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통역을 통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고전14:13~15)_2019-03-24(주일)

by 갈렙 posted Mar 24,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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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0VUkMxbUNao
날짜 2019-03-24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14:13~15(신약 280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방언, 방언통역, 방언통역의필요성,방언통역의내용,방언통역의비밀,내영기도와내마음의기도,내영과내마음의일치된기도위한방법

1. 들어가며

  오늘날에 대한민국에 있는 교인들을 가운데 약 250만명 정도가 방언을 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30년전만해도 무슨 신령한 사람이나 기도 많이 하는 사람만 방언을 하는 줄 알았는데, 사도행전에 보니 예수님을 믿고 그 영이 살아난 자에게 성령께서 부어지실 때 선물로서 방언을 말하게 한다고 나와 있다고 하자, 그때부터 누구든지 방언을 말하게 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방언을 부정하거나 방언을 못하게 하는 교회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방언은 사도시대를 끝으로 끝났다든지 아니면 신약성경기록이 완성됨과 동시에 끝났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더러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고전14장에 나오는 방언이 곧 행2장의 예루살렘교회의 방언과 같고, 그것은 또한 행10장의 고넬료가정의 방언과 같으며, 행19장의 에베소교회의 방언과 같다고 한다면(실제로 똑같은 '글로싸'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방언은 알 수 없는 언어로 형태로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방언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사람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에 아무리 들어도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통역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하는 영의 기도가 무슨 내용이며, 영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에는 영의 기도와 자신의 마음의 기도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의 영의 기도가 자신의 마음으로 기도와 일치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제대로 된 방언통역자를 만나지 못해 방언통역을 못해보았기 때문이요, 또 다른 이유들이 더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내 영의 기도(방언기도)가 내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와 일치되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를 경험과 통계를 통해서 살펴보기를 원한다.

 

2. 방언은 어떤 것이며, 누가 받을 수 있는 성령의 은사인가?

  먼저 방언이 어떤 것인지 간단히 정리해보자. 방언은 고전14:2와 고전14:14에 따르면, 거듭난 사람이 자신의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들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영의 기도다. 하지만 그것이 영의 언어인지라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가 아니라 사람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는 언어가 아닌 전혀 별개의 말이 바로 방언인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은 누가 받을 수 있는가? 방언은 믿는 자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성령의 펴적이자 은사들 중 하나다(막16:17~18, 고전12:7~10). 사실 A.D.30년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성령께서 역사하는 방식이 달라졌는데, 이전에는 성령께서 사람 위에 내려오셔서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오순절 이후에는 믿는 자들 속에 들어오시게 되었으며, 또한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위에 부어질 때에는 선물들이 동시에 주어지는데, 그것을 일컬어, "성령의 은사들"이라고 말한다. 방언의 성령의 기본적인 9가지 은사들 중의 하나다. 하지만 방언은 성령의 은사들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은사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에도 성령께서 내려오시면 나타나는 놀라운 현상들이 있었는데, 그것에는 능력, 지도력, 치유, 예언 등이 나타났지만 오순절 이후에 매우 특별한 현상이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방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구약시대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은사가 방언이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오순절 이후에 방언의 은사가 특별히 새롭게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사람의 영이 살아남으로 살아난 영이 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예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셨고 그리고 당신 대신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런데 보혜사 성령은 생명주는 영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으니(고전15:45), 성령께서 믿는 자들 속에 들어오실 때에 하나님의 생명도 가지고 들어오시게 되었다. 그러므로 없던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영 속에 더해지자 죽었던 사람의 영이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방언이다. 그러므로 방언은 오순절이후에 나타난 특별한 은사임에 틀림없다.

 

3. 방언의 은사의 단점은 무엇이며, 방언의 내용은 대체 어떤 것인가?

