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살리기 위해 야곱이 선택한 것은 무엇이었나?(창32:9~12)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by 갈렙 posted Sep 0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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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g6IrorGIzyk
날짜 2018-09-02
본문말씀 창세기 32:9~12(구약 49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야곱의 필사적인 기도, 야곱이 만난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조부와 부친의 하나님, 벧엘의 하나님, 얍복강의 기도, 처자식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기도

야곱은 왜 얍복강에 홀로 남아 기도하는 것을 선택해야 했는가? 사실 야곱이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확실히 만나게 된 것은 얍복강에서였다. 그전까지 야곱은 아버지의 기도 덕분에 은혜받으며 살 수 있었다. 벧엘의 체험도 그렇고, 하란에서의 체험도 그랬다. 그는 아버지의 기도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아버지의 기도로 초자연적인 능력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자기 차례가 돌아왔다. 지팡이 하나 가지고 요단강을 건너왔는데 다시 건너가려고 하니 처자식을 비롯하여 두 떼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들을 지킬 힘이 없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려고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에서는 자기 가족까지 해칠 힘이 충분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야곱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처자식을 버리고 도망칠 것인가? 다시 옛날처럼 잔꾀를 부려 주변의 왕들에게 가축을 바쳐서 용병을 구해올 것인가? 그런데 그날 그에게 번뜩 스쳐가는 한 장면이 있었으니, 그러자 그는 홀로 얍복강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혼자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날 얍복강에서 선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1. 들어가며

  야곱은 쌍둥이였다. 그는 그중에 동생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는 잔꾀가 많았다. 심지어 형의 장자의 명분까지 팥죽 한 그릇으로 살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일은 그가 16살(?) 어렸을 때 일어난 일이다. 그 일로부터 60년이 지난 후,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서 형이 받을 장자의 축복까지 빼앗았다. 그러자 야곱의 형이었던 에서는 동생을 죽이려고 한다. 그러자 야곱은 하는 수 없이 어머니의 권고로 에서의 노가 풀릴 때까지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때 아버지 이삭은 야곱을 보내면서, 한 가지를 부탁했는데, 그것은 야곱이 그곳에 가서 같은 종족(셈종족)인 외삼촌 라반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야곱은 정든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20년을 살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형 에서의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아, 전가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러자 그가 선택한 한 가지 행동이 있었다. 그것은 끈질긴 사생결단의 기도를 드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대체 그는 어떻게 어떤 기도를 드렸길래 하나님께서 "네게 이겼다"라는 말할 정도가 되었으며, 자녀들의 안전까지 얻는 복을 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2. 야곱은 언제 하나님을 만났을까?

  야곱이 하나님을 알게 된 시기는 사실 이른 시기는 아니었다. 그의 신앙의 시작은 76세 되던 해에 벧엘에서였으며, 그의 신앙이 인정받은 것은 그로부터 다시 20년이 지난 96세되던 해, 얍복강에서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곱이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했던 것이 야곱의 젊었을 때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결혼도 못한 채 늙어가고 있는 야곱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의 나이가 76세되던 해였기 때문이다. 그때에 형 몰래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가 받을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이다.

  야곱이 얼마나 늦은 나이에 외삼촌집으로 도망쳐야 했는지 우리는 그의 삶을 역추적해 봄으로 알 수 있다. 그가 자기식구 70명을 데리고 애굽으로 들어갔을 때, 그의 나이는 130세였다(47:9). 그리고 그때 요셉은 40세였다. 애굽에서 총리가 된 지 10년이 지난 후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곱이 요셉을 낳을 때 그의 나이가 90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야곱은 요셉을 낳고 6년이 지난 후에 밧단아람 곧 하란을 떠나 자기의 고향 브엘세바(헤브론)으로 향한다. 그런데 야곱은 외삼촌집에서 두 딸들을 아내로 얻기 위해 14년을 종살이해야 했으며, 이후 6년을 더 봉사해야 했다. 그러므로 야곱은 83세에 결혼했고, 그가 76세 때에 외삼촌집으로 길을 떠났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600km가 넘은 길을 가고 있을 때에, 루스지방에서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닥다리 위에서 그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자손번성과 가나안땅기업 축복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그에게 4가지를 더 약속하신다. 그것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네게 어디로 가든지 지켜줄 것이다. 너를 이끌어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해주겠다. 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28:15)." 그러자 그는 그 자리에서 자기가 베고 자던 돌베게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으로 하나님의 집(벧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벧엘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야곱이 하나님을 찾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만나 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첫 만남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일방적인 찾아오심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때 홀로 외로이 길을 가고 있는 야곱을 만나주신 것일까? 그것은 야곱이 무엇인가를 잘 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의 기도덕분이었다. 그의 아버지 이삭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돌봐주시도록 기도했기 때문이다(28:3~4). 어찌 되었든 야곱은 아버지의 기도로 꿈속이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외로운 마음에 많은 안정을 얻었을 것임에는 틀림없다. 아비의 기도는 이렇게 아들을 살릴 수 있다.

