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현재 27권의 성경책들이 신약성경으로 들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들중에는 2/3가 편지들이다. 그중에서도 사도바울이 보낸 편지가 13권이나 된다. 어떻게 사도바울이 개교회나 개인에게 보낸 것이 신약성경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과 함께 1차전도여행을 했던 바나바도 당시에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편지는 현재 외경으로 분류되어 참고자료로만 사용될 뿐, 그것이 성경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되어서 그의 편지는 그냥 참고자료만 되었을 뿐 성경책이 되지 못했을까? 그러나 사도바울이 썼던 13권의 편지들은 성경책이 되었다. 무엇 때문일까? 그런데 20세기 성경번역자들이 사도바울의 쓴 편지를 잘못 번역한 곳도 있다. 딤전6:15~16은 그 대표적인 구절이다. 왜 성경번역자들은 거기에다가 없던 말을 써넣었던 했을까?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발견할 수가 있다.
1. 들어가며
오늘날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외치는 분들 중에는 어떤 신념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다. 그러한 것들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구약의 하나님의 이름도 예슈아(예수)이고 신약의 아들로 나타나신 분의 이름도 예수(예슈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설령 올바른 표현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말해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성경기록의 역사를 무시하는 처사가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B.C.1446년경 모세에게 그 이름을 가르쳐주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 혹은 야훼라고 계시하셨고 그것을 그대로 알고 써왔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한 분 하나님께서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게 했지, 당신의 이름을 예수(예수아)라고 계시했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고 알려준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면 된다.
또한 어떤 분들은 우리나라의 개역성경보다는 킹제임스성경(KJV)이 영감된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잘못된 신념에 해당한다. 그렇게 하면 성경번역의 역사를 거부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킹제임스성경이나 TR(Textus Receptus)성경은 신약사본들 중에서 후대에 나온 소문자사본을 가지고 만든 성경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적어도 12세기에 나온 소문자사본을 토대로 성경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성경비평학과 사본학이 발달됨에 따라, 신약성경이 처음에는 대문자로 쓰여졌음과 파피루스나 가죽종이에 쓰여진 것이 오래된 것임이 밝혀졌다. 그렇다. 그래서 보다 더 원문에 가까운 번역본이 나왔는데, 그것이 네슬알란트 헬라어성경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개역성경같은 경우는 바로 이 네슬알란트성경에서 번역한 성경책이므로, 우리 개역성경은 상당히 권위있는 성경에 해당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번역자들이 한문성경과 영어성경을 참고본으로 쓰다보니,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헬라어원문에 없는 말을 추가하거나 해설을 원문과 동일하게 기록한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본문에 대한 해석이 맞는 것일 수 있겠으나, 원뜻과는 거리가 먼 해석이 마치 성경인 것처럼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개역성경에 나오는 문구이지만 실제 헬라어성경에는 없는 문구임으로, 문자 그대로 번역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약간 해석을 곁들여 해석함에 따라, 성경 원저자가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과 그 의미가 빗나가는 본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성경이야말로 얼마나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찾아보고자 한다.
