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가?(눅18:9~14)

by 갈렙 posted Nov 0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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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jvD0CwMyUSA
날짜 2015-11-08
본문말씀 누가복음 18:9~14(신약 126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바리새인의 기도, 세리의 회개기도, 의롭다하심, 회개에 합당한 열매, 회개와 열매의 상관관계, 열매의 선행과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에 있어서 인간편에서 중요한 요소들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회개와 현재와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이 3가지를 빼버리고 말았다. 구원은 분명히 회개와 믿음으로 받는 것인데도 회개를 빼버렸고, 구원은 만세전의 예정이나 과거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현재의 신앙고백과 지금의 회개생활에 의해 좌우되는데도 이것을 빼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개의 열매를 통해 자신이 구원에 더 가까이가고 있는지를 확인해보아야 하는데, 열매를 행위구원이라 하면서 빼버린 것이다. 아니다. 열매로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열매를 통해 우리의 구원을 가늠해 볼 수는 있는 것이다.

  오늘은 이러한 3가지 요소들 중에서, 열매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한다면 세례요한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는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나온 무리들에게 회개의 세례만 받으려 하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강력히 외쳤기 때문이다(눅3:7~8). 그렇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 것이다. 눅19장에 나오는 삭개오의 경우를 보더라도, 삭개오가 주님 앞에 말씀드린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이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내어놓고 있었고, 속여 빼앗은 것에 대해서는 4배로 갚고 있었기 때문이다(눅19:8, 원문). 이런 이야기만 쭉 듣고 있노라면 대부분의 성도들은 "나도 어서 속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 내가 받은 구원을 확실히 해 두어야겠다."라고 마음을 먹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열매를 주께 드릴 때에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다. 그것은 풍성한 열매만을 보고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착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한 번 자신에게 물어보라. 회개하기가 더 어려운가 아니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맺기가 더 어려운가? 대답은 회개가 더 어렵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정도까지 회개해야 과연 하나님께서 자신의 회개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해주셨는지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개의 열매는 뚜렷하다. 그동안 거짓말을 했다면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부모를 공경하지 아니했다면 그 후로 부모를 공경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면 그 후로 십일조를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회개의 열매는 눈에 보이는 어떤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것보다 회개가 더 어려움을 알 수 있다. 또한 회개는 단순히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렵다. 회개란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하고, 철저히 자기자신을 낮추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어떤 처분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개의 열매는 이런 것들이 없이도 하나님 앞에 열매를 나타내보일 수가 있다. 그러므로 회개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성도들은 구원에 있어서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들을 때에 대부분 자신의 삶을 통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많이 만들어 놓아야 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리하여 회개의 열매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내 보인 수많은 열매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회개의 열매들인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 들려주신 말씀은, 회개의 열매라고 해서 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는 딱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종교지도자들을 대표하는 바리새인이고 또 한 사람은 죄인들을 대표하는 세리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두 사람 똑같이 성전에 나가서 기도를 드리는데 바리새인은 의롭다하심을 받지 못했지만 세리는 의롭다하심을 받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그 어떤 회개의 열매도 없기 때문에 의롭하심을 받지 못한 것이었을까? 아니다. 회개의 열매들로 본다면 세리에 비해 바리새인들이 훨썬 더 많은 열매들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열매 하나 내보일 수 없었던 세리였지만 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해 주셨다. 대체, 무엇 때문에 열매가 많았던 자는 오히려 열매를 인정받지 못했으며, 열매 하나 드린 것이 없었던 세리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심을 인정받게 되었던 것일까?

  우리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눅18:9~14)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3가지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기에서 보다 더 나쁜 행위가 없다고 해서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눅18:11). 사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 특히 세리에 비해 토색하고 있지도 않았고, 불의를 행하지도 않았으며, 간음을 행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나 세리들은 당시 토색하고 있었고, 불의했으며, 자신의 돈으로 간음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의 덜 나쁜 행위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둘째, 자기에게 의롭다여김을 받을만한 행위들을 더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눅18:12). 그때 바리새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있고, 또 회득하고 있는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나이다." 사실 그랬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신에게 있는 의로운 행위로서 금식과 십일조라는 항목을 들고 나왔을까? 그것은 구약성경에 의하면, 회개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2가지 표적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금식'이고 '십일조'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라. 그들은 자기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회개의 표시로서 재를 뒤집어쓰거나 금식을 자주 했다(삼상7:3~6). 그러므로 금식이란 회개에 합당한 첫번째 열매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십일조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자가 하나님 앞에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면서 그 호개의 표시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었다(말3:7~8).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금식도 자주하고 십일조도 빠짐없이 꼬박꼬박 하고 있으니 회개에 합당한 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명하신 금식과 명하신 십일조만을 한 것이 아니라 율법규정에 없는 것들도 행하고 있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년에 한 번 속죄일날에 금식을 하면 되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더 금식을 하고 있었다. 또한 율법에 의하면 곡식과 기름과 포도주 그리고 우양의 십일조만을 드리면 되었는데(레27:30~33,신12:17), 그들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더 드리고 있었다(마23:23). 그러므로 얼핏 보기에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더 맺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평가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자주하는 금식이나 더 많이 드리는 십일조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아닌 것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세리의 회개기도 속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들어 있다고 말씀하셨다.

  셋째, 진정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이 없는 회개의 열매는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회개의 열매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눅18:13).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회개의 열매는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을까? 그는 백성들이 기도하는 장소에 나가지도 못했다. 다만 멀찍이 떨어져서,  이방인이 기도하는 자리에서 기도하되, 감히 하늘을 우러러 쳐다 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면서 자신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라고 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세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세리는 진정 회개하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부으면서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인 것을 철저히 시인하면서 자신을 극도로 낮추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용서를 간절히 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곧 그의 낮춤이거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세리는 어떻게 기도했을까? 자기자신은 남들이 하는 죄를 짓고 있지도 않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율법의 규정보다 훨씬 더 많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을 드리고 있다고 자랑하듯 보고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마음을 찟는 회개없이 드리는 바리새인의 열매를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인정해 주시지 아니하셨다.  그렇다 어떤 열매를 주께 드리는 것보다 회개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성도들이여,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한다면, 먼저 마음을 찟는 회개부터 하라. 그래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회개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힐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회개없이 열매부터 맺으려고 애쓰다보면, 자기가 드린 열매들을 보며 스스로 흐뭇해하다가 멸망으로 떨어질 수가 있다. 열매와 회개의 순서를 뒤바꾸지 말라. 이것을 바꾸어버리면 주님 앞에 회개의 열매를 많이 드리고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철저한 자기회개가 없이 열매를 드리는 것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철저히 회개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죄를 짓고 난 후에 다윗의 했던 고백을 들어보라.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무엇부터 했을까? 그는 속죄의 제물을 바치기 전에 주님께서 진정 원하는 것이 상한 심령이라는 것을 알았다(시51:16~19). 그래서 그는 먼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드렸던 것이다. 그런 후에 그는 번제와 수소를 드리라고 했다. 그렇다. 회개와 열매의 순서를 바꾸어버리면 외식하는 바리새인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철저히 자신의 부족함을 아뢰며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며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난 후에 작은 것이지만 회개의 열매를 주께 드려야 한다. 또한 열매를 드릴 때에도 자기가 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는 여건을 마련해주셨기에 다만 순종한 것 뿐이라고 고백하라. 그래야 그것이 바로 회개의 열매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던 세리의 기도처럼 열매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회개부터 시작해야 한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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