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구원론자들이 빼버린 3가지 요소(눅15:17~21)

by 갈렙 posted Nov 0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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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1xygw7W2FW0
날짜 2015-11-01
본문말씀 누가복음 15:17~21(신약 12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바른 구원관, 값싼 구원론,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 김세윤 박사, 회개의 중요성, 현재의 중요성, 열매의 중요성

  어제는 종교개혁기념일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그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 벗어난 로마카톨릭을 향해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에 내걸었다. 그리고 약 500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한국교회는 과연 어떠한 모습을 갖추고 있을까? 2주전에는 어떤 목회자가 칼을 품 속에 넣고 들어가 자신의 비리를 폭로했다고 하면서 다른 목회자를 찌르는 일이 발생했다. 일반 성도가 그러한 일을 했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 두 사람은 어떤 교단의 지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어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런데 지난 10월 17일, 이러한 일들에 대한 원인을 조금이나마 짐작케 하는 기념강좌가 서울에서 있었다. 종교개혁절을 맞아 한 연구소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자 하나님나라 복음을 회복하는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서울소망교회에서 기념강좌를 연 것이다. 거기에 첫 발제자로 나온 김세윤박사(풀러신학교 신약학교수이자 전 합동측 총회신학교 신약학교수이자 신대원장)가 한국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한국교회 구원론은 구원파와 다르지 않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구호만 남은 개혁주의요, 한국 정통장로교회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칭의론 교리가 오히려 의인으로서의 삶을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금 한국교회는 “내가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은혜받은 뒤에 의인이 다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제는 최후심판 때에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다.”라고 알고 있다. 또한 그는 구원론에서부터 잘못 되어, 결국 부패의 온상이 되어버린 한국교회를 향해 이렇게 또 말했다. “칭의는 성화를 포함하는 것이므로 칭의는 구원을 완성할 때까지 유보된 것이다.” “결국 진정한 구원이란 그리스도인이 받은 바 구원을 지속적인 순종과 의의 열매맺는 삶을 통해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루어가야 한다.”

  그렇다. "한 번 믿음으로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값싼 구원론 때문에 한국교회는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무슨 도덕이 필요가 있겠으며, 어찌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길 이유가 있을까? 벌써부터 자신은 그날 심판대 앞에서 의롭다칭함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지금 무슨 죄를 짓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사실 언젠부터가 종교개혁의 방향이 이상한 데로 흘러가고 있었다. 사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칼빈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해서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칼빈에 의해 완성된 종교개혁은 결론적으로 볼 때 다시 중세시대로 돌아가는 종교개혁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통해서 주장한 가장 큰 핵심사항은 성도의 이중예정론과 성도의 견인 교리인데, 이것이 바로 값싼 구원론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이 칼빈의 예정론교리와 견인교리 때문에 죽을 때까지 감당해야 할 신앙투쟁에서 자신을 무장해제시킨 채, 지금도 안락과 안일함 속에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체, 칼빈의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장로)교회는 지금 구원의 과정에서 무엇을 빼버린 것일까? 오늘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한국교회가 그동안 잘못 가르쳐온 값싼 구원론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있는지 또한 구원받는 데에 있어서 우리 인간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알 것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가 하는 문제다. 그런데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서 오로지 믿음만 있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금방 파악할 수 있다. 만약 구원을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이 맞다면 탕자의 비유는 성경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구원받을 자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끝까지 견인하신다는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아버지는 탕자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는 어찌하든지 하나님께서 회개시킨다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회개는 탕자가 스스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구원을 위한 모든 준비를 다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 하지만 그 구원을 효과있게 적용하는 데에는 인간의 책임도 수반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 생각해보라. 아버지가 집을 나간 둘째아들을 다시 아들로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는 결코 탕자의 소관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소관이다. 아버지께서 그를 내칠 수도 있고, 영원히 집에 들이지도 아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좋으신 분이었다. 아버지는 둘째가 돌아오면 다시 그를 아들로 회복시켜줄 모든 준비를 다 하고 계셨다. 그가 돌아오면 입혀주려고 첫째가는 좋은 옷을 준비하고 있었고, 손가락에 끼워줄 반지를 준비해 놓았으며, 그가 신을 샌달을 만들어 저녁마다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오면 이웃사람들고 함께 잔치하기 위해 살진 소까지 준비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탕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구원을 위해 하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았으니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전혀 없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구원을 받기 위해서 최소한 우리가 해야 할 예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앞에 큰 죄를 지었기에,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날품팔이 종이라도 좋으니 자신을 다시 받아주십사고 아버지의 긍휼을 바라고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가 대신해 줄 수는 있는 것들이 아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선한 분이라고 하지만 회개를 대신해 줄 수 없으며,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일을 아버지가 대신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값싼 구원론을 외치는 자들은 탕자의 회개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 아들을 맞이해 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 사랑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종교개혁자였던 칼빈의 견인교리를 들어보라. 그 탕자가 아들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려고 시도하는 것조차 행위구원이라고 그들은 매도한다. 아니다. 그것을 두고 행위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구원이란 예수님 없이도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천주교는 예수님 없이도 물질적으로 기부하고 선행을 하며 교회서 주는 세례를 받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천주교가 행위구원론자들인 것이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도저히 아들이라 불리울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그래도 조금이나마 자비를 베풀어주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회개하는 자가 해야 할 기본적인 도리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구원을 위해 최소한 인간이 해야 할 도리마저 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른 주장이 아니다.

