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이 새 사람이 되기 위한 핵심 요체(要諦)는 무엇인가?(엡4:22~24)_2023-12-31(주일)

by 갈렙 posted Jan 0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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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fOD5wpGgxng
날짜 2023-12-31
본문말씀 에베소서 4:22~24(신약 314면)
설교자 정보배목사

2023-12-31(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옛 사람이 새 사람이 되기 위한 핵심 요체(要諦)는 무엇인가?(엡4:22~24)_동탄명성교회 정보배목사

https://youtu.be/fOD5wpGgxng [또는 https://tv.naver.com/v/45422941]

 

1. 들어가며

  어떻게 하면 사람이 바뀔 수가 있는가? 특히 내가 예수님을 믿은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이 잘 바뀌지 않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후5:17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기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자기는 분명히 질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자기가 잘 바뀌지 않으며 또한 자기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지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 여기 저기 방법을 찾아본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상태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우선적으로 믿기로 결정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나는 정죄함도 받지 않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을 계속해서 세뇌시킨다(롬8:1~2). 그리고 또 하나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갈2:20). 그런데 성령이 충만했을 때에는 자아를 죽음에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좋지 않는 상황에 찾아오면 어느새 옛날의 상태로 되돌아가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옛사람의 성품과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그 답을 찾아가보자.

 

2.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실행은 결국 무엇이 문제인가?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이들은 오늘도 여전히 더이상 죄를 짓지 않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축복된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동안 예수님을 성품을 닮아가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기 시작한다. 그래서 결국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갈2:20에 나온 말씀처럼,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십자가'란 '고난'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죽음을 넘기는 십자가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기는 연습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죄 짓기를 좋아하고 세상을 즐기려 하는 옛 자아 곧 자기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훈련을 계속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 자신을 향해 "너는 십자가에서 못박혔고 이미 2천년전에 주님과 함께 죽었으니, 너는 이미 죽은 채 있는 자다. 그러므로 너는 화를 낼 수 없어, 어느 시체가 화내는 것 봤니? 그리고 과연 시체가 음란한 것 봤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야"라고 자기자신에게 적용을 한다. 하지만 어느날 참고 참다가 폭발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 것인가? 그것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겼다고 할지라도 또 한 가지를 덜 실천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내 속에 들어있는 죄된 본성의 실체를 제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죄된 본성'이란 단순히 어떤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된 본성을 인격화시키면 그것들은 곧 우리 몸에 거하는 사탄마귀의 부하들 곧 귀신들이기 때문이다(창3:14, 마12:43~45). 그러므로 귀신을 내 몸에서 제거하지 않는 한 귀신은 언제든지 나를 다시 죄짓는 데로 끌고 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귀신을 내 몸에서 제거하는 일 곧 축사사역을 하지 않았으면, 결국 그리스도처럼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를 아무리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할지라도 어느날 귀신들이 다시 혈기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때면 그것을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혈기분노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갈라디아서 2:20의 말씀을 읽을 때에 간과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기 전에 이미 내 안에 살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귀신들이다. 예수께서 내 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귀신들도 우리 몸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믿는 자들 속에 성령으로 들어오실 때에, 성령께서 우리 몸 안에 있는 귀신들을 다 쫓아내신 후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다. 여전히 귀신들이 내 몸에 있는 상태에서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성령을 모셨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귀신들이 내 몸 속에 있으니, 그것들이 어느 순간에는 활동하면 우리는 이내 다시 죄를 짓고 마는 것이다.

  또한 우리 몸 속에 들어있는 귀신들은 반드시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데, 그것은 한 마디로 저주들이다. 왜냐하면 귀신들은 저주받은 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할지라도 귀신들이 주고 있는 저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없으며, 질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또한 자녀에게까지 이어진 저주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3. 귀신들이 들어있는 자신의 육체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설령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긴 채 있다 할지라도 축복된 삶을 살아가려면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좀 전에 언급한 것으로 내 몸 속에 들어있는 귀신의 문제다. 왜냐하면 오늘날 내가 축복된 삶을 살지 못한 채 저주받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자아를 죽음에 넘기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내 안에 예수믿기 전에부터 거주하고 있는 귀신들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그놈들을 내 몸에서 제거하지 않는다면, 가난의 문제는 여전히 지속될 것이며, 질병의 문제 또한 해결받지 못한 채 고통을 받으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녀의 앞길도 역시 계속해서 막힐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자신의 자아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귀신의 문제까지 해결해야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이다. 고로 내 속에 들어있는 귀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진노가 내게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골3:5~10)

