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분명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범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죄가 진정 자신이 천국가는데 지장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회개시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죄를 방치해놓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절대 아니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알고 지은 죄가 있음에도 그것을 방치했다가는 2가지 재난이 불어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은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알고 지은 죄가 있다면 그것을 빨리 처리해야 한다. 빨리 무릎꿇고 엎드려 사죄를 빌어야 하는 것이다. 보다더 적극적으로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 비유가 바로 눅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 곧 "잃은 아들"의 비유다. 오늘은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통해 주시는 놀라운 하늘의 영적 비밀들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들어가며
예수님은 전능자다. 그래서 그분은 사실 모르는 것이 없다. 그분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데리고 올 때에 그가 전에 어디에 있었는지를 정확히 알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갔을 때, 그의 이름을 그냥 불러내시며 내려오라고했다. 과거의 일을 다 아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드로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씀해주셨으니, 그가 닭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대로 되었다. 그러므로 죄인들에 대한 회개에 대해 사람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하나님으로서 단 한 번의 말씀으로 그들을 전부다 깨우쳐 주실 수가 있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3가지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는 회개에 3가지 방면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데에 3가지 이유가 있다는 것을 가리키며, 회개하는 데에 3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비교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떻게 회개할 때 진정 회개가 된 것인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나는 어떻게 죄를 지은 지은 죄인에 해당하며, 나는 어떻게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할 것인지를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돌아온 탕자의 회개의 모습을 통해서 회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정확히 알아보고 나도 회개할 일이 있으면 이렇게 철저히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사람이 죄인이 되는 3가지 경우는 무엇인가?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경우는 3가지가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들려주신 3가지 비유 곧 "잃었다가 되찾은 비유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첫번째의 경우는 본인의 부주의나 미련함으로 인하여 죄를 짓는 경우다. 이것을 설명해주는 비유가 바로 "잃은 양의 비유"(눅15:4~7)다. 양은 자신의 부주의함 때문에 목자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혼자 따로 떨어져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만약 그를 목자가 찾으로 오지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목소리를 크게 외치는 길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두번째의 경우는 사탄마귀를 비롯한 타인의 부주의 때문에 죄를 짓게 되는 경우다. 타인이 실수하는 것을 보고 그만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사탄마귀가 시험하여 죄를 짓게 되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것은 바로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눅15:8~10)에 나와 있다. 드라크마 스스로 무슨 일을 벌일 수는 없지 아니한가? 세번째의 경우는 본인의 능동적이고도 의도적이며 고의적인 거역 때문에 죄를 짓는 경우다. 그것은 "잃은 아들(눅15:11~24)"의 경우다. 이것은 본인의 부주의함 때문에 범죄한 것이 아니며, 타인에 잘못에 의해 범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본인의 능동적이고도 의도적이며 고의적인 거역과 잘못 때문에 발생하는 범죄에 해당한다.
3. 회개의 3방면이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위에 나온 3가지 비유를 통하여 회개에도 3가지 방면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첫째, 자신의 부주의함 때문에 죄를 지은 경우에는 무조건 그 자리에서 살려달라고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 회개다. 내 잘못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함으로 자신의 회개의 목소리가 목자의 귓가에 들리게 하면 된다. 둘째, 타인의 부주의나 사탄마귀의 꾀임 때문에 죄를 지은 경우에는 성령의 조명하심에 반응하면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등불을 켠 여인의 섬세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성령의 음성에 반응하면 된다. 그러나 셋째의 경우가 가장 중요하다. 셋째의 경우는 본인이 의도적이고도 고의적이며 능동적으로 죄를 지은 경우이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본인이 직접 적극적으로 회개를 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성령께서 오셔서 자기의 마음을 밝혀주셔서 죄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목자되신 주님이 자기가 있는 곳까지 찾아오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나 잃은 양의 비유는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거기서는 목자의 찾으시는 사랑과 성령의 따뜻한 조명이 있다. 하지만 고의적으로 죄를 지은 경우에는 다르다. 회개하지 않으면서, 성령께서 회개시킬 날을 기다려서는 아니 된다. 이때는 회개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적당히 우물쩍 넘어가서는 아니 된다. 그러다가는 정말 회개치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4. 의도적이고 고의적이며 능동적으로 죄를 지은 자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취하시는 행동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자기가 행한 것이 죄인 것을 알고도 죄를 범한 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도록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사실 잃은 아들의 비유는 아들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해서 죄를 범한 경우다. 그것이 불효가 된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했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사용해 의도적으로 죄를 범한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회개를 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어떤 조치를 취하신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회개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지만, 영적인 감각이 없는 자는 하나님의 찾으시는 우회적인 음성을 놓칠 수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내레시는 조치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것은 크게 2가지다. 하나는 거국적이고도 광범위한 조치가 있으며, 또 하나로는 지엽적이고도 개인적인 조치가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거국적인 조치 곧 국가적이고 지역적인 조치에 대해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죄를 지었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취하시는 방법이 있다. 그러한 첫번째 방법으로는 국가적으로 지역적으로 큰 재난을 내리신다.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큰 흉년 곧 심한 기근을 보내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자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지역으로 내리시는 재난에는 크게 3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기근(흉년)이요, 둘째는 전염병이며, 셋째는 전쟁이다(삼하24:13). 구약시대의 한 예를 보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여 범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에 전염병을 보내어 나라를 치셨다(삼하24:15). 3일동안 내려진 전염병으로 인해 통일왕국백성이 무려 7만명이나 죽었다. 그럼, 우리나라의 예를 보자.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하여 남북한 350만명의 사상자를 났다. 그리고 온 국토는 초토화되었다. 왜 그랬는가? 그것은 일제시대에 교회가 신사참배를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조국강토를 피비린내나는 전쟁터로 만들어버리신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탕자로 하여금 회개할 수 있도록 커다란 기근을 보내렸다. 그가 허랑방탕하여 돈을 탕진하자마자 주님은 그 땅에 기근을 보내신 것이다. 그러자 그는 더이상 그 지역에서 살기가 매우 어려울만큼 되었다.