2. 딤전6:15~16에 나오는 6가지 하나님에 대한 칭호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디모데전서는 A.D.63~65년경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자신의 후계자로 세운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서신이다. 다시 말해, 일종의 목회지침서인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보낼 때에, 장차 재림하심으로 나타나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놀라운 표현들을 편지로 써서 보내었다. 그것은 장차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를 6가지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 칭호들은 살펴보면, 사실은 성부 하나님에게 쓸 수 있는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분이 첫째, 복되신 분이고, 둘째, 홀로 주권자이신 분이며, 셋째, 왕으로 통치하는 있는 이들의 왕이시고, 넷째, 주로 통치하고 있는 이들의 주이시며, 다섯째, 홀로 죽지 아니함을 소유하신 분이자, 여섯째, 가까이 갈 수 없는 빛에 거주하시는 분이어서 누구든지 그를 보지도 못했고 볼 수도 없는 분이라고 했다(딤전6:15~16). 하지만 이런 표현들의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성부 하나님을 정의할 때 사용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님을 표현할 때 쓰는 표현들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사도바울은 같은 편지에서도 성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썼는데 그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딤전1:17)."이다. 그러므로 딤전6:15~16에 나오는 6가지 표현은 누가 봐도 성부 하나님에게 사용할 칭호들임에 틀림없다는 판단이 든다. 그래서였는지, 20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영어성경번역자들이나 우리나라의 개역성경의 번역자들 그리고 표준새번역번역자들이나 바른성경번역자들까지 다 딤전6:15~16에 나오는 분을 성부 하나님이라고 번역해놓았다. 하지만 헬라어성경본문은 그렇게 쓰여있지 않다. 딤전6:15~16의 주어는 장차 나타나실 그분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딤전6:15의 첫시작을 보라. "그가 자기자신의 때에 그것(나타나심)을 보이실 것이다. 그분은 복되시며 그리고 홀로 주권자이시며...(헬라어직역)" 그러므로 딤전6:15의 말씀만 보아서는 그분이 누군지는 나와있지 않다. 단지 이 구절에 따르면 그는 3인칭 단수 남성에 해당하는 분이다. 그분이 바로 6가지 칭호를 받는 분이라고 사도바울이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분이 누군지에 대한 단서가 있다. 그것은 "그것"이다. 딤전6:15의 첫시작의 단어로 나온 "그것"은 사실 관계대명사(목적격)로서, 앞에 있는 나타나실 분을 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타나심"이다. 목적격이니 "나타나심을"이다. 그러므로 딤전6:15~16에 나오는 그분은 나타나실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 누가 나타나실 분인가? 그것은 앞뒤 문맥을 살펴봐야 한다. 특별히 딤전6:15의 말씀은 관계대명사로 시작하여 앞문장과 연결하고 있기 때문에, 딤전6:14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면 거기에 나타나실 분이 누군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거기에 보면, 놀라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딤전6;14에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누군지에 대한 6가지 항목은 전부 다 장차 재림하시게 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인 것을 알 수 있다.
3. 딤전6:15~16에 나오는 6가지 하나님 칭호는 예수님에 관한 칭호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성경을 번역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이 홀로 한 분 하나님이라는 계시가 부족했다. A.D.325년 니케아종교회의 이후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라고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1,700여년동안이나 예수님은 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겨져왔다. 그러니, 딤전6:15~16의 그분은 아들에 대한 칭호라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니까 본문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나타나실 그분을 그만 '하나님'이라고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끝에 사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신 분이시만 그분은 원래 한 분이신 하나님이요, 볼 수도 없었던 유일한 주권자이심이 밝히 드러나고 있다. 성경이 고스란히 그것을 기록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육신을 입고 아들로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딤전3:16). 마리아의 몸을 빌러 태어나셨기에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우셨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정확히 성경에 기록해두었다. 사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아니던가?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다메섹도상에서 만났을 때, 예수께서는 이미 부활승천하히고 수년이 지난 후였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만난 분은 이미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는 그분을 만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요, 한때 육신을 입고 오신 분임이 그냥 믿어졌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님에 대해 딤전6:15~16에 나오는 6가지 칭호를 쓰는 것은 어떤 거리낌도 없었다. 그것이 맞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4. 성경번역자들이 해야 할 책임은 무엇인가?
