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주님의 진단과 평가(요9:1~3)_2017-11-19

by 갈렙 posted Nov 19,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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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MMr6JhlooN0
날짜 2017-11-19
본문말씀 요한복음 9:1~3(신약 161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인간의 불행의 원인과 진단, 예수님의 진단, 예수님의 평가, 날때부터 소경된 자, 하나님의 일들, 예수님은 누구신가

사람의 불행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사실 그것을 따지고 올라가다보면 그것은 죄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죄는 자기에게만 저주나 징계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식과 손자 3~4대까지 이르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나의 불행은 나 잘못만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불행을 어떻게 진단하시고 또한 어떻게 평가하셨던 것일까?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대로 아는 자는 자신의 불행을 바꿀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에까지 이를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자에 대한 주님의 진단과 평가를 통해서 우리가 가진 불행의 모든 요소를 축복의 요소로 바꾸어보자.

 

1. 들어가며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이 맞이한 불행을 보면서 나름대로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곤 한다. 그 사람의 불행이 그 사람이 지은 죄 때문인가 아니면 그의 부모나 조상들이 지은 죄 때문은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불행에 대해 어떻게 진단하시고 어떻게 평가하시는 것일까? 오늘 본문(요9:1~3)에는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한 청년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우리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인도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대체 주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청년에 대해 어떤 진단과 어떤 평가를 내리셨던 것일까? 그것은 또한 오늘날 자신이 불행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던져주는 것일까?

 

2.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이 청년은 과연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불행을 지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일까? 그 이유와 원인에 대해서 율법에서 과연 어떻게 진단하고 있으며, 현대의학에서는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우선 율법에서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무슨 이유에서 발생한다고 진단할 수 있는지부터 살펴보자.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율법에 의하면,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이유를 크게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 때문이다(신28:15,18,27~28).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함으로 자기의 몸의 태생에게 저주가 임하며, 그 저주 가운데에는 소경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신28:46). 특히 십계명에 보면,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 될 경우네는 그 죄값을 자기만 받을 뿐 아니라 자기와 자기의 후손 3~4대까지 받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출20:5). 그러므로 이 청년이 소경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부모나 그의 조상들 중에 우상숭배와 같은 죄악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영적인 비밀에 의하면, 사람이 범죄하면 귀신이 사람의 몸 속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임신부였다고 한다면 귀신이 태아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태중에 있는 아이의 시신경이 발달하는 시기에 귀신이 임신부에게 들어가면, 그 아이를 꽉 눌러버려 눈이 발달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의학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게 되는 원인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것은 특별한 유전적인 요인이 작용했거나 혹은 임신한 여인이 약물을 잘못 먹었을 가능성에 그 무게를 둔다. 그러니까 이 청년이 임신할 때에 이 청년의 어머니가 약물을 잘못 복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이 청년은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가? 적어도 이 청년이 죄를 범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부모나 조상들의 범죄 혹은 그의 어머니의 잘못된 약물복용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3. 이 소경청년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과 평가는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이 청년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진단을 내리셨을까?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일들이 계시되고자 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요9:3).
  그렇다면 이 청년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어떠했는가? 그것은 그 청년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이 드러날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이 청년이 소경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단순한 이유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하나님께 행하시는 일들로서 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사람의 불행을 결코 조장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보여주신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질병이나 장애를 주시려고 의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 환경을 바꾸어 축복된 인생을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이 친구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청년을 치료해주면서 그 청년이 다른 사람들과 나눈 대화 속에 그 해답이 들어있다. 그것은 적어도 3가지다.

  첫째, 그 소경의 입장에서 보는 하나님의 일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그가 비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가 믿음과 순종을 통해 그것을 극복ㅎ라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요9:7), 또한 그가 그 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발견하여 그분을 믿고 구원얻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요9:35~38). 그렇다. 하나님은 인간이 가진 불행을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 누구든지 믿음과 순종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따라간다면, 그는 분명 자신이 가진 불행을 바꿀 수 있으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구원까지도 받게 될 것이다.

