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정 탕자인가?(눅15:25~32)_2019-02-24

by 갈렙 posted Feb 2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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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VGHdkmzE8vQ
날짜 2019-02-24
본문말씀 누가복음 15:25~32(신약 12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탕자의비유,둘째아들과맏아들,세리와죄인들,바리새인들과서기관들,이방인들과유대인들,먼저된자와나중된자,회개한탕자와회개하지않는탕자,재물욕심,나눔실천

세상에는 두 종류의 탕자가 있다. 하나는 회개하고 있는 탕자가 있고 또 하나는 회개하고 있지 않는 탕자가 있다. 눅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살펴보면, 회개하고 있는 탕자는 오히려 둘째아들이고 회개하고 있지 않는 탕자가 첫째아들이다. 왜 이렇게 뒤바뀌었는가? 그리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자는 누구였는가? 그리고 누가 죽지 않고 살게 되었는가?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의 속편(눅15:25~32)을 통해서, 집안에 있는 탕자가 더 위험한 지경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하늘나라의 완전한 상속자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 행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회개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무엇을 잘못 행하고 있는지를 가르쳐주려고 예수님으로 오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가 오직 그들만의 이야기인가? 오늘날 나에게는 첫째아들의 모습이 전혀 없는가? 이제는 우리를 돌아볼 차례다. 

 

1. 들어가며

  이 세상에는 참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은 어떻게 분류하셨던 것일까? 눅15장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두 종류의 사람을 "회개하고 있는 사람"과 "회개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돌아온 탕자(눅15:11~32)"에서는 누가 회개하고 있는 사람이며 누가 회개하고 있지 않은 사람인가? 다시 말해 진정 누가 탕자라는 말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누가 탕자인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특히 집밖에 있는 탕자보다는 집안에 있는 탕자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집안에 있는 탕자는 어떻게 되어 탕자가 되고 말았으며, 그는 대체 무엇 때문에 회개하지 못하고 버림을 받고 말았던 것일까? 그래서 나도 현재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버림받은 탕자가 되지 않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두 아들들은 잘 알다시피, "둘째아들"(눅15:12)와 "맏아들(눅15:25)"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헬라어원문성경에 보면, 그들은 둘째아들과 맏아들이 아니라, "네오스 아들"과 "프레스뷔테로스 아들"이라고 나온다. "네오스"는 말은 시간적으로 "새로운"이라는 뜻이며, "프레스뷔테로스"라는 말은 "나이많은, 늙은, 장로의, 원로의, 오래된'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경원문에 따라 이 두 아들을 직역해보면, "신참내기 아들"과 "오래된 아들" 혹은 "젊은 아들"과 "나이많은 아들"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두 아들들의 이야기에서 "맏아들"은 오랫동안 그 위치에서 맏아들로 지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두 아들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작게 볼 때에, "둘째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키며, "맏아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더 크게 보았을 때에, "둘째아들"은 이제 갓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가려고 하는 있는 "이방인들"을 지칭하며, "맏아들'은 오랫동안 장자로서의 지위를 누려왔던 "이스라엘 민족"을 지칭하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출애굽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말씀하셨다(출4:22).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장자로 삼으신 것인가? 영영토록 장자의 특권과 혜택을 누리고 살라고 장자를 삼으신 것인가? 그건 아니다. 그 이유는 곧바로 출19장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의 맏아들로 삼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모든 민족에게 제사장나라가 되게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출19: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의 위치를 망각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장자로 세워놓았는지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장자로서의 위치를 이용하여, 자기를 높이고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데에 장자의 권리를 쓰고 말았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지를 우회적으로 말씀하셨으니,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맏아들"도 그중에 하나다. 대체 모든 민족의 맏아들로 지정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무엇을 잘못 하고 있었던 것일까?

 

3.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둘째아들보다 집 안에 있던 맏아들을 탕자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놀랍게도 둘째아들과 맏아들이 더 탕자였음을 본문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가 있다. 그것은 집나간 둘째아들이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옮으로 인하여 밝히 드러나게 되었다. 대체 맏아들은 왜 탕자라고 불리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나이 많은 아들의 생각에는 오직 물질 즉 아버지로부터 더 받게 될 재산 이외에는 다른 것은 안중에서도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맏아들은 들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서 풍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종을 불러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잃어버렸던 자기동생이 집에 건강한 몸으로 다시 돌아온  것 때문에,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그리고 악사들을 불러 춤추며 잔치를 벌였다는 것이다. 그러자 형은 분노했다. 성경원문을 보니, 코를 벌름거리면서 화를 냈다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잃어버렸던, 아니 죽은 줄 알았던 자기의 동생이 돌아왔으면 축하해주고 기뻐해야 할 일인데, 왜 형은 동생이 돌아온 것과 자기의 아버지가 그것 때문에 잔치한 것을 두고 그렇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인가? 더욱이 아버지께서 집밖으로 나와서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간청하는 데도 꿈쩍하지 않고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맏아들의 재산욕심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기 동생이 집을 나갈 때에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의 몫을 챙겼던 것처럼 아버지는 자기에게도 장자의 몫을 주었는데,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는 고로 다 주지는 않은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동생이 돌아오자 아버지가 잔치를 벌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의 생각에는 만약 동생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다 자기의 것이 될 수 있는 아버지의 재산의 일부가 축나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러니 화가 난 것이다. 맏아들의 생각 속에는 오직 아버지의 재산만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형의 생각만을 정리한다면,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어야 했으며, 기왕이면 아버지가 일찍 죽었어야 했다.