골3:5~10 그러므로 [너희는] 땅에 있는 지체[들]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더러움)과 사욕(욕정)과 악한 정욕과 [그리고]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통하여), [불순종의 아들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오고 있다) 7 너희[자신들]도 [이]전에 그[것들] 가운데[서] 살(살고 있어왔던) [그]때에는 그[것들] 가운데서 행하였으나(걸어다녔다) 8 [그런데] 이제는 너희[자신들]가 [역시] <이> 모든 것[들]을 [단호하게] 벗어 버리라 곧 분함(분노)과 노여움(격분)과 악의(나쁨)와 비방(중상)과 너희[의] 입의(입에서부터 있는) 부끄러운 말(상스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고 있어]라. 옛 사람과 그[의] 행위[들](실행들=프락시스)를 벗어 버리고(버린 후에) 10 [시간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옷]입었으니(입은 후에)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하셨던) 이의 형상을 따라[서] [온전한]지식에까지(안으로)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새로워지고 있으면서)

  그러므로 자신의 육체 속에 들어있는 귀신의 문제를 우리는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를 쉽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 자신의 저주도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여전히 저주 가운데 놓여있다. 왜 그러한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한 일이 온전히 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귀신을 내 몸에서 제거시키기 위하여 회개를 하는 것이다. 특히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이전에 내 몸에 들어있던 저주의 실체로서 귀신들이 내 몸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야 저주의 문제가 비로소 끝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비로소 형통의 축복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지라도 귀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한 , 가족의 영혼을 구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부모의 변화된 모습,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지 않은한 하나님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신의 부모가 예수님을 믿고 있어도 여전히 지지리궁상을 떨고 살아가며, 병들어서 아파하는 삶을 살간다면, 자녀는 하나님을 신뢰하기가 매우 어렵다. 부모가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데 맨날 병원신세를 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신앙고백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4.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22~24에서 믿는 자들에게 과연 무엇을 요청하였는가? 

  고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모든 저주에서 우리가 벗어나기까지 우리가 실행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엡4:22~24에 나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헬라어를 가지고 직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엡4:22~24 너희는 유혹(속임)의 욕심[들](욕망들)을 따라[서] 썩어져 가는(부패되고 있는), 구습(이전의 생활방식)을 따르는(따라서 있는) 옛 사람을 [자기자신을 위하여] [단호히] 벗어 버리고(버리라) 23 이는 오직(그런데) 너희의 심령이(생각의 영에게 있어서) 새롭게 되어(되기 위함이요) 24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성스러움)으로(안에서) 지으심(창조하심)을 받은 [질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옷]입으라(입기 위함이다)

  그것은 바로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옛 사람을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생각의 영에 있어서까지 새롭게 되기 위해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 안에서 창조되어 질적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옛 사람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바로 그러한 옛 사람을 우리 몸에서 제거하는 일이다. 

 

5. 옛 사람과 새 사람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옛 사람'이란 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가? 그것은 '옛날의 혹은 이전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는 속임의 욕망들로 인하여 부패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분명히 새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전의 생활방식을 좇아가고 있는 자도 옛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아담의 타락이후 자기자신(혼)이 죄된 본성과 하나되어 여전히 육체를 좇아가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옛 사람'이란 깨끗하게 창조되었으나 타락한 부패한 본성이 자기 속에 들어와서 그 타락한 본성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에 나오는 '부패한 본성'이란 그것을 인격화시키시면 곧 귀신들이다. 고로 예수님을 믿어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귀신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옛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 믿기 전의 사람을 '옛 사람'이라고 말하고, 예수믿은 이후의 삶을 '새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맞지만 틀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럼, '새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로운 사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어서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을 가리켜 '새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새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 생명을 가지고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 사람은 성령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결코 될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인 생명을 가진 자라야 새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성령을 모신 자 곧 성령을 모시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새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새 사람'이 된 것과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사실 별개의 문제다.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옛 사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 역시 옛 사람이 주인인 삶을 살고 있는 옛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되었으면 새 사람답게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는 성도들에게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옷입으라고 강력하게 권고한다. 

 

