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사는 이를 왜 그리스도라고 했을까?(갈2:19~20)_2017-04-02(설교영상)

by 갈렙 posted Apr 0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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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내 안에 사는 이를 왜 그리스도라고 했을까(갈2:19~20)_2017-04-02(설교영상)
날짜 2017-04-02
본문말씀 갈라디아서 2:19~20(신약 304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부활하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자기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내 안에 사는 이, 믿는 이들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전능자요 창조주이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안에 들어와서 사시는 분을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요 온 인류를 위해 자기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왜 그랬을까? 기왕 자기 안에 들어와 계신 이를 전능자요 창조주요 기묘자요 모사라고 자랑하면 안 되는가? 그는 왜 수치와 모멸와 저주의 십자가를 언급하고 바보처럼 남들만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의 아들을 언급했을까?

 

1. 들어가며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시다. 그분은 이제 무소부재한 영이자 되셨기 때문이다(고전15:45, 고후3:17). 다시 말해 이제는 동시에 존재하는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소부재한 예수님을 어떤 공간 안에 가두워 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분이 임재케 하실 수는 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우리의 "믿음"이라고 알려주었다(엡3:17). 사실 예수님은 이제 영이 되셨으므로 어떤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하지만 그분은 언제든지 순간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 수가 있다. 그렇다면,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순간적으로 나와 함께 하게 하려면 실제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14:30)"라고 말하면, 즉시 무소부재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요14:6). 그런데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불러, 갖가지 이적을 행하고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 우리의 행위를 인정해주지 않고 불법자로 내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마7:22~23).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보지만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죽는 날까지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 안에 머물게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을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바울 안에 들어오신 이는 대체 누구신가?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이다(행9장). 그는 다메섹도상에서 무소부재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오늘날까지 부활하신 예수님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의 영인 성령을 통해서 만나주신다(계5;6,요14:6). 하지만 사도바울만큼은 예외였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와 그를 만나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놀라운 능력을 받았고, 지혜의 왕이신 그분으로부터 놀라운 영적 계시의 말씀들도 들었다. 그렇다.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더이상 사람이 아니며,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다(롬9: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안에 들어와 사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능자 내지는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만, 다음과 같은 2가지로 표현했다. 하나는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라고 하였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갈2:20). 대체 바울은 왜 자기 안에 들어와 계신 이를 전능자 내지는 하나님이라고 말하지않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까?

 

3.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부활승천후의 예수님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먼저, 바울 안에 살고 있는 분이 누군지 좀 더 살펴보자. 바울 안에 들어오신 분은 누구일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부활승천하시어 천상에 계시는 예수님이 어떤 존재인가가 나온다. 거기에 보면,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은 대략 3~4가지 정도다. 첫째는 예수께서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끝)이라는 것이다(계22:13). 이것은 예수께서 시간 밖에서 시간을 창조하시며 인간과 온 우주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둘째로, 예수님은 언제나 동시에 존재가 가능하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계1:17b~18,22:7). 그분은 그때도 계시지만 과거에도 계신 분이요 장차 재림하실 분이시다. 그분은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셋째로, 예수님은 전능자이시다. 계1:8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3가지 명칭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전능한 자'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인 사9:6을 보더라도, 아기로 태어나시고 아들이신 그분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예언되어 있다(사9:6).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로 전능자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심판주이시다. 그분은 그의 불꽃같은 눈으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이시요, 빛난 주석같은 발로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계2:23). 한 마디로 그분은 전지하신 분이며 심판주이신 것이다.

 

4. 바울은 자기 안에 들어와 사신 이를 누구라고 표현하기를 원했나?

  그런데 사도바울은 끝까지 자기 안에 사시는 이를 그리스도라고 말하였다(갈2:20). 그것도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라고 말하였다. 그는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진정 자기 안에 들어와 사시는 이가 누군가를 몰랐을까? 아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 영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들어와 있다는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예수님은 더 이상 인성을 지니신 분이 아니시며, 이제는 인성을 부활로 이끌어 하나님이 되신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지, 결코 사람인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자기가 만났고 자기 안에 들어와 사시는 분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어야 맞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자기 안에 들어와 계시고 사시는 분을 '전능하신 이'나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내지는 '자기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굳이 그렇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자기 안에 들어와 계신 이가 누군인지를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겠다는 표시였다. 왜냐하면 바울 안에 들어와 사시는 이는 이미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의 과정을 겪은 분이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계1:17b)"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사도바울이 그분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자기 안에 들어와계신 이가 무슨 일을 했었는지를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의미요. 자신도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겠다는 의사표시였던 것이다.

 

5. 믿는 이들 안에 들어와 사시는 이에 대한 숨겨진 비밀

  이제는 사도바울은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명칭 중에서 그분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했는지를 살펴보자. 그것은 첫째, 예수께서는 한 번도 자신의 전능성과 창조적인 능력을 자신의 기쁨이나 유익이나 성공을 위해서 쓰지 않고 오직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는 데에 썼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누가 자신에게도 인격이 있는데 그것을 표출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있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아버지로부터 듣고 배웠던 말씀만 전했으며(요8:26,28), 아버지께서 그에게 보여준 것을 보고 그대로 전했다(요8:38). 그리고 자신의 전능성을 자기자신을 높이는데 혹은 자랑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오직 남을 섬기는 데에만 사용하셨다. 둘째, 뿐만 아니라 그분은 일평생을 인류의 죄악과 질병과 고통과 아픔은 다 자기가 받고, 오히려 그것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들에게는 평화와 기쁨과 안정과 죄사함과 생명과 천국을 제공해주셨기 때문이다. 오직 이타적인 삶을 사신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아주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딘가에 갇혀지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정말 전능자였던 그분이, 무소부재하셨던 그분이 인간의 육체  속에 갇혀 지내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 인류를 저주와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갈3:13, 사53:4~7).  

 

6. 누가 무소부재하신 주님의 임재를 끝까지 누리며, 자신의 행동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 누가 과연 주님의 임재를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으며, 자신의 주의 이름으로 행한 모든 것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 안에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들어와 사시며, 우리 죄인들을 위해 자기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 살고 있는 것을 아는 자이다. 그리고 오직 그러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려하는 자이다. 그렇다.

  그러나 오늘날 실제는 어떠한가? 처음에는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고 오로지 주님만을 높이던 자가 어느날 예수님 때문에 돈이 생기고 권력이 생기고 인기를 누리게 되니까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는가? 그들은 오늘도 주의 이름으로 주의 일을 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는 다 자기자신의 유익과 인기와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주님의 임재는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가 주의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것도 주님으로부터 결코 인정을 받지 못한다.

 

7. 나오며

  하지만 우리 주님을 보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우리 주님을 보라. 그분은 자신의 전능성과 창조적인 능력을 자기를 자랑하고 인기를 누리고 떠벌리기 위해 사용하신 적이 있으셨는가? 없으셨다. 그분은 치료자여서 자신의 떼어진 살점을 차오르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분은 자신의 전능성을 자신을 치료하는 데에 사용하지 않고, 오직 가난하고 병들고 신음하는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데 사용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이기에 사람이 될 수 없었는데도, 그분은 자신의 전능성을 사람이 되는 일에 사용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이기에 죽을 수도 없었지만 그분은 자신의 전능성을 인류의 대속물로 자기의 목숨을 내주는 데에 사용하셨다. 사도바울은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사신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 성도들이여! 믿는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내 안에 전능자과 창조주 하나님이 들어오신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부를 때 끝까지 나와 함께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게 들어와 사시는 이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와 자기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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