 

3. 그가 외삼촌 집에서 경험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외삼촌 라반의 집까지 찾아간 야곱은 그 집에서 아버지가 부탁한 또 한 가지 숙제를 행하는데, 그것은 외삼촌 라반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야곱의 눈에는 외삼촌 라반의 두 딸들 가운데 동생 라헬이 훨씬 더 사랑스러워보였다. 그때 외삼촌은 야곱을 데리고 있으면서 품삯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어보았고, 그때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달려고 했다. 그러자 외삼촌은 그에게 7년봉사를 제안한다. 결국 7년을 수일처럼 일하고 기다려 결혼을 했으나 아침에 일어나보니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다. 그러니 라헬을 다시 얻기 위해 야곱은 또다시 7년봉사를 약속했고 일주일 후에 라헬과 두번째 결혼을 한다. 그리하여 야곱은 83세에 결혼하여 레아와 라헬 그리고 두 명의 여종을 아내로 맞이하여, 총 11명의 아들들과 한 명의 딸을 낳는다. 마지막으로 라헬이 11번째 아들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은 이제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삼촌은 그제야 진짜 품삯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품삯을 속이고 잘 주지 않는 것을 알았던 야곱은 외삼촌에게 제안하기를 양떼 중에서 아롱지고 점이 있고 검은 색의 양들이 태어나면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 얼씨구나 하고 품삯을 정했던 외삼촌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야곱의 양떼는 늘어만 간다. 왜냐하면 야곱이 튼튼한 양을 얻기 위해 양들이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살구나무 신풍나무 버드나무 가지를 그들 앞에 놓아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그러한 행위가 양떼들로 하여금 아롱지고 점이 있고 검은 색의 양들이 낳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그 비밀은 나중에 알게 된다. 그것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그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경험했고 할아버지가 경험했던 전능하신 하나님을 양떼를 치면서 비로소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창17:1, 28:3~4). 그러니까 훗날 야곱도 자신이 만난 하나님이 다름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창48:3). 

 

4. 두 떼나 되는 처자식과 소유물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 고민이 깊어가는 야곱

