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과연 누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가?(눅15:1~7)_2019-02-03(설교영상)

by 갈렙 posted Feb 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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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VyNAy4Vd7Qw
날짜 2019-02-03
본문말씀 누가복음 15:1~7(신약 121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하나님의사랑,하나님의공유적속성,목자이신예수님,의인아흔아홉명,죄인1명,한마리의잃어버린양,절대포기하지않는사람,무조건덮어주시는사랑,계산하지않는사랑

1. 들어가며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신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셨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지는 못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이 인류를 구원하기에 부족함이라도 있는 것인가? 아니면 누구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받지 못할 자로 정해놓은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에게 부은 바 되었는데도 사람이 왜 구원을 받지 못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서 이 말씀을 통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2. 하나님의 제일되는 속성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는 하나님만이 가지는 특징이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은 사람에게주신 특징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앞의 것은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부르고, 뒤의 것은 "공유적 속성"이라고 부른다. 이를 테면, 하나님과 사람은 다 공히 영(spirit)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사람과 하나님은 영적 존재로서 지음받았으며, 죽어 없어지지 아니하는 불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람처럼 하나님도 영적 존재이지만 두 영은 각각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영은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는 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영은 시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영이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은 무소부재가 가능하며, 동시존재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민족이 동시에 11시에 예배를 드려도 동시에 그 예배를 다 받으실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멀티테스크가 가능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가지고 공유적 속성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것들에는 거룩함, 의로움, 공의로움, 선함, 진실하심, 긍휼이 풍성함(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심), 공평하심, 사랑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제일되는 속성은 어떤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사랑"이라는 속성일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당신의 사랑하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을 베푸셨으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3. 잃은 양을 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는 무슨 비유인가?

  어느날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께 나아가서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과 식사하고 있는 장면을 지켜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율법사들)은 예수님을 힐난하며 비난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하나의 비유말씀을 들려주신다.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목자의 비유다(눅15:1~7). 이 비유의 말씀을 헬라어원문으로 직역해보면 이렇다.  

“너희들 중에 어떤 사람이 양들 일백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로부터 하나를 잃어버린 후에는 아흔아홉마리를 광야 안에 남겨두고, 이미 잃은 채 있는 양을 위하여, 그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가 찾아낸 후에는 기뻐하면서 그것을 어깨에 메고서 집으로 간 후에,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모아놓고는 말하기를,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왜냐하면 이미 잃은 채 있는 내 양을 찾아내었기 때문이요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 안에서는, 회개할 필요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의인 아흔아홉에 대하여보다 회개하고 있는 죄인 한 사람에 대하여, 더 기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몇 가지 의아한 생각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한 마디로 이 목자는 계산력이 떨어지는 인물이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좀 멍청하게 보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첫째, 그는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이 더 중요한지 아니면 99마리의 양이 더 중요한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잃어버린 양을 어떻게 찾겠다고 그 밤중에 나서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양 찾다가 길을 잃거나 낭떨어지에서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셋째, 잃은 양을 찾았다고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놓고 잔치한다는 것은 비용문제만 보더라도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 이 목자는 정말 덜 떨어진 인물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4. 잃은 양의 비유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첫째,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가 어디로 갔는지를 잘 살펴 보아야 한다. 그는 99마리가 남아있는 들판으로 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집으로 갔다. 그것도 찾은 양을 목에 걸치고서 기뻐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잃은 양을 되찾았으면, 99마리가 남아있는 들판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목자는 자기의 집으로 갔다. 이것은 잃어버린 양이었지만 목자에 의해 찾은바 된 양의 최종목적지가 목자의 집인 천국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둘째, 주님께서는 무슨 목적으로 이 비유를 들려주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주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있는 종교지도자들 즉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 사건은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기 위한 비유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18: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 안에서는, 회개할 필요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의인 아흔아홉에 대하여보다 회개하고 있는 죄인 한 사람에 대하여, 더 기쁨이 있을 것이다.

  이 비유는 자신은 회개할 필요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종교지도자들이었던 그들은 자신의 행위를 떳떳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며, 소득의 십일조를 자 바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하고 토색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을 행하는 자들과도 같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눌18:11~12).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의인인 체 했지만 속으로는 방탕했으며,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으며,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고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리는 달랐다. 그들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성전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용서를 빌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5. 하나님께서는 과연 누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가?

  그러자 주님께서는 과연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어 구원을 얻게 되는지를 말씀해주셨다. 사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도 실제로 구원받는 사람은 몇 안 된다. 극히 소수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에 구원받은 자가 적게 되는 것인가? 하나님이 사랑이 부족해서일까? 하나님의 속죄의 피가 부족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주님의 손길을 붙들어 구원얻지 못하는가? 대답은 딱 한 가지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회개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자는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자들에게는 아무리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도 그분의 손을 붙잡지 아니한다. 자신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다. 사람인 이상 누구에게든지 고통과 아픔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아픔 중에 있을 때에 사람은 부르짖는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부르짖는다해도 그의 소리가 주님의 귀에 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영혼이 아무리 속에서 살려달라고 부르짖어도 자신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의 귓가에 자신의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은 사실 한 없이 크시다. 그러므로 자신의 잃어버린 양이 있음을 발견한 목자는 캄캄한 밤중이라고 어김없이 달려나가신다. 자신의 옷이 나무에 걸려 찟겨지고, 살이 찢긴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가다가 어떤 어려움을 겪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어린양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를 살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를 홀로 내버려둔다면 곰이나 늑대를 만나 죽을 수도 있을 것이고, 물을 마시지 못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목자는 자신의 잃어버린 양이 곰이나 늑대를 만나기 전에 먼저 찾아가려 한다. 그분을 우리는 우리의 선한 목자로 두고 있다.

 

6.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잃은 양은 죄인인 우리들이고, 목자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니타낸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정리해보면, 첫째, 그분은 이미 잃어버린 채 있는 양이라도 결코 그 양을 포기하지 않는 분이시다. 고로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 둘째, 그분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설 때에 다칠 위험도 있고 낭떨어지에서 떨어질 위험도 있었지만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있다. 한 마디로 그분의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사랑"인 것이다. 셋째, 그분은 양에게 왜 길을 잃어버렸는지 결코 따지거나 묻지를 않으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랑은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무조건 덮어주시는 사랑"이다. 넷째, 그분은 양을 찾은 기쁨 때문에 자기가 손해보는 것마저도 생각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7. 나오며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이 사람이 되시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 사랑이시다. 그러니 무엇인들 주지 않으시겠는가? 하지만 그분의 사랑을 받는 이는 소수다. 왜 그런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의 부르짖음은 주님의 귀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이 그를 안 찾는 것이 아니라 못찾게 만드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시인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시인하지 ㅇ않았다. 하지만 당시 세리들과 죄인들은 자신이 죄인이며, 길잃은 양이라는 것을 시인하고 있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을 영접해 주었고 그들과 함께 식사까지 하셨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 과연 주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지를 비유를 통해 알려주셨다. 나는 과연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에 해당하는가?

 

2019년 2월 3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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