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본향은 진정 어디인가?(히11:8~16)_2019-09-15(주일)

by 갈렙 posted Sep 1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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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erjYoXkyhHY
날짜 2019-09-15
본문말씀 히브리서 11:8~16(신약 365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고향,본향,추석,아브라함,갈대아우르,가나안땅,외국인과나그네삶,막벨라굴,감사,베푸는삶

1. 들어가며

   고향이란 어떤 곳인가? '고향'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동구밖,수꿉장난,징검다리,진달래꽃... 그렇다. 우리에게 고향은 정겨움과 그리움과 설레임이 함께하는 추억의 공간이다. 왜 그런가? 동심의 세계에서 고향은 우리가 세상을 접한 시작이었고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흔적이 배어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향 이야기가 성경에도 등장한다. 그것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다. 이들은 본향을 향하는 순례자들로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체 어디가 고향이었을까? 그리고 본향을 향한 그들의 마음은 삶에 어떻게 투영되어 나타났을까? 우리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떤 마음 자세로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2. 아브라함의 고향은 어디였으며 그는 왜 죽기까지 자신의 고향을 찾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고향은 어디였을까? 그의 고향은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갈대아 우르였음이 틀림없다(창11:27~28). 그런데 그는 그의 나이 75세에 그곳을 떠나온 뒤 단 한 번도 그것을 찾아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창세기의 기록을 보면, 그의 아버지는 데라였고, 그의 위로 큰 형 하란과 둘째 형 나홀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셋째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본토 친척을 떠나온 뒤 단 한 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 이삭의 베필을 마련하기 위해 떠나는 늙은 종에게도 혹시 자부감이 시아버지집으로 오지 않으려고 한다 할지라도 절대 그녀를 갈대아우르로 인도하지는 말라고 명령한다(창24:6~7). 성경에는 특별히 그렇다할 이유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다만 수24:2의 말씀에 보면, 여호수가아 흩어지기 전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모아놓고 마지막 하는 말씀에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고 제시함으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셈족의 정통계보를 잇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는 사실을 알 수는 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이 자신이 태어난 갈대아 우르를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지 않았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야살의 책이다. 야살의 책에 따르면, 데라는 당시 갈대아 우르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함의 자손인 니므롯의 최고 부하 장수였다. 다시 말해, 셈의 자손이었던 데라는 셈의 계보를 잇는 정통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신들도 섬겼으니 일년 12달에 섬기는 신들을 각각 따로 정해 그들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태어나던 해에 니므롯은 하늘에 별이 떨어지면서 그 별이 다른 별들을 해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것을 해석해준 사람들에 의해 아브라함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자 데라는 그의 아들을 멀리 보내 살려낸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부터 추정 가능한 일이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때 어디로 갔느냐 하는 것이다. 그가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다 우상이라는 것을 알고 오직 천지만물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참신으로 숭배하게 된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도망가서 산 곳이 노아의 집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은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과 함께 56년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니 노아는 아버지 라멕으로부터 인류의 탄생과 범죄 그리고 제사를 통한 회복에 관해 들었을 것이고, 그것을 노아 또한 아브라함에게 그 사실들을 전해주었을 것이다. 그것도 노아의 아들 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수치상으로 볼 때, 노아는 아브라함과 58년을 같이 살았다. 그러니 셈의 자손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대적하며 우상을 섬기고 사는 함의 자손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는 비록 자신의 태어난 장소이기는 하지만 그가 자라난 곳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에게 갈대아 우르는 하나님의 배역하는 도시였고,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가 그곳을 떠난 후에 그는 두 번 다시 그곳을 방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자식들도 결코 그리로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3. 아브라함의 두 번째 고향은 어디였는가?

  이제 아브라함은 우상숭배하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을 향하여 떠나갔다. 그것은 아마도 노아와 셈이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사람은 오직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전혀 모른 채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나섰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다. 바로 그가 도착했던 그 세겜 땅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바로 그 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은 한 번도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일이 없었고, 가나안 사람들을 죽인 일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오히려 거기에서 '외국인(낯선자,이방인)'이자 '나그네(순례자,체류자)'로 살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주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는 왜 그 땅을 정복하려고 애를 쓰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가 이미 노아와 셈으로부터 우리가 영원히 사모해야할 고향은 이 세상에 있는 땅이 아니라 저 천국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가나안 땅이 자신의 기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후가고, 그가 그 땅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거나 그 땅 사람들과 전쟁을 벌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가나안 족속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에는 "나는 나그네요 이 땅에 우거하는 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마고 허락하신 가나안  땅마저도 그에게는 고향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4. 아브라함의 진정한 고향은 어디였는가?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진정한 고향은 어디였는가? 그것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들었고 하나님께서 가르쳐준 그 말씀에 있었다. 그는 이 땅의 것에 결코 집착하지 않았다. 또한 그것을 빼앗으려고 가진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가진 권력과 위치도 사용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붙잡혀간 자신의 조카 롯을 구출하는 장면을 보라. 그는 자신의 집에서 길리우고 잘 훈련된 자 318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4개국의 왕들을 쳐부었다. 사실 그는 엄청난 군사력을 소유한 자였으며, 싸움 대장이었던 것이었다(그의 아버지는 야살의 책에 의하면, 니므롯의 오른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무력을 사용해 가나안 땅을 빼앗거나 가나안 땅에 거하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아내 사래가 먼저 죽게 되자, 그녀의 매장지를 얻기 위해 그것도 헷족속의 에브론에게서 은400세겔을 주고 산 것이 그가 가진 소유의 전부다. 그는 이 땅의 것을 소유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았다. 전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강제가 빼앗지도 않았다. 합당한 돈을 주고 아내의 매장지(막벨라 굴)을 샀을 뿐이다. 왜 그랬는가?