  라반의 집에서 양떼들을 돌보면서 다시 6년을 봉사하자, 야곱도 어느새 부자가 된다. 양떼와 소떼가 많아졌고, 낙타와 나귀와 노비들도 많아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신다(31:3,32:9). 그러나 외삼촌이 잘 보내줄 것 같지 않자, 야곱은 야반도주를 선택하고 뒤쫓아와 외삼촌과 잘 화해하고 돌아가는데, 이제는 형 에서의 분노가 과연 풀렸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야곱은 미리 사절단을 보내는데, 돌아온 기별은 형 에서가 400명의 장정들을 데리고 온다는 것이었다. 형의 노가 풀린 줄 알았는데, 형이 자신에게 앙갚음하겠다고 온다는 기별을 듣게 된 야곱은 깊은 시름에 빠지게 된다. 고비고비마다 쉽게 지나오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큰 시험거리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정신없이 왔으며, 지팡이 하나 들고 혈혈단신으로 요단강을 건너왔지만 이제는 4명의 부인들과 12명의 자식들과 두 떼를 이룬 소유물을 과연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가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결정한다. 왜냐하면 벧엘에서 나타나시고 하란에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자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먼저 처자식과 소유물을 건넨 후, 얍복강에 홀로 남아 처절한 기도를 시작한다. 그러자 한 사람 곧 천사가 나타나는데(12:3~4), 야곱은 그 천사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를 꽉 붙잡는다(씨름했다는 원뜻). 사실 야곱이 처자식과 소유물을 얻기까지는 자신의 힘으로 어찌하든지 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자기의 힘으로 지켜낼 수 없다는 자괴감에 그는 정말 괴로웠을 것이다. 처자식이 무슨 죄인가 싶었을 것이다. 이제 큰 아들 르우벤은 13, 막내 요셉은 6살이 아닌가? 천진난만한 아이들인데, 어찌 이 어린 것들을 하루 아침에 잃어야 하는지 마음이 너무나 아팠을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신하여 나타난 그 천사를 힘껏 붙들기로 한다. 천사는 이내 돌아가려고 하지만 야곱의 처절한 기도에 꼼짝 못하게 되자, 천사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환도뼈)를 쳐버린다. 그래도 야곱은 천사를 놓아주지 않은 채 필사적으로 매달리면서 말한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당신을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 그러자 천사는 네가 하나님(천사)과 사람들(에서와 400명의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고 하면서 야곱을 축복하고 떠난다. 야곱의 기도가 하나님을 감동시킨 것이.

 

5. 가족을 살리려고 몸부치는 야곱을 보면서

  우리는 여기서 처자식을 살리려고 몸부림치는 야곱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드는 길밖에 없다는 것임을 야곱은 그때 확실히 알았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는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기도는 생사가 달려 있었기에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까지 사실 야곱은 아버지의 기도덕분에 복받고 살았다.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자신에게 나타난 것도 아버지의 기도 덕분이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부자가 된 것도 사실은 아버지의 기도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내 처자식과 낙타와 나귀와 노비들이 자신의 손에 달린 것이다. 자신의 몸 하나만 건지자면 도망치면 된다. 하지만 어린 것들을 놔두고 도망칠 수는 없다. 그래서 사실 모든 사람이 자식 때문에 고생도 사서하는 것이고 자식 때문에 희생도 해 보는 것이다. 자식의 문제만큼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의 차례다. 야곱은 지킬 힘이 없었지만, 에서는 파괴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자녀를 지킬 힘이 없지만 사탄마귀는 우리의 자녀들을 파괴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도 전능자 앞에 무릎 꿇지 아니할 수 없다. 내 힘만으로 사탄마귀로부터 우리의 자녀들을 지켜낼 수 없으며,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찾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가 있어야 그들도 벧엘의 체험을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기도가 있어야 내 자식이 하란에서의 초자연적인 체험도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보지 않겠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자녀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녀는 자녀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그냥 넘어가고 있지는 아니한가? 아니다. 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빚진 자였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얍복강가에서 그 빚을 갚기 시작했다. 처자식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도 야곱처럼 처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려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얍복강의 체험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의 하나님에게서 이제는 나의 하나님으로 바꾸어야 되지 않겠는가?

 

6. 나오며

  여러분은 과연 자녀를 위하여 눈물로 절규하면서 부르짖어 보았는가? 나의 자녀를 위해 부르짖어 기도해보지 않는 자는 자신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서는 아니 된다. 자녀사랑은 간절한 기도로 그들의 미래를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이요, 그들의 앞길을 인도해달라고 전능자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홀로 길을 가는 야곱에게 벧엘의 하나님은 야곱에게 4가지를 약속했었다. "함께 할 것이다. 지켜줄 줄 것이다. 인도해줄 것이다.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야곱에 나타나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 4가지 축복이 그냥 내 것이 될 수는 없다. 우리의 처절하고도 간절한 기도가 수반될 때에 가능하다.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지금도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이다. 아무리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기도가 없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은총을 베풀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간절히 기도하자. 부르짖어 기도하자. 기도하여 우리 자손을 하나님의 손에 위탁하자. 그분이 인도해주시어 그들도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을 잘 믿어, 회개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천국에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건투를 빈다.

 

2018년 9월 2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