하신 것이다. 첫째, 우리를 마귀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해 주셨다. 둘째, 과부로 전락해 버린 우리를 기꺼이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신랑이 되어 주셨다. 셋째, 우리가 팔아 버린 천국 기업을 되찾아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리고 넷째, 우리의 원수였던 마귀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에게 복수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속하셨다. 이를 위해 이미 2천년 전에 예수께서는 마귀의 머리를 박살 내어 사망 권세를 깨뜨려 놓으셨다. 그리고 마귀의 부하들인 귀신들을 쫓아낼 수 있는 권세를 믿는 이들에게 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평생 기억할 것은 그분이 우리의 구속자가 되어 주시기 위해 엄청난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친족이 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들어가야 할 지옥(음부)에 가셨다가 나오셨다. 그분을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하신 것이다.
2. 고엘로서 일하신 우리의 신랑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최종적인 정착지는 어디인가?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왜 약속의 땅 곧 자신의 기업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 죽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가까운 친족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과연 그들을 광야에서 죽이시려고 출애굽 시켰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건 아닐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애굽 땅에서 구출해내실 때에 이미 그들을 신부로 삼고 그들에게 하늘의 기업을 주시려고 불러내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만약 오늘날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인 된 교회 성도들이 그분을 끝까지 붙잡고 간다면 반드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것이고, 하늘의 기업을 차지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아직도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기 전의 상황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주어진 시간을 잘 보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시간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사례를 보라. 그들이 비록 광야에 나왔지만 광야를 통과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간 자는 극소수였지 아니하였는가! 그러므로 아직 내가 그 땅을 밟지 못한 상태라면 우리는 정말 둘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빌2:12).
3. 구약의 신부들 중에서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지 못한 자들은 누구였는가?
우리는 그간 구약에 등장하고 있는 신부들의 예표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들로는 아담의 아내 하와가 있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있으며,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있었다. 그리고 야곱의 아내들이었던 레아와 라헬 그리고 빌하와 실바도 있었다. 또한 유대인으로서 가장 정확한 신부들의 예표를 보여 준 자가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아가서에 나오는 '술람미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방 여인이었지만 보아스라는 고엘을 만나 신부가 된 '룻'도 함께 살펴보았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광야에 나온 성도들 중에 누가 과연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게 되는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간 신부라 할지라도 누가 왕 노릇하는 신부가 되는지를 알려주는 예표였다. 이중 술람미 여인이나 사라와 같은 경우는 많지 않은 '왕권신부'를 상징하는 것 같고, 리브가나 레아, 그리고 룻과 같은 여인의 경우는 왕후신부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리고 야곱의 첩이었던 실바와 빌하는 비빈신부의 예표로 보인다. 그리고 더 크게 인류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본다면, 왕 노릇하는 신부들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 유다와 요셉가 있을 것이다. 이들은 다 왕권신부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히11:8~22). 그런데 안타깝게도 약속의 땅을 아예 기업으로 차지하지 못한 자들도 있다. 그러한 자들로서는 '이스마엘'과 '에서'가 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타고난 영적인 축복이 주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복을 잃어버린 자들로서, 에서(장자권을 경홀히 여김으로)와 르우벤(서모 빌하와 간음함으로)도 있었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 자라고 할 수 있을까?
4.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알려 주는 신부의 주의할 사항은 무엇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구약의 예언자들로서 신부에 언급한 예언자는 이사야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자다. 그런데 이들의 예언의 말씀을 종합해 보면, 신부들이 정작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예복을 어떻게 준비하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광야까지는 잘 나왔지만 결국 약속의 땅으로 비유된 새 예루살렘 성에 못 들어갔던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마귀와 지옥의 권세에서 탈출한 자라 할지라도 결국 광야로 상징되는 바, '성밖'이나(마25:10~12) '바깥 어두운 데'(마25:30)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애굽으로 상징되는 바 사탄의 처소인 불못 안으로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마25:41,346).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온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살펴보았다. 즉 먼저, 미련한 다섯 처녀는 성밖에 남겨진 자의 예표다. 그리고 악하고 게을렀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자들의 예표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아 염소의 자리에 있다가 영원한 불의 심판을 받을 자들은 장차 불못에 떨어진 자들에 대한 예표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를 결코 성밖이나 바깥 어두운 데 그리고 불못 안에 던지려고 우리를 광야로 데리고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서 밖으로 쫓겨나가나 바깥 어두운데서 형벌을 받거나 지옥불에 던져지는 것이다.
5. 어떻게 해야 우리는 약속의 기업을 차지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유월절을 통과하여 광야에 나와 교회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은 정말 우리의 신앙과 삶을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광야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광야에서 엎드려져 죽을 사람으로 분류되는가(성밖이나 바깥 어두운 데에 떨어질 것인가?), 아니면 범죄하여 불못에 떨어지는 사람이 될 것인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고엘이 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실 때에는 우리를 새 예루살렘 성안에까지 데려 가시려고 데리고 나왔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자의 어려움을 잘 참고 인내하여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아무리 광야 생활이 힘들어도 끝까지 인내하여서 구원을 성취해야 할 것이다. 둘째, 무엇보다도 회개해야 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신부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회개이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만큼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그러면 최소한 천국의 백성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이기는 자이므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자들이 될 것이다. 셋째,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맡겨진 일에 충성하고 천국 복음 전파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 약속의 땅이자 우리가 영원히 차지하고 누리게 될 하늘의 기업에서 왕 노릇하는 소망과 기대를 갖고 도전해야 할 것이다. 구약시대의 여호수아와 갈렙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나의 현재의 위치를 결정하는데 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때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갔던 여호수아들와 갈렙의 사례를 보라.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아낙 자손을 안 보았는가? 아니다. 그리고 그 땅의 성이 견고하다는 것을 안 보았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들도 보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땅에 대해 악평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들에게 주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환경을 보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로 그렇게 되기를 선포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네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행하시겠다"고 하셨다(민14:28). 그러므로 광야(지금의 교회생활)에 도착해 있는 지금 우리 성도들은 우리 주님께서 고엘로서 행하신 일에 대한 나의 반응에 따라 나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공은 우리에게 넘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2천년전에 이미 댓가를 다 지불해 놓으셨다. 그렇지만 그분은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즉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므로 그 땅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는 우리의 회개와 결단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힘을 내자.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2021년 11월 04일(목)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