  자. 그렇다면 값싼 구원론을 외치는 자들은 대체 구원받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에 있어서 어떤 것의 중요성을 빼버린 것일까? 그들은 적어도 3가지를 빼버렸다.

  첫째, 그들은 회개의 중요성을 빼버렸다. 그들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만세전의 예정을 믿는 것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값싼 구원론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지은 죄인인가를 시인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보라. 이 탕자가 아들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는 데에 아버지의 크신 사랑이 중요한가? 아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항상 변함없이 그곳에 있었다. 중요한 것은 아들의 회개다. 그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큰 죄를 지었기에 그후로는 도저히 아들로서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눈물의 회개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자비로우셔도 회개는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꼭 인간이 해야 할 몫이다. 그리고 아들의 태도를 보라. 집에 돌아왔으니 응당 자신의 죄를 다 용서해주시고 아들로서의 지위를 회복시켜 달라고 하는 거만한 태도인가? 아니면 이제는 아버지집의 날품팔이라도 좋으니 그저 받아만 달라고 하는 겸손한 태도인가? 그런데 오늘날 값싼 구원론을 믿고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죄의 심각성을 제기하지 않는다. 가서 회개하면 다 용서받을 수가 있으니, 죄가 무슨 대수일까보냐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종교개혁자인 루터도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다. 그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힌 95개조 반박문을 읽어보았는가? 그는 아예 처음부터 회개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것도 천국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회개의 중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자, 95개조 반박문 중에서 제1항부터 4항까지를 살펴보라.

1. 우리의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믿는 자들이 전 생애에 걸쳐 참회하기를 원하셨다.

2. ‘회개라는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전에 의한 참회, 곧 사제의 직권으로 집행되는 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3. 참회는 내적인 회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육신의 정욕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다.

4. 형벌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동안 계속되는 것처럼 참된 회개도 우리들이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다. 우리 주님께서도 구원을 위해 회개의 중요성을 공생애의 시작에서부터 외치셨으며(막1:15) 승천후 6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그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셨다(계2:5).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둘째, 그들은 현재의 중요성을 빼버렸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에 대해 그들은 오직 만세전의 하나님의 예정이 있었는가가 중요하며, 과거에 했던 신앙고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한 번의 신앙고백이 만세전의 예정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다. 구원은 만세전의 작정으로 된 것도 아니고, 과거의 신앙고백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어떤 개인을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신다고 예정해 놓으셨다는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전부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를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해 놓으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제 믿다가도 오늘 주님을 부인하면 우리의 구원은 상실되는 것이다. 신앙고백도 지금의 신앙고백이 중요하다. 자, 주님께서 어떤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지 살펴보라.

10:27-28 내 양은 내 음성을 (계속해서)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계속해서)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렇다. 오늘도 구원을 위해 말씀을 듣고 믿게하시는 예수님 앞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뒤를 따라서 그분의 말씀대로 계속해서 순종해야 한다. 한 번했던 과거의 신앙고백으로 구원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위해 회개하는 것과 그분의 말씀을 들으러 나아가는 일은 일평생동안 지속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그들은 열매의 중요성까지 빼버렸다. 그들은 믿음에 따른 행위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데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날 회개하고 그날 예수님을 믿어서 죽는다면 회개와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날 한 편 강도처럼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을 그 뒤로도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신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디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지금 구원을 향해 바로 가고 있는지를 늘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확인해 볼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주님의 놀라운 구원을 믿고 있는 사람답게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분명 행함의 열매가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가 정말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달려가고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열매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값싼 구원론자들의 주장을 결코 따라가지 말라. 예수 믿은 지 수 십 년이 흘렀는데도 자신의 성품이 변하지 않고 있고, 회개했다는 그 어떤 증표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면 훗날 그 사람의 구원은 결코 보장받을 수가 없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사람들에게 화평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의 열매가 없는 자라면 그날 어느 누구도 주님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히12:14). 또한 예수님도 그 사람의 열매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마7:16). 세례요한도 좋은 열매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다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마3:10). 구원은 결코 사영리를 이해하는 것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다. 오늘도 자신의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의 뒤안길에 어떤 열매가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구원을 향한 경주를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구원은 만세전의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의해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모든 조치는 사실 다 하나님께서 다 해 놓으셨다. 그분이 우리 인간을 위한 대속제물로 흠없는 아들을 보내셨으며, 십자가에서 대신 그 벌을 내리셨다. 그렇지만 그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려면, 반드시 우리가 해야 할 우리의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자신은 철저히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죄인인 것을 고백해야 하고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떤 처우도 달게 받겠다는 겸손함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주님 말씀을 순종하며 나아가야 한다. 혹 그대로 실천하지 못했다면 회개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때때로 자신의 뒤를 돌아보아 어떤 열매가 맺혀지고 있는지도 확인해 보아야 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 회개한 후에 뒤따라오는 열매가 있는지를 확인해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오늘도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뤄가야 한다(빌2:12). 회개는 하나님이 대신해주지 않는다. 긍휼을 바라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하나님이 대신해주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인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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