  아브라함이 이 땅에 대한 미련을 갖지도 않고, 이 땅에 대해 집착하지도 않은 이유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진정 자신이 취해야 할 기업이 이 땅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하늘의 것으로 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놀라운 정보를 알려준다. 그것은 10절에 나와 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히11:10)"이라고 기록되어있지만, 헬라어원문에 보면, "왜냐하면 그는 설계자이시고 건축가이신 하나님, 그분의 도성을 가지고 있는 터(기초)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설계자이시고 건축가이셔서 아브라함이 장차 하늘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거주할 집을 준비해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땅에 있는 어떤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자 애쓰지 않았다. 다만 오늘과 내일,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있고, 죽으면 매장지 정도만 있으면 그에게는 족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자신의 이삭에게 전해주었고, 이삭도 그의 아들 야곱에게 전해주었다.

 

5.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무엇이었는가?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축복하신다. 첫째로, 전에는 단 한 번도 그러한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당신 자신을 남들에게 소개할 때에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일컫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것이다(히11:16a). 그리고 둘째로,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한 도시 곧 하늘에 새 예루살렘 성을 준비해놓으셨다(히11:16b). 아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없었다면, 그 도시가 하늘에 준비되지 않았을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자신의 기업이자 유일한 고향으로 생각한 사람,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이 있어서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장차 천국에 들어갈 때에 거할 도시를 얻게 된 것이다.

 

6. 아브라함에게 본향은 대체 어디였는가?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그렇게 사모했던 그 도성을 왜 히브리서 기자는 "본향"이라고 표현했을까? 그것은 본향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본향'이라는 말은 '본래의 고향' 혹은 '본디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본향이나 고향은 사실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고향이란 어떤 뜻인가?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곳을 가리키는가? 맞다. 그러나 그 단어는 그러한 뜻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단어는 그 뜻 이외에도 둘째,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으며, 셋째,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헬라어로 "본향"을 찾아보면, 그 단어는 "파트리스(patris)"다. '파트리스'는 '파트로스(patros)'에서 온 말이다. '파트로스'는 영어로 "Father"라는 단어로서,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조상, 선조'라는 뜻도 있다. 그러므로 본향에 해당하는 파트로스라는 단어의 뜻은 "자기의 아버지의 나라" 혹은 "자기 아버지의 땅"을 가리킨다. 그렇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 땅은 하늘에 있는 것이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큰 도성을 준비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하늘에 도성을 마련해 주셨다.

 

7. 나오며

  그렇다. 아브라함에게 본향은 갈대아 우르도 아니었고, 이삭과 야곱에게 본향은 가나안 땅도 아니었다. 그들이 사모했던 고향은 하늘에 준비된 것으로, 천국의 새 예루살렘 성이었다. 그들은 항상 그곳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 것을 사모하면서 이 세상의 길을 걸어갔다. 그러한 시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생애를 바라보라. 그들은 늘 남을 위해 양보하며 베푸는 삶을 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자신에게 권력이라도 쥐어주면 그것을 이용해 남의 것을 착취하고 빼앗고 취득하기 위해 온갖 교활한 방법을 사용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을 이용해 온갖 비리도 편법을 통해 저지르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을 꼭 불신자들의 행태라고만 말할 수 없다. 어느새부턴가 교회에서도 이 세상의 물질의 풍성함이 성공과 복의 기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큰 일이다. 우리는 다만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갈 나그네요 순례자일 뿐인데, 이곳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행한다. 그러지 말라. 우리도 늙어져서 80~90세가 되면 이 세상의 권력과 물질이 아무것도 아닌 부질없는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풀어서 베풀고 섬기는 데 사용하라.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베푼 은혜에 감사하겠다는 자들에게 참된 복음을 전해주라. 그것이 나그네요 순례자인 우리 길이 아니겠는가!

 

2019년 9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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