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8(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진정한 소망(벧전1:1~5)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M2sh7IvBxwc [혹은 https://tv.naver.com/v/29303960 ]
1. 들어가며
우리에게 '바울'이라는 사도와 그리고 '베드로'라는 사도가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왜냐하면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 가운데 바울과 베드로와 같은 영성을 가진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살아계셨을 때에 선택받은 사도였으며, '바울'은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선택받은 사도였다. 그러므로 굳이 그들을 시간차로 구분한다면 한 약 8년어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복음전파의 대상이 조금 달랐다. 베드로는 주로 할례받은 이들 곧 유대인들의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며, 바울은 주로 할례받은 이들 곧 이방인들의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다(갈2:7~8). 그렇다면 이 두 사도가 전파했던 복음전파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는 지난 주에 바울이 말년에 기록된 에베소서를 통하여 바울이 드린 기도가 어떤 기도였는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신앙생활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베드로가 말년에 보낸 편지를 통하여 그가 진정 바라고 소망했던 성도들의 산 소망이 무엇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사도들의 편지를 통하여 그들이 진정 성도들을 향하여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의 소원이라고 담대히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2. 왜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가 되었고 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을까?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한 번 베드로를 어린양의 12사도들 가운데 대표자로 세웠으면, 그를 끝까지 사용하시어 이방인의 선교까지 담당하게 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를 그대로 놔둔 채로 또 다른 사람 곧 바울을 선택하여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론적으로 살펴보면,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한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바울은 이방인의 선교에 대해서 유연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왜 그랬던 것일까? 그것은 두 사도들의 탄생과 성장배경에서 찾을 수가 있다. 바울은 이방지역인 길리기아 성의 다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곳은 로마의 속주였다. 그리고 어찌되어서 그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의 아버지는 로마시민권을 갖고 있었고, 바울도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보다 더 여행이 자유로웠고 로마시민으로서 보호를 받을 수가 있었다. 또한 그는 3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헬라어, 히브리어(아람어), 로마어(라틴어)를 말이다. 그리고 그는 헬라파 유대인으로 태어났기에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율법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라났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 지역에까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대로 된 것이지만 말이다. 더욱이 그는 주 예수님께로부터 선택을 받는 순간 그가 해야 할 복음전파의 사명이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행9:15~16).
그러나 베드로는 좀 달랐다. 베드로는 히브리파 본토박이 유대인이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 나라로 치자면 서울이 아니라 부산과도 같은 갈릴리의 가버나움을 근거지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벳새다에서 태어나 자랐고 가버나움 회당에서 율법교육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음식법대로 음식을 먹어왔고 정결법을 잘 지키고 살았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과 식사 한 번 하지 않았으며, 이방인의 집에 방문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그는 이방인들을 좋아하지 않는 환경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고로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좋지 않은 선입관은 그에게도 게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니 상당기간 동안 그는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임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바울이 이방인 지역에 가서 이방인교회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때에, 베드로가 한 번은 사울의 사역지인 안디옥교회에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하다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본토박이 유대인들이 온다고 하자 식사자리를 쓸쩍 피해버린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바울로부터 면책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하던 베드로가 나중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3. 베드로전서는 대체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그렇다면 베드로는 끝까지 이방인 복음전파에 있어서 소극적으로 임했던 것일까? 오늘 우리가 읽었던 베드로전서는 그가 죽기 약 1넌 6개월 전이나 2년쯤에 로마에서 쓴 편지다(그의 나이는 70대 중반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는 그의 유언과도 같은 서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그때도 여전히 유대인들 특히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는 이제 이방인의 장벽을 허물어버린 예수님의 사역에 따라 이방인에게도 거리낌없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는 오늘 읽었던 베드로전서의 수신자다. 그런데 1절 말씀에 보니, 그들은 로마의 속주인 소아시아지역에 위치한 여러 주들에 흩어져 거주하는 나그네들(체류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지역은 본도와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였다고 나온다. 그러나 '흩어진 나그네'라는 말을 통해 혹시 우리는 그것이 흩어져 거주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로마에서 살다가 로마의 여러 속주로 흩어진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베드로전서를 읽어보면 그들이 누군지를 짐작할 수 있는데, 벧전1:18에 의하면 그들의 조상들이 헛된 행실을 물려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벧전2:10에 의하면 그들은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벧전4:3에 의하면, 그들은 무법한 우상숭배를 자행해 왔으며, 이들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을 즐겼다고 말한다. 고로 우리는 이들은 로마에 거주했다가 흩어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베드로가 말년에 되었을 때에 그는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에 관계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누구든 다 형제자매로 받아주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4.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 편지의 수신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고 있었을까?
