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부활하실 수 있었던 진짜 이유(요11:17~27)_부활에 관한 진리

by 갈렙 posted Apr 0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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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Odqn3gqBaGM
날짜 2016-04-03
본문말씀 요한복음11:17~27(신약 165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나사로의 부활사건, 부활의 의미, 생명의 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어린양(속죄양), 한 알의 밀알, 생명주는 영, 요한복음, 부활의 이유, 죄없음과 생명이 있음

  예수께서 부활하실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예수께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에게는 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대답은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대답이 과연 전부일까?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게 된 보다 다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크게 2가지요 작게는 3가지다. 먼저는 우리 인간을 위한 이유가  하나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위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또한 우리 인간을 이유는 또한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기 위함이고(막10:45) 또 하나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다(요10:10).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탄마귀와 그의 세력들을 멸하기 위함이 하나 더 있다(히2:14, 요일3:8).

  여러분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부활사건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죽은지 4일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산헤드린공회가 열렸다. 그리하여 산헤드린 의장이었던 대제사장의 제안에 따라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결정하고 말았다. 이는 나사로의 부활사건은 그만큼 파급효과가 대단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공관복음서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읽어보더라도 나사로의 부활사건은 나오지 않는다. 왜 그토록 중요한 사건을 공관복음서는 간과했던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네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서가 왜 기록되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사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인성의 측면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기록되었다. 다시 말해 공관복음서는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의 속죄사역을 이루셨다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그것과 다르다. 요한복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공급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혹시 요한복음을 주의 깊게 읽어보았는가? 그러면 당신은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헬라어, 조에)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그분 안에 생명 안에 있었으니(요1:1,4)", "나는 생명의 떡이니(요6:35)",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요10:10)",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믿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그렇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명을 말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어떤 이는 생명의 복음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생명을 가지신 분이요 그 생명을 나눠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죽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나사로의 부활사건은 요한복음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생명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인생을 한 알의 밀알로 비유하셨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이것을 무엇을 말해주는가? 예수께서 죽으신 이유가 바로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해방하여 모든 사람에게 주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실 때에 이 세상 사람 중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는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5:26)" 그러므로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있었을 당시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하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외아들)였다(요3:16).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다른 목적이 아니었다. 오직 그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분배하여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얻는 것이었다.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할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자신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해방하여 누구든지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려고 자신을 죽음에 넘기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왜 죽으셨는지에 대한 전혀 다른 이유를 살펴볼 수 있다. 우리가 공관복음서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흘려 죽으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죽으실 필요도 없었고 죽으실 수도 없는 분이셨다. 왜냐하면 죄의 삯이 사망인데(롬6:23),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았기 대때문이다. 사망이 강력한 권세를 가졌더라도 죄를 짓는 자만이 사망권세 아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말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람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고전15:55~56)" 그렇다. 사망이 침을 쏘아서 마취를 시키려면 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죄가 없는 사람은 사망이 침을 쏘아도 그 사람을 마취시킬 수가 없다. 뿐만 사망의 뒤를 따르는 놈이 하나 더 있는데, 그놈은 바로 '음부'라는 놈이다(계6:8). 하지만 음부도 죄를 지은 사람이 들어왔을 때에라야 자신의 감옥 안에 사람읭 영혼을 가둬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았다. 아니 죄된 본성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히4:15, 요일3:5). 그러니 사망이 그를 마취시킬 수도 없었고, 음부가 그를 감옥에 가둬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행2:23~24). 그러므로 우린느 예수께서 죽으신 이유가 자신이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망이 그에게 침을 놓아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7~18)" 그랬다. 예수께서는 죄를 지어서 사망이 그에게 침을 놓아 음부에 떨어진 것이 아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심으로 죽음에 이른 것이요 스스로 음부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도 음부도 그를 붙들어 둘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망에서 나오는 것도 그의 권한에 있었으며, 음부에 들어가셨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것도 그분의 권한에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께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일까?

  물론 예수께서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죄가 없었기에 그분은 죽으셨지만 사망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고, 음부에 붙들려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을 생각해보라. 만약 죄를 짓기 전의 아담이 죽었다고 치자, 과연 그가 부활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도 죄없이 죽으셨던 것을 보면 이 가정도 불가능한 가정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정 알아야 할 것은 범죄하기 전에 아담이 죽었다고 치자. 과연 그가 생명의 부활로 살아날 수 있었을까?

  사람은 크게 두 부분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는 육신이요 또 하나는 영혼이다. 육신은 흙으로 빚어졌고, 영혼은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창조하셨다(창2:7). 만약 육신이 인간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라고 본다면,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을 담는 그릇인 셈이다. 그러므로 아담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먹기 좋게금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의 실과의 형태로 두셨다. 그것을 먹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담은 결국 그 생명과를 먹지 못하고 말았다. 그 전에 선악과를 따먹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혹시 죽었다 하더라도 그는 살아날 수가 없었다. 그의 영혼에 하나님의 생명을 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혼의 빈 그릇만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하나님의 생명을 그분의 영혼의 그릇에 담아가지고 오셨다(요5:26). 그러므로 그분이 자신을 죽음에 내 주었지만 죽음도 그가 가지고 있던 생명을 파괴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분 안에 들어있던 생명 곧 파괴될 수 없고 영원히 존재하는 그 생명 때문이었다. 이 생명을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이자 아버지의 생명이라고 부른다. 사망이 힘이 세기는 하지만 그 생명만큼은 파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과 음부 둘 다 예수님을 붙잡아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도 그를 붙잡아 둘 죄가 없었기 때문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는 파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수께서는 죽고 부활하실 수가 있었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해버리셨셨다(요일3:8). 왜냐하면 사탄마귀가 유대인들을 꼬드겨 죄없는 예수님을 사망의 힘을 사용해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죽음을 통해서 마귀가 가지고 있는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접수하셨다. 그리하여 사망과 음부의 열쇠가 주님에게 주어지게 되었다(계1:18). 이것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된 세번째 이유인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뒤 어떻게 되셨을까? 사도바울은 말한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사는 혼)이 되었다고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그렇다. 그분은 부활하신 후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 되셨다. 그래서 그 생명을 받은 자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 계신다. 이때로부터 예수님은 맏아들로 승격되셨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성도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어쩌면 이 일로 인해 예수님은 형님이 되신 것이고 우리는 그분의 동생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거룩하게 하는 시(예수님)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성도들)인 다 한 근원(생명)에서 난 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2:11)". 그렇다. 사람은 사는 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뿐이다(고전15:45). 자신의 육체 안에 인간의 생명만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그분의 생명을 분배받게 되면, 자신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존재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거듭남이라 부른다.  

  그렇다. 예수께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분에게 죄가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분에게 사망과 음부도 건드릴 수 없는 생명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생명을 주시려로 사람이 되어 아들로 오셨다. 그 예수님이 곧 생명이요 그 예수님이 바로 부활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그분을 어린양으로 믿어 죄사함을 받았다. 그리고 그분을 한 알의 생명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평생 그대로 유지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성경은 얼마든지 그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히6:4~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요11:25~26), 믿기는 믿되 끝까지 그 믿음을 지켜나가야 한다. 어떠한 환난과 풍파가 찾아온다 해도, IS와 같은 죽음의 위험이 우리에게 찾아온다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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