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경주에서 내 약점은 무엇인가?(고전9:24~27)_2018-11-04

by 갈렙 posted Nov 0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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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wx3hXr4paSc
날짜 2018-11-04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9:24~27(신약 274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신앙의경주,복음적인방법과 율법적인방법, 자원하는방법과억지로하는방법,경기장(스타디옴),단거리경주,격투기시합,승리관(면류관),상얻음,버림받음,이스트미안경기

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 하나를 고르라면 그 사람은 아마도 바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그리고 왕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했던 전무후무한 전도자로 쓰임받았으며, 신약성경을 무려 13권이나 기록한 위대한 성경저술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전9:27에서 자신이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도리어 자신이 버림을 받지는 아니할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와 같이 위대한 사도라도 진짜 버림을 받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어떤 이는 상에서 버림을 받는다는 말이라고 하지만, 상이란 받지 못한다고 말해야지 상에서 버림받는다는 말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전파한 것은 가짜신앙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경주에서 모든 이들이 다 결승점을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신앙의 경주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거나 버림받지 아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관을 쓰는 성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그리하여 신앙의 경주에 있어서 내 약점이 무엇이며, 최후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함께 살펴보자.

 

1. 들어가며

  오늘날 한국교회 젊은이들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는 이들로부터 헌신과 봉사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혹시 젊은이들이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온다. 왜냐하면 지금 이 세상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에는 바쁘지만 정작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는 소홀히 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권을 이야기하고, 양심의 자유도 이야기하지만 내가 과연 국가와 민족, 가족과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예정론과 맞물려서 자신이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도 다 하나님이 하게 해 주셔야 가능하다면서 봉사나 희생을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신앙생활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죽어서 내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곳에서 상을 받아 그것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다(딤후4:18,7~8).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구원과 상급을 분리하면서 말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구원은 편한 예정론을  따라가고 있고, 상급은 굳이 힘들게 고생할 필요가 있느냐는 식이 되어버렸다. 아니다. 하나님은 결과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과정도 보신다. 그리고 믿음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태도와 자세도 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급과 구원을 따로 놓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영혼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그것을 따논 당상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신앙을 경주에 비유하면서 자신은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비록 신앙인이라도 신앙의 경주를 다 마치지 못해 중간에 탈락하거나 마지막에 가서 결국 버림당할 수 있음을 경고하기도 했다(고전9:27).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하면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마칠 수 있는지 그리고 천국에서 상얻는 자가 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내게 있어서 부족한 면은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까지 함께 살펴 보고자 한다.

 

2. 바울은 구원얻어 천국에서 상을 얻는 것을 무엇에 비유했는가?

  바울은 한 개인이 구원을 얻어 천국에서 상을 얻는 것을 경주에 비유했다(빌3:12~14). 그는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예수님께 잡힌 바 된 그것 즉 하늘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으려고 달려가고 있다고 말했다(빌3:12~14). 그렇다. 성도들이 믿음으로 신앙의 노정 안에 들어왔다면 이제는 인내로써 자기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해야 한다(히12:1). 그리고 자신의 경주가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달려가야 한다(갈2:2, 빌2:16). 그리고 그것의 종국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며, 거기에서 면류관을 얻는 것임을 알고 달달겨가야 한다(딤후4:7~8).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경주를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노라고 말했다(행20:23~24).

 

3. 성도가 믿음의 경주에서 이기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바울은 고전9장에서 성도들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2가지로 말했다. 하나는 뚜렷한 신앙의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가는 것이라고 말했고, 또 하나는 믿음의 노정에서 탈락되지 않도록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을 좀 정리해보면, 앞의 방법은 적극적인 방법이자, 자발적인 방법이라면, 뒤의 방법은 소극적인 방법이자, 억지로라도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앞의 방법은 자기 스스로 행하는 것이나 복음적인 방법이라고 명명한다면, 뒤의 방법은 어쩔 수 없이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라 율법적인 방법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첫째로 신앙의 노정에서 이는 자가 되기 위한 첫번째 방법으로서, 복음적인 방법이자 자발적인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이것은 그것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하는 상태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자기가 왜 존재하며 왜 지금 이러한 훈련과정에 있는지를 잘 아는 자가 취하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에 익숙한 사람의 특징은 목표가 분명하고 뚜렷하다는 것이다. 그에게서는 오늘도 에너지가 넘친다. 그에게서 나오는 불굴의 투지를 아무도 막을 수가 없을 것 같아보인다. 그런데 그가 추구하는 것은 썩어없어질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썩지 아니할 하늘에 준비된 상급이다. 그것은 그가 천국에 들어가되 거기에서 승리관(면류관)을 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사람의 존재목적이요 일상생활의 목적인 것이다. 이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는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이다.

  둘째로, 신앙의 노정에서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한 두번째 방법으로서, 율법적인 방법이자 억지로라도 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이것은 기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즐거워서 하는 것도 아니다. 어쩔 수 없이만 해야 하기 때문이 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신을 철저히 절제하고 통제한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통제하고 잠자는 것과 부부생활을 하는 것까지도 통제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노정에서 그만 탈락하고 넘어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 신앙의 결국을 보지 못한 채 버림당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신앙의 노정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율법적으로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이다.

 

4. 바울은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을 무엇에 빗대어 말했는가?