6. 새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새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새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3가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째,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엡4:22). 옛 사람을 아예 치워버리는 것이다. 옷을 벗어두듯이 아예 벗어버리는 것이다.  이때 사도 바울은 옛 사람이란 유혹(속임)의 욕망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혹의 욕망들은 무엇인가? 곧 귀신들이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엡4:22~24의 다음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으니, 그것은 거짓과 속임의 영(엡4:25), 혈기분노의 영(엡4:26), 중상모략의 영(엡4:31), 수다의 영(엡4:29), 음란의 영(골3:5~6)이라다고 했다. 그렇다. 이것들은 귀신들이다. 다시 말해 귀신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는 실행을 실천하는 것으로 이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귀신을 우리 몸에서 뽑아내야 한다. 귀신이 제거되지 않는 한 우리는 죄의 유혹을 완전 차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했다(엡4:23). 여기서 '생각의 영'이란 내 영이 성령과 하나된 영을 가리키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의 영이 생각의 영역에 있어서까지 성령을 좇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생각까지도 더러움에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오직 깨끗하고 거룩한 성령의 생각을 따라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했다(엡4:24).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귀신들을 따라가서는 아니 된다. 우리 속에 생명주는 영으로 들어와계시는 하나님 곧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것은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요, 진리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내가 적당히 살아도 내 구원에는 영향받을 것이 없을 것이라면서 더러운 삶을 살아가는 자는 결코 새 사람의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리고 진리만을 추구하지 않은 채 거짓을 적당히 수용하면서 사는 자도 역시 새 사람의 삶을 살아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말씀 가운데 불순물이 섞여있는 비진리의 말씀을 버리고 오직 진리의 말씀만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생각까지도 주님이 나를 통해 표현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7. 내 육체 속에도 성령의 집이 지어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미 귀신들이 어머니의 태중에서도 있을 때부터 우리 몸에 침투하여 우리 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은 태어나기도 전에 죄악 중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 인간은 태중에 들어온 악한 영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바로 가인의 삶이다. 가인은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고 스스로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는데, 동생을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했고 동생을 살인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찼다. 왜냐하면 이미 죄를 지은 하와의 태중에 잉태될 때부터 귀신들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귀신들은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것도 아니며, 작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귀신들은 각양 종류의 형태로 우리 몸에 들어있다. 그리고 큰 놈도 있고 작은 놈도 있다. 오래된 것도 있고 얼마되지 않은 것도 있다. 하지만 이 영들이 역사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먼저 한 놈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놈이 다른 비슷한 영들을 불러와서 세력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내 육체 안에 집을 짓는다. 이것이 귀신의 집이다. 귀신의 집은 여러 개의 방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각기 다른 종류의 영들이 들어간다. 그리고 각 방이 들어차면 우리 육체의 다른 부분에 집을 짓는다. 대개 가슴과 머리, 배와 자궁, 등에 집을 짓는다. 그리고 작게는 팔과 손, 다리와 발에도 집을 짓는다. 심지어 손가락에도 집을 짓는다. 그러면 귀신은 우리 몸에서 더 강력해진다. 그리고 귀신이 짓는 집의 재료에 따라서도 우리 몸의 영향력은 더 쎄진다.

  그러므로 옛 사람을 죽음에 넘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 몸에 있는 귀신들을 내어쫓는 것인데, 마지막에는 귀신의 집을 파괴해버려야 한다. 그 방법은 자백하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요일1:9). 그리고 귀신을 집을 파괴하는 때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그러면 하늘에 있는 군대천사들이 내려와서 특수기계로 귀신의 집을 파괴한다. 그리고 허물어진 귀신의 집을 청소한다. 그리고 거기에 성령의 보좌가 내려온다. 그리고 이제는 집을 짓는 천사들이 내려와 광활한 영토에 성령의 집을 짓는다. 그 집이 지어지면 그 사람은 그 방면에 하나님의 귀한 사역자로 쓰임받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귀신이 떠나버린 그 사람에게 은사와 능력을 공급해주시기 때문이다. 

 

8. 나오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옛 사람에게서 벗어나 온전한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부터 시작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생명주는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영 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옛 사람 속에 성령이 들어오심으로 우리가 갑자기 새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새 사람으로 즉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우리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넘겨야 한다. 그리고 나를 죄짓도록 유혹해온 귀신을 점차로 제거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자백하는 회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면 최종적으로 귀신의 집이 파괴되면서 육체에 성령의 집이 지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거룩하고 의로운 새 사람의 삶이 성령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숙지하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성령을 보내주실 때, 우리 속에 들어있던 귀신들을 다 제거해신 후에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옛 사람에게다 그냥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신 것이다. 그렇다. 이 일은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자신이 이때까지 죄인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를 주님이 기뻐하시고, 일시적으로 죄를 덮어버림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난 이후 일평생을 걸쳐서 자백하는 회개를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몸에서 귀신을 계속해서 제거해 나가야 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때, 가나안 7족속들을 내쫓아버린 후에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을 때에 주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12지파는 자기의 영토로 할당받을 땅을 취하려면 반드시 가나안 땅의 일곱족속을 자기 땅에서 쫓아내야 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일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12지파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 땅 거민을 쫓아내지 못했던 지파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에게 가나안 일곱족속은 가시와 올무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찔렀고 그들을 죄짓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가나안 일곱족속이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우상을 섬기게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에서 쫓겨나도록 만든 것이다. 즉 죄를 짓는 자는 하늘의 기업을 상으로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일생일대의 최대의 과제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래야 새 사람 곧 성령으로 살아가는 새 사람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2023년 12월 31일(주일)

정보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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