  그런데 방언에도 단점(?)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그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고전14:2).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통역하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했다(고전14:13). 그러나 오늘날까지 방언을 제대로 통역해주는 사람이 얼마 되지는 않는 것 같다. 방언통역은 영감으로 그 사람의 영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그 사람의 입술로 통해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고 말하게 하는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방언통역자를 통해서 수십년간의 방언을 통역했던 내용들을 분석해보면, 몇 가지 놀라운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방언은 그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크게 2가지다. 하나는 감사의 기도다. 자신이 구원받게 된 것, 지금도 주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 하나님께 쓰임받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간구와 중보하는 기도를 드린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완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자신의 가족구원을 위해 정말로 열심히 기도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의 주의 종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중보기도하며, 더 나아가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세계에 흩어져 선교하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둘째, 그런데 방언은 놀랍게도 사람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보다 성령께서 그의 영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아마도 방언의 약 80~90%가 성령께서 그의 영에게 말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성령께서 그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사람의 영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크게 2가지다. 하나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하신다.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잘 견디고 있으며, 눈물로 간구하는 모든 기도를 다 듣고 있다고 위로하며 격려하신다. 또 하나는 책망과 권고와 경고의 말씀도 하신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책망과 권고와 경고의 말씀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그만큼 방언을 말하고 있는 자라도 죄를 짓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4. 방언을 수십년간 말해도 소용없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수믿는 자들이 외적인 성령세례를 간구하여 방언의 은사를 받고 있다. 하루에 여러 시간을 그리고 수십년을 그렇게 기도해온 분들도 많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방언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들은 달라진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물음표라는 것이다. 왜 그랬런 것인가? 그것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수많은 시간을 방언으로 말했지만 방언통역을 제대로 받아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언을 받기까지는 정말 간절히 기도하며 살았었다. 하지만 아무리 방언으로 기도해봤자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으니, 방언기도도 시들해지고 어떤 분들은 방언을 그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방언을 말하게 되면 자신의 삶이 저절로 달라질 줄 알았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방언통역을 통해서 자신의 영이 무슨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지를 알고, 성령께서 자신에게 무슨 책망과 권고를 하시는지를 알아야 고칠 것은 고치고,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에 충실할 수 있을텐데, 그것을 알지 못하니 그만 신앙도 시들해지고, 더 아나가서는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은 것이 쌓이다 보면 어느날부터는 본인이 교회에서 마귀짓을 하는 것이다. 이간질시키고, 싸움붙이고, 비방하고, 목회자를 비난하며, 나중에는 목회자를 쫓아내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다 방언을 말하지 않는 사람일까? 아니다. 방언을 말해도 자신이 방언의 내용을 통역으로 알아듣고 회개할 때에 비로소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만 계속해서 말하니 그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방언을 말하고는 있지만 그 뒤 회개생활을 하지 않고있고, 구원에 보답하는 보은의 삶을 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자기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세미한 음성에 주의하면서 죄를 지적하면 즉시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준 은혜로 어떻게 보은할까를 생각하지 않고 방언만 말하는 자는 자신의 삶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이런 자들은 사실 방언을 말하지 못하거나 방언통역을 받아보지 못한 자보다 더 못하다.

 

5. 자신의 영의 기도와 자신의 마음의 기도가 일치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방언통역을 해서 방언의 내용을 들어보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정말 좋은 기도들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언기도에는 하나도 악하거나 이기적인 기도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은 자신을 아무리 미워하고 있고 핍박하고 있는 자라도 그를 용서해준다고 기도하고 있고 그를 위해 축복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방언기도라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필자도 무려 25년이상을 방언통역이 없이 방언하면서 지내왔다. 그동안 한 번도 방언을 그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언제나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와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를 해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6년전 회개의 중요성과 보은의 중요성을 알고 기도한 끝에 2년이 지나서 처음으로 방언통역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내 영이 드리는 기도나 내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나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방언통역을 받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방언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죄악상을 낱낱이 깨닫게되고 성령의 책망을 받아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하기를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로부터도 자신의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요, 회개없이는 구원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영이 드리는 기도와 자신이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일치하게 하려면 회개기도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준 은혜에 보답하는 삶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비록 방언을 통역해보지 않아도 내 영의 기도가 곧 내 마음의 기도와 동일한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나오며

  고로 방언을 말하고 있지만 자신의 삶이 달라지지 않고 있는 자는 지금 자신의 영이 드리는 기도와 자신의 마음이 드리는 기도가 같지 않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 자는 아무리 하루에 몇 시간씩, 수십년을 방언으로 기도해도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자기 안에 들어오신 성령의 책망에 순종하여 죄를 회개하는 것이 필수다. 그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어떻게 하면 보답할까 기도하면서 그 은혜를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필수다. 그런 자의 방언기도는 곧 자신의 마음의 기도가 된다. 그런 자는 방언통역도 필요없다. 왜냐하면 이미 방언통역을 통해서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을 지금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으며,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혹시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방언통역을 받아보지 않은 분이 있다면, 꼭 다만 몇 번이라고 제대로 된 방언통역을 받아보기를 바란다. 혹 방언이나 방언통역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분은 최소한 자기 안에서 책망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날마다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구원의 은총에 보은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기를 바란다. 이것도 잘 안 된다면 적어도 주일 설교시간에 회개를 촉구하는 목회자의 지도를 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야 어느날 회개의 영이 부어져서 회개함으로 내 영의 기도와 내 마음의 기도가 같은 기도를 드리는 성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9년 3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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