베드로가 편지를 보낼 당시 편지의 수신자들은 흩어진 지역에서 많은 고난을 겪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로마의 신들이나 로마황제를 숭배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요, 우상숭배 후에 벌어지는 술취함과 방탕함과 음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불신자들로부터 엄청 비방을 받았고 인격적으로 모독적인 말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일터에서 해고를 당하기 일쑤였고, 폭행과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들은 살 곳을 찾아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들어가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히11:38). 실제로 이들이 동족인들의 핍박을 피해서 도망가서 산 지역 중에서 '가바도기아'를 가보니, 그들은 사람이 살지 않은 바위에 구멍을 파고 집을 만들어 살았고, 거기에서 수백년을 거주했던 것이 확인이 된다. 그랬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유대인도 아니었지만 그들도 예수님을 믿고 나니, 말씀대로 살아야 했고 죄를 거부하고 살아야했기에 사회적으로 따돌림과 불이익을 당하고 살았으니 말이다.
5. 베드로는 핍박과 고난 중에 있던 흩어진 나그네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라고 칭했을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들의 소식을 듣고 그들의 비록 땅에 살고 있어도 그들의 신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편지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그것은 3가지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피뿌림을 통하여 택함을 받은 자라고 하였다(벧전1:1~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통해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이다. 둘째,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거듭난 자로서 하늘의 산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하였다(벧전1:3~4). 그들은 이제로 하늘의 상속자로서 곧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을 자로서 잘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그들은 믿음을 통해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된 구원을 받은 자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받은 이들이라고 했다(벧전1:5). 이들은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 구원받은 이들로 있었던 것이다. 고로 우리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상속자로 잘 준비되고 있던 자들인 것을 알 수가 있다.
6. 베드로가 언급한 하늘에 간직된 산 소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렇다면 베드로가 언급한 하늘에 간직된 산 소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리는 지난 주에 우리는 바울의 기도를 통하여 성도들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에서 하늘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고, 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로부터 풍성한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것임을 살펴보았다. 그것이 바로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의 핵심부분이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전서를 통해서 그것은 곧 베드로의 간절한 소망과도 같은 것임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럼, 베드로가 ㅁ라한 '하늘에 간직된 산 소망'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놀라운 사실은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소망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성도들이 가져야할 살아있는 소망은 하늘에서 우리 성도들이 받을 유업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성도들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으로 받을 자들인 것이다.
7.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소망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소망'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소망을 확실히 일치한다. 그것은 곧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 들어가서 하늘나라를 상속으로 물려받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이 말하고 있는 하늘의 유업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차지하게 될 하늘나라의 기업의 속성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 동일한 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크고' '풍성하고' '많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엡1:17~18), 베드로는 그것이 '영원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유업의 3대 특성을 그것의 '영원성'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이 받을 기업의 속성을 3가지로 말했다. 첫째는 그것이 썩지 않는다고 했다(벧전1:3a). 즉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의 받을 유업은 불멸하다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더럽혀지지도 않는다고 했다(벧전1:3b). 왜냐하면 하늘나라에서는 악한 영들의 공격도 없으며 죄지를 일도 없기 때문이다. 셋째, 그것은 쇠하지도, 시들지도 않는다고 했다(벧전1:3c). 이는 하늘나라에서 유업으로 받은 상은 결코 약해지거나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성도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받게 될 유업의 상은 결코 썩거나 더럽혀지거나 시들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우리가 받은 유업들은 어떠한 것들인가? 예를 들어 하나의 건물을 내가 유업으로 받는다고 하자. 그 건물이 처음에는 빛나고 화려하고 멋있게 보일른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건물은 낡아지고 더럽혀지고 허물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성도들이 받을 유업은 영원무궁토록 빛날 것이라는 것이 베드로가 말한 하늘나라의 기업이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8. 천국에서 성도들이 받아 누리게 될 유업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들이 받아 누리게 될 유업이 3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영원히 거주할 처소로서 천국집이요 또 하나는 빛나는 면류관이며, 마지막 하나는 성도들의 보좌에 앉아서 왕노릇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그러한 유업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을까? 역시 그도 바울과 마찬가지였다. 베드로도 역시 하늘에서 성도들이 받을 유업이 3가직 있음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첫째로, 하늘에 장막집이 있다고 했다(벧후1:14). 그리고 둘째로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벧전5:3~4).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로, 왕같은 제사장직분이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고 말했다(벧전2:9). 고로 우리는 두 사도 역시 유업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다. 곧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기도와 베드로의 간절한 소망은 서로 일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9. 나오며
아무리 성도라 할지라도 사람은 무두가 땅에서 산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땅에 사는 이들로부터 때로는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그들과 같이 죄를 지어야 하는데 우리는 죄를 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둠에 속한 일도 해야 하는데 그러한 일을 하려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다른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기 일쑤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로부터 핍박과 멸시를 당하기도 하며, 여러가지 불이익을 당하고 죽임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우리는 죽는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들어가서 받을 유업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성도들은 껍데기를 위해 사는 이들이 아니다. 껍데기 속에 들어있는 우리의 속사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땅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언젠가 때가 되면, 우리의 고난은 영광으로 변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핍박받으며 흘린 눈물은 보석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련이 깊어질수록 그것에 낙심하고 넘어질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늘에 있는 기업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도 않으며 쇠하지도 아니하는 기업이 영원토록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2022년 09월 18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