그렇다. 성경의 기록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해석을 붙이거나 바꾸어서 성경을 번역하면 안 된다. 성경은 있는 그대로를 번역해야 하고 전달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 본문을 해석해야만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라면 난하주에 그것을 설명해주면 된다. 하지만 개역성경번역자들처럼 자기의 해석을 집어넣어 성경을 번역함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인 것을 간과케 하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된다. 아니다. 성경의 기록은 일점일획도 빼거나 더해서는 아니 되며 결코 수정해서도 아니 된다. 그것이 성경번역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5. 우리에게 들려져있는 신약27권의 책들은 어떻게 해서 성경책으로 인정되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왜 신약의 27권이 책들이 성경(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정경)에 포함되었는지에 대해 최소한의 정보는 알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것은 데살로니가전서(A.D.51)요, 복음서는 마가복음(A.D.70~80)이다. 그리고 맨 나중에 쓰여진 것은 요한계시록(A.D.95)이다. 특히 사도바울이 당시 자기가 전도했던 지역에 써보낸 편지 13통이 신약성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어서 사도바울의 13통의 편지가 신약성경이 되었을까를 살펴보자. 그것은 사도바울이 어느 특정교회에 써보낸 편지가 다른 교회에서도 회람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복사되어 다른 교회도 함께 공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편지가 사도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는 판명이 나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편지는 그날 퇴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 편지가 영감으로 기록된 사도바울의 편지인 줄 교회들이 알아보았을까? 그것은 편지의 내용이 기존에 쓰여있던 다른 성경들이나 사도들이 전파했던 내용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썼다고 하는 13개의 편지들은 저자가 누군지 확실했고 그 내용까지 다른 성경과 사도들의 증언과 일치했기 때문에, 다른 교회들도 그 편지를 영감으로 쓰여진 사도바울의 편지이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6. 왜 바나바의 편지는 퇴출당했지만 사도바울의 편지들은 신약성경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 그 당시에 쓰여진 다른 편지들이 더 있었다. 하지만 어떤 편지들은 퇴출당하고 말았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바나바의 편지(서신)'라는 편지다. 바나바의 편지는 안디옥교회를 세웠고 바울과 함께 1차선교여행을 하다가 2차전도여행을 출발하려 할 때 마가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로 심히 다투어서 헤어졌던 바로 그 바나바다. 그런데 그가 쓴 편지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하지만 그 편지는 신약27권에 결코 포함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 편지는 분명히 바나바가 쓴 것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거룩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성경이라고 인정받지 못했고, 참고자료로만 보는 외경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나바가 쓴 편지의 내용이 기존 성경이나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편지는 총1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을 읽어보면, 그가 내린 율법에 대한 해석이 이상하고, 구약인용구절이 잘못된 것이 있고, 특히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매우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나바는 그 편지에서 창1:26에 나오는 표현 즉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는 말씀을 아버지께서 아들과 상의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잘못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는 아직 아들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오직 여호와라 불리우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다. 아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 속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비로소 2천년전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심으로 아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1:26의 "우리"라는 표현을 그는 그만 성부와 성자로 해석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늘에 계신 분은 아버지이요,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먼저 존재하고 있다가 육신을 입었다고 말한다. 또한 단 한 번도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니 바나바의 편지는 교회에서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신앙이 빗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의 편지를 쭉 읽어보라. 그는 얼마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신지를 정확히 말하고 있으며, 아버지가 곧 구주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만약 하나님은 한 분이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바울의 편지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면, 사도바울의 편지도 그만 퇴출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바나바의 편지만 외경(참고자료)으로 퇴출당했고, 바울의 편지들은 전부 다 신약성경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7. 나오며
그렇다. 우리가 가진 지금의 신약성경은 그냥 신약성경(정경)이 된 것이 아니다. 교회에 회람될 때, 사도들이나 사도들에게 배운 속사도들이 그것은 가짜라고 하면 그냥 퇴출당하고 말았다. 오직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된 것만 교회들 가운데 회람되다가 A.D.397년 카르타고에서 신약성경으로 최종적으로 인준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써준 바로 그 헬라어편지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당시 사도들과 교회들이 다 그렇게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세 분으로 보려하다가, 딤전6:15~16에 나오는 주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으로 바꾸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아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세 분으로 나타나신 것은 분명하기는 하나, 그분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천국에서 하나님은 항상 한 분이셨고 지금도 한 분으로 계신다. 그분의 보좌도 한 개일뿐이다. 그렇다.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는 대문자헬라어사본이 들려져 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썼고 당시에 교회들 가운데 회람되었던 그 말씀을 그대로 우리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이성이 혹시 거기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을 수정하거나 가감해서는 아니 된다. 헬라어성경에 나와있는 그 표현 그대로를 그대로 수용하고 믿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그래야 거짓의 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영생을 계속해서 취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딤전6:11).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