  둘째, 나이 많은 아들은 오로지 자기 생각만 할 뿐 자기 아버지의 마음과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집나간 둘째아들로 인하여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아들이 나가서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 아들이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고 건강한 몸으로 말이다. 그러나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그래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잔치를 배설했다. 그런데 맏아들은 장차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자기 아버지가 축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무시했다. 오직 자기 생각 뿐이었다. 사실 그가 지금까지 해온 행동들도 사실은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때까지 자신은 아버지에게 종처럼 살아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밭에나 나가보았을 뿐 일은 다 종들이 한 것이지 자기가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종처럼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만큼 열심히 일했으니 더 많은 것을 물려주라는 말이 아니고 또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그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여러 해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아들의 태도를 보라. 아버지의 재산이 탐이나서 복종하는 척 했을 뿐, 진정 맏아들의 마음에는 아버지를 공경함이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자기의 재산을 축내는 사람이라고 분노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아버지에게도 자신의 동생을 "당신의 이놈의 아들(눅15:30)"이라고 말했다. 대체 어떻게 아들을 간수했길래 이 모양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맏아들은 무례한 자다. 아버지를 밖으로까지 나오시게 하고 있다. 아버지의 간청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잔치를 벌인 아버지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업다고 말하고 있다.

 

4. 맏아들은 그때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

  그렇다면, 맏아들은 그때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 자기는 동생보다 훨씬 더 많은 재산을 물려받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나머지 재산도 다 자기의 것이 될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재산 말고도 아버지 소유의 종들이 또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 그것들도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다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었는가? 그러므로 형은 아버지의 재산을 더 갖지 못해 기분나쁘다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동생보다 더 많은 받은 재산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불쌍한 동생을 돕는 데에, 동생에게 자비를 베풀어주는데에 썼어 했다.

  사실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형은 사람의 영혼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자신이 물려받을 재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재산이 자신이 뭔가를 잘 해서가 아니라 단지, 맏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얻게 된 것임을 알았어야 했다. 그러므로 맏아들로서의 사명을 잘 실천해야 했다. 이스라엘이 장로로서 다른 민족에게 제사장나라의 역할을 해야 했던 것처럼, 맏아들 역시 자기 동생에게 그러한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형은 그렇게 너그럽지 아니했다. 받은 은혜가 있음에도 그것이 자기자신에게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자신의 재산이 다 아버지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동생이 오기전에 아버지가 죽어서 아버지의 재산이 다 자기에게로 귀속되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괴씸한 자를 하나님은 그냥 놔두지 아니한다.

  이스라엘의 민족의 역사를 돌아보라. 구별된 장자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지옥자식이라고 하면서 그들이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그들이 정말 자신이 장자로서 무슨 일을 잘 해서 장자가 되었을까? 아니었다. 단지 그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과 은혜를 오직 자기를 위해서만 썼던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되어 오시어 그것을 확인하시더니, 그래도 회개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A.D.70년 이스라엘 나라를 지구상에서 없애버리고 끝내버리신다.

 

5. 나오며

  먼저 믿게 된 것 그리고 먼저 은혜받은 것에는 다 뜻이 있다. 먼저 태어나서 더 많은 특권을 누렸다면, 먼저 알아서 더 많은 것을 받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자신의 배만 채우기 위해 살아서는 아니 된다.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물질이 아까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것을 오직 나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 물질은 용도를 잘못 찾은 것이다. 그 물질이 썩어없어질 것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물질을 사용해 다른 사람을 영원한 처소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물질의 용도를 제대로 알고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다. 오늘날 나의 관심사는 무엇인가? 사람의 영혼보다 더 귀중한 것이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죽어 보면 즉시 알게 될 것이다. 맏아들은 사람의 목숨보다 재산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자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물질을 주신 것에 대한 바른 응답이 결코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데에 물질을 사용하는 것,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저 하늘나라에서 백 배 천 배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이기 때문이다.

 

2019년 2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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