  바울은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법을 무엇에 빗대어 말했는가? 그것은 고린도지역에 열리던 이스트미안(Isthmian games)를 빗댄 것이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성경만으로서는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이 배경이 어떤 것인지 피부에 잘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을 읽어보면 다르다. 바울은 당시 고린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사실에 들어서 신앙의 경주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올림픽게임과 같은 성격을 지닌 이스트미안 경기를 그대로 옮겨와서 말하고 있다. 당시 헬라지역에는 전 세계인들이 즐기는 대규모 국제경기가 2년마다 혹은 4년마다 열리고 있었다. 얼마나 그 열기가 뜨거웠는지 황제도 이 경기에 출전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특별히 이스티미안 경기는 2년마다 열리는 경기로서, 단거리 달리기 경주가 있었고, 권투 즉 격투기 경기가 있었다. 오늘날 경기장을 일컫는 "스타디움"이라는 말은 이때 달렸던 단거리 달리기 코스의 단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즉 약 200m정도 되는 거리를 "스타디온(stadion)"이라고 불렀다. 나중에는 이 200m 트랙을 둘러싼 경기장이 생기면서, 그 경기장 자체를 "스타디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당시 모든 사람들이 가장 되고 바라는 것은 2가지였다. 하나는 스타디온을 잘 달려 소나무로 만들어진 승리관(면류관)을 머리에 쓰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격투기 시합에 나가 상대방을 쳐서 무너뜨려 최고의 격투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격투기 시합은 달리기 시합과는 다른 것이었다. 경주에서 혹시 지면 승리관을 못쓰면 되었지만, 격투기 시합에서는 지면 피투성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격투기선수는 얼마나 자신의 몸을 연마해야 했는지 모른 정도다. 내가 이기지 않으면 내가 피투성이 되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선수는 자신을 철저히 통제해야 했다. 최소한 10개월동안 오직 격투기시합을 위해 자신의 몸을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을 하다보면 어찌 피곤하지 않았겠으며 어찌 지치지 않았겠는가? 그래도 그는 이렇게 자신을 추스렸다. "내가 이 경기에서 지면 죽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러니 내가 이 경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시키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자, 가자" 하면서 자신의 몸을 철저히 만들어갔던 것이다.

 

5. 사도바울은 신앙경주의 2가지 방법을 어떻게 적용했는가?

  그러므로 한 사람이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2가지 방법이 다 필요하다. 적극적으로는 면류관 얻기 위해 오늘도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을 상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소극적으로는 이 신앙의 경주에서 탈락하면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각오로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 자신에게도 달려야할 경주가 있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그는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보다 그 일에 온 정성을 다 기울였다. 그 목표를 채우기 위해서 그는 식지 않은 열정으로 날마다 달려갔다. 심지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그 일을 해 나갔다. 하지만 바울이라도 항상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힘들 때도 있었고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때에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가 좋아서 그리고 기뻐서가 아니라 부득불 할 일이요, 만일 이것을 행하지 못한다면 나에게는 화가 있을 것임을 나는 안다. 그리고 내가 이 일을 억지로하도 행하는 것은 내가 주님으로부터 복음전파의 직분을 맡았기 때문이다(고전9:16~17)"

  그렇다. 우리도 항상 신앙의 노정에서 불타오르는 열정만으로 승리관을 향하여 달려갈 수만은 없다. 그러나 그때라도 우리는 경주를 중단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방법이라도 동원해야 한다. 의지의 율법적인 사용과 직분의 율법적인 사용을 그때에 자신에게 적용하여 최소한 노정에서 탈락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신앙의 노정에서 결국 낙오자로 전락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6. 신앙의 노정에서 승리하는 자가 받을 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신앙의 노정에서 결국 승리하는 자가 받게 될 상급이란 무엇인가? 만약 그것이 자원함으로 행하는 것이었다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서 상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면 승리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자원함으로 아니라, 부득이함으로 경주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에는 하늘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상은 없다. 하지만 2가지 장점이 있다. 하나는 적어도 하늘가는 노정에서 탈락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비록 천국에서 받을 상은 없지만 이 땅에서 받을 수 있는 2가지 상은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녀의 축복과 물질의 축복이다. 이것은 이미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한 것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시 말해, 억지로라도 율법적으로 자신을 쳐 복종시켜 일하게 되면, 비록 하늘에서 상을 받을 수 없을지라도 이 땅에서는 우리가 복을 누리고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구레네시몬을 보라. 그는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그의 아들 알렉산더와 루포가 로마교회의 핵심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억지라도 주님의 일에 충성하고 헌신한다면 자녀의 축복이 반드시 따른다. 그리고 물질의 축복도 따르게 된다.

 

7. 나오며

  모든 사람에게는 신앙의 경주에 있어서 자신에게 취약한 부분들이 있다. 그것이 자발적이고 복음적으로 신앙의 경주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율법주의적으로 인하여 어떤 틀이 정해져 있을 때에 잘 하는 이들도 있다. 여하튼 우리 자신의 신앙의 경주를 위해 나 자신이 어떤 부분에 있어서 취약한가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완하면서 자신의 장점을 살린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오늘날에 들어와서는 이미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부정적인 면도 드러남에 따라 율법주의적인 면도 많이 고려해야 할 시대가 되었다. 자발적으로 경주하는 방법과 억지로라도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방법은 사실 모두다 큰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는 자발적인 경주와 비자발적인 경주를 병행하여 결코 신앙의 노정에서 탈락되는 자가 하나도 없어야 하겠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을 상을 향하여 부지런히 달려가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2018년 11월 04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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