이어 둘째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지엽적고도 개인적인 조치에 대해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죄를 범한 자들에게 거국적이고도 지역적인 재난을 내리신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지엽적이고도 개인적인 재난을 내리신다. 그러면 사람이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모른다. 그런데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내리시는 재난에는 크게 4종류가 있다. 첫째는 양식과 물이 고갈되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 쪼그라지게 가난해지는 것이다. 둘째는 질병에 시달리는 것이다. 중한 질병에 시달리되 회개할 때까지 질병이 지속되는 것이다. 셋째는 하늘 일마다 안 되는 것이다. 손대는 일마다 번창은 커녕 자꾸 쪼그라들며 없어져가는 것이다. 넷째는 수명이 단축되는 것이다. 단명하는 것이다(출23:25~26). 그렇다면, 탕자였던 둘째아들은 어떤 재난에 처하게 되었을까? 그에게는 극심한 궁핍이 내려졌다. 그래서 그는 먹고 살기 위해서 돼지라도 치는 일이라고 하려고 했다. 하지만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그의 입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는 돼지만도 못한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때 그는 생각했다. "우리 집에 가면, 날품팔이들도 풍족하게 먹고 사는데, 나는 여기서 멸망당하고 있구나(으깨어지고 있구나)?"
5. 재난을 당하여 둘째아들이 선택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러자 지역적인 극심한 재난과 개인적인 비참함에 직면했던 둘째아들은 어떤 결단을 하게 되는가? 꽉 죽어버리려고 했는가? 아니다. 그는 그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고 결정한다. 그는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첫째,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리라고 다짐한다. 둘째, 집에 돌아가기는 하겠지만 아들로서의 자격을 떼고 가겠다고 다짐한다. 혹시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어떠한 처분을 내리시더라도 그 처분을 달게 받을 각오를 가진 것이다. 셋째, 자신을 품꾼의 한 명으로라도 받아주실 것을 요청하겠노라고 다짐한다. 자, 탕자의 회개를 보라. 얼마나 적극적인 회개인가? 자신이 행동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인식하고 후회하는 적극적인 회개인가?
6.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어떻게 받아주셨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탕자를 아버지는 어떻게 받아주셨는가? 그를 용서하지 않고 돌려보냈는가? 문전박대하여 내쫓아버렸는가? 아니면 본채만채 해버렸는가? 아니다. 셋 다 아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첫째, 무조건 용서해주셨다. 그에게 어떠한 질책도 하지 않았다. 둘째, 그를 최고로 대우해주었다. 우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먹게 해주셨다. 그에게 그에게 제일가는 겉옷까지 입혀주셨다. 셋째, 아버지는 그를 품군의 하나로 받아준 것이 아니라 아들이자 상속자로 받아주셨다. 왜냐하면 그의 손에 손가락지를 끼워주었으며, 그의 발에는 신발을 신겨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를 다시 아들이자 상속자로 받아주신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돌아온 탕자는 죄용서를 받게 되었으며, 아버지로부터 최고의 대우를 받았고, 아들이자 상속자가 다시 될 수 있었다.
7. 나오며
우리는 이러한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놀라운 영적 진리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의도적이고 고의적이며 능동적으로 죄를 지은 자는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거국적이고도 지역적인 재난과 개인의 비참함이 임한 것은 고의적으로 범죄한 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범죄자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요 커다란 긍휼이라는 점이다. 셋째, 고의로 죄를 범한 자의 회개의 모습은 철저히 자신이 지은 죄를 시인하고 어떠한 처분이라도 달게 받으며 이전에 가졌던 자신의 신분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어떠한 죄를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이다.
지금 혹시 자신에게 기근이 찾아오고 있고, 먹을 것이 없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가? 그리고 심각한 질병에 휩싸여 있는가? 그리고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가? 그것은 고의적이고 의도적으로 능동적으로 지은 죄를 지었음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있는 싸인이라는 것을 알라. 그때에는 즉시 탕자처럼 자신을 주님 앞에 엎드린 채 회개를 하라. 그렇지 않는다면 얼마 후 완전히 으깨어지고 말테니까. 건투를 빈다.
2019년 2월 17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