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확실한 표적과 우리의 할 일(마12:38~41)_2018-04-08(설교영상)

by 갈렙 posted Apr 08,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유투브 주소 https://youtu.be/_ZiLYYxe6rI
날짜 2018-04-08
본문말씀 마태복음 12:38~41(신약 20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요나의 표적,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표적, 니느웨성과 회개, 말씀과 기적, 표적과 기적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에 가장 아동틱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나온 요나의 이야기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도망가다가 결국 바다에 던져진 신세가 되었던 요나. 그런데 요나를 큰 물고기가 와서 삼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는 그곳에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3일후 물고기가 그를 육지에 토해냄으로, 원수의 나라인 니느웨성에 가서 회개할 것을 외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나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말하거나 "지어낸 우화"라고 생각해버린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 실제의 사건이자 메시야의 사역을 소개해주는 가장 강력한 표적이라는 사실을 아는가?(마12:38~41) 그리고 예수님도 요나처럼 그렇게 죽었다가 3일만에 살아나셨다. 그런데 그렇게 표적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원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왜 예수께서는 다른 표적은 보여줄 수 없어도 요나의 표적만큼은 꼭 보여 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리고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

 

1. 들어가며

  오늘날 신앙생활하고 있는 성도들의 특징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사도바울은 당시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당시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고전1:22~23a)" 그렇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많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표적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고 지혜를 찾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정작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놓쳐버린다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기에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그때나 지금이아 신앙의 유형은 비슷한 것 같다. 오늘날에는 성령파가 있고 말씀파가 있을 따름이다. 성령의 은사로서 능력과 기적, 치유, 예언 등을 추구하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성령의 은사는 이미 초대교회 이후에 사라졌다고 하면서 말씀제일주의를 추구하는 성도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참된 구원에 이를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기적과 말씀 사이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께서는 왜 표적을 보여달라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을까?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지 약 1년쯤 지난 시기였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더이상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요나의 표적만큼은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예수께서는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그냥 크고 많은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마구 드러내면 좋지 않겠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당시의 시대가 악하고 음란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목적이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악했다. 그들이 예수님께 이러한 요청을 하게 된 이유는 정말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려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음란했다. 진정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표적을 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뭔가의 이익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는 표적을 보여주실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하지만 아무리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반드시 나타내야 할 표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바로 "요나의 표적(욘1:17)"이었다.

 

3. 표적이란 무엇이며, 예수께서 행하신 기사들은 표적인가 기적인가?

그렇다면 요나의 표적이란 무엇인가? 먼저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표적"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자. 표적이란 헬라어로 "세메이온"이라는 단어로서 그 뜻은 "징조, 표(시), 징후, 표적"을 뜻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이런 것이다. 그것은 기적은 기적인데, 거기에 어떤 뜻이 들어있는 기적을 가리킨다. 특별히 이 단어가 예수님에게 적용되어 말해질 때에는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주는 기적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였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에 많은 부분을 보면 거기에는 기적이 가득했다. 하지만 예수께서 행하신 일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그것 모두가 다 표적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께서는 나면서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음을 뜻하는 표적이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게 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한 생명의 떡이며 그  떡은 모든 인류를 살리고도 남은 것임을 알려주는 표적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은 하나도 표적이 아닌 것이 없었음을 알아야 한다.

 

4. 예수께서 보여주시겠다고 하셨던 요나의 표적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요나의 표적만큼은 반드시 모든 사람들을 위해 행하신다고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요나의 표적만큼은 모든 사람일 알아야 할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표적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하는 표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가고 괜찮은 표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하는 뜻을 성취하기 위해 무려 4천년이상을 예언해왔던 것을 성취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류를 위한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것은 마지막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을 거부한다면 더이상 그에게 구원의 기회가 박탈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알고 있는가? 요나의 표적이 한 가지가 아니라 2가지라는 사실은 말이다. 당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에 대해 2가지 말씀하셨다. 첫째,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3일삼야를 있다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예수께서 죽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셨.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베푸시는 가장 중요한 표적이다. 우리는 이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오셨고 그리고 죽으셨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예수께서는 정작 죄가 없었기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정말 그대로 그렇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요나처럼 인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인류를 위한 구원자 곧 메시야이신 것을 믿을 수가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 메시야가 되심은 그분이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해서가 아니다. 그분은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을 전부 수행하신 것을 보고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기적과 말씀 사이에서 어떤 신앙의 노선을 취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기적(능력,치유,은사...)을 마구 추구한다. 기적이 없는 신앙은 가짜라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것인가? 왜냐하면 기적은 더 큰 기적을 요구할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많이 체험한다고 해서 꼭 신앙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사탄마귀나 귀신들도 얼마든지 표적과 기적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가 되면 거짓메시야나 거짓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적을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경고하셨다(마24:24).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들에게 속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는 기적이야말로 진짜 기적이요 진짜 표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기적을 체험했어도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기적은 그에게 결국 저주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단 한 번도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신 적이 없으셨다. 모든 기적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서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어떤 것을 하고 싶어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삶에도 정말 기적이 필요로 하는 시기가 찾아온다면,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요나의 표적 중에서 두번째 표적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요나의 첫번째 표적에 이어 두번째 표적도 보여주었다. 그것은 요나가 니느웨성에 가서 심판을 외쳤더니 그 성 사람들 모두가 다 금식하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다는 것이다(욘2장, 마12:41, 눅11:30). 그러므로 누가복음에는 요나의 두번째 표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요나가 니느웨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가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눅11:30)" 그렇다. 예수께서 모든 인류의 대속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인류구원을 위한 근거를 마련하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수께서 대속제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어도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믿지 아니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셨음 자체가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그의 열 한 제자들에게 인류구원을 위한 믿음의 근거로서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에 관해서 증거할 것을 요구하셨을 뿐만 아니라 회개도 같이 전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24:45~47). 다시 말해, 예수님은 믿음의 표적이 됨과 동시에 회개의 표적도 되었던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요나처럼 예수님도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예수님의 전도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5. 나오며

  예수께서 유일하게 보여주시겠다고 했던 요나의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로,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이다. 그것이야말로 인류구원을 위한 속죄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회개할 때에 비로소 그것에 대해 혜택을 누린다는 것이다. 회개없이는 예수님의 속죄사역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이라면 요나의 표적을 성취하셨던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역사적인 사건으로 실제했는지도 샅샅이 조사해봐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믿을만한 증거였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었는지도 찾아봐야 한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더불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심판받을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피가 자기의 죄를 속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기적이 믿음에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거꾸로다. 하나님께서 여러선지자들과 율법서나 성문서에 말씀하셨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고, 그것이 실제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먼저다. 그러면 성경말씀이 믿음으로 다가오게 되고 그러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의 말씀이 앞으로도 성취될 것임을 믿게 된다. 그러면 그 순간에 그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신앙은 지금 어떠한가? 기적만을 추구하는 신앙인가 아니면 말씀만을 추구하는 신앙인가? 둘 다 필요한 것은 맞는 것이지만 어느 한쪽으로만 추구하다보면 예수님을 놓쳐버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믿음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기적을 체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패턴이야말로 내게 있는 믿음을 더욱 더 견고하게 해주며, 기적이라도 내게 유익한 기적이 되게 하며, 말씀이라도 체험으로 보증되는 귀한 말씀이 되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4월 8일

정병진목사

 

 

 

 


Articles

2 3 4 5 6 7 8 9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