  둘째, 그 때와 시기의 입장에서 보는 하나님의 일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 때는 초막절이었고(요7:2,37)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요7:37). 초막절의 끝날인 안식일에 이 청년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께서 그를 치료해주신 것이다. 왜 그럼 초막절에 그리고 안식일에 그렇게 하셨을까? 또한 예수께서는 왜 이 청년의 눈을 치료하시면서 실로암못가에서 눈을 씻으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초막절의 전통 속에 드러난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초막절이 찾아오면, 유대의 제사장들은 밤이 되어도 성전의 불을 환하게 밝혀둔다. 그리고 안식일 새벽에는 주전자를 가지고 실로암 못가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서쪽 굴뚝에 붓는다. 이것은 물로 대변되는 하나님의 생명이 성전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상징하며, 하나님께서 어둠을 밝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고로, 이 사건은 예수께서 누구시며 무슨 일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주님은 바로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시며,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이 소경의 눈을 치료하시면서, 당신이 어둠을 밝히는 참 빛이 되심과 동시에, 생명을 공급하시는 통로이심을 드러내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다름 아닌 안식일이었다. 그러면, 이때까지 소경으로 지내왔던 이 청년에서 과연 안식이 있었을까를 생각해보자. 그는 이전까지 거지였다. 구걸하던 자였다. 그러므로 그에게 안식일이 찾아왔지만 그에게는 안식이 없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장애를 치료해주심으로 그는 비로소 참된 안식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그때가 율법이 말하는 초막절와 안식일이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임을 깨우쳐주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이다.

  셋째, 이 청년이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을 바라보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는 하나님의 일들도 있다. 그것은 이 청년이 눈을 뜨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청년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일들은 분명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던 자라고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 소경이었던 자라도 눈을 떠서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소경에게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도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눈을 억지로 감아버렸다. 예수께서 이사야에 기록된 메시야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매도했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분이라고 정죄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 청년은 달랐다. 하나님께서로부터 오시지 않는 분이 어떻게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면서, 그분은 하나님께부터 오신 메시야이라고 증거했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 평가와 해석에 따라 어떤 이는 더욱 더 저주 가운데로 나아가기도 하며, 한편 어떤 이는 더욱 더 축복 가운데로 나아가기도 하는 것이다(요9:39). 그렇다. 예수님과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고도 믿지 않는 자는 심판으로 나아가지만, 예수님과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고 믿는 자는 장애가 극복되고 구원까지 받게 되는 것이다.

 

4.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렇다. 이 사건은 복합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들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나타난 불행의 요소을 보고 그것을 진단하고 평가할 때 조심해야 한다. 무엇이 자신의 불행의 원인인지를 따지는데 머물러 있으면, 그 사람은 항상 원망과 불평만을 쏟아낼 것이다. 또한 좌절과 실망감으로 비참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과거를 따지지 말라고 하셨다. 오히려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서 하실 일들을 기대해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불행이 아니며 축복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이 무엇인지 밝히 드러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그 어떤 불행이라도 예수님이 누군지를 발견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그 순간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믿을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5. 나오며

  그렇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불행이나 악재라도 그것은 영원한 불행이 아니며 영원한 악재가 아닌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한 뜻과 의도가 들어있다. 그것은 인간의 아픔이 치유되는 일이며,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를 체험하는 일이며, 예수님을 발견하고 믿어 구원을 얻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불행한 사태가 내게 있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할 때 주님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것이 불행한 것이다. 주님의 방식을 알고 따라가면 불행도 행복으로 바뀌며, 아픔도 기쁨이 되고, 저주도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율법의 진단과 의술의 진단 안에 머물러 있어서는 아니 된다. 우리 주님께로 나아가서 그분의 진단과 평가를 들어보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면 이전의 환경을 완전히 뒤집고, 새로운 세계를 펼쳐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그 어떤 불행이라도 그것은 결코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행복과 축복과 기쁨으로 끝맺을 수 있는 길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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