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은혜에 내 한 목숨 주님께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눅17:11~19)_2019-10-20(주일)

by 갈렙 posted Oct 2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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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yAvUhNzfp7U
날짜 2019-10-20
본문말씀 누가복음 17:11~19(신약 125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감사의정의,감사할3가지이유,감사하는4가지방법,하나님께영광,복을인침,축복의씨앗,영원한상급,영원한영광

1. 들어가며

  오늘 본문(눅17:11~19)에 보면, 예수께서 열 명의 나병환(문둥병자)를 치료해주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그들 모두가 기적적으로 나병에서 순간 고침받게 된다. 그런데 나았단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에서 오직 한 명만이 예수께 돌아와 엎드려 절하고 감사를 드린다. 그렇다면 왜 나머지 9명은 감사하기 위해 예수께 나가아지 않은 것일까? 예수께 나아가서 절하거나 감사를 표현하게 되면, 안 되는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자신의 믿음으로 나은 것이니 굳이 주께 감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인가? 아니면 가서 제사장들에게 자기의 몸을 보여주고 나병에서 깨끗히 치료받았다고 확증을 받은 후에 돌아와서 예수께 감사하려고 했던 것인가? 그런데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에 의하면, 나병환자들이 병에서 고침받은 후 예수께로 돌아와서 감사하지 않은 것에 대한 예수님의 아쉬움이 짙게 묻어 있다. 대체 감사란 무엇이며, 왜 사람들은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제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진짜 감사의 의미와 감사의 의의 그리고 감사의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2. 오늘날 왜 개신교인들은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는가?

  우리는 구약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특히 예수믿는 대한민국 성도들은 율법을 규정대로 지켜야 하는 유대인들도 아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은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사실 미국의 "추수감사절"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것의 원조는 유대인들의 "수장절"이다. 수장절은 유대인들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수장절을 지켜야 했던 것인가?

  유대인들에게는 크게 2가지 종류의 절기가 있었다. 하나는 창조의 은총에 감사하는 절기가 있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 농사한 것을 가지고 감사하는 절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절기에는 "초실절", "맥추절(칠칠절)", "수장절"이 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절기 있었으니 그것은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는 절기다. 그러한 절기에는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나팔절, 초막절, 속죄일" 등이 있다. 이것은 곡식을 심고 그것을 거둬들이는 시기에 맞추어진 절기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창조의 절기와 구속의 절기 가운데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절기를 창조의 은총에서 그리고 구속의 은총의 절기에서 다르게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 "오순절"이라는 절기는 구속의 은총의 절기이지만 동시에 창조의 은총의 절기에서는 "칠칠절" 혹은 "맥추절"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초막절"도 구속의 은총의 절기에서 부르는 명칭이라면, 똑같은 날을 창조의 은총의 절기에서는 "수장절"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초막절"이면서 "수장절"인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오늘날 개신교에서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은 밭농사나 논농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수장절"인 것이요,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의 생활에 익숙한 자는 구속의 은총에 감사하는 "초막절"로 지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추수감사절"은 감사의 절기로서 그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3. 사람은 왜 감사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의 가족 중 한 사람이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해보자. 반신불수가 되어, 일평생 누가 간호해야 할 사람이 되었다고 치자. 얼마나 괴롭겠는가? 과연 누가그의 모든 뒷바라지를 할 수 있겠는가?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오래 살기도 하는데, 그가 살아야 할 30~40년을 누가 과연 병수발해주겠는가? 그런데 어느날 감쪽같이 뇌기능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어, 혼자서 숟가락질도 할 수 있게 되고, 걸어서 화장실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치자. 본인 뿐만 아니라 가족이 또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내가 오늘 기계의 도움이 그냥 혼자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것만해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간은 참으로 간사한 것 같다. 눅18장에서 주께서 어떤 부자청년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자신의 전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했는데, 사실 우리들 중 누가 자신의 전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또한 눅17장에서 삭개오는 자신의 집에 방문해준 주님이 감사해서 그분을 위해 잔치를 배설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있었며,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를 갚겠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중 누가 우리가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알고 감사해서 자신의 전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는가? 사실 우리들은 지옥에 떨어졌어야 마땅할 영혼들이지 아니한가? 그리고 사실 우리가 영생 얻기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구원얻은 것에 대해 감사한 것이 얼마나 되는가? 사람이 뇌출혈로 쓰러져서 몸의 기능이 망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된다면 감사하는데,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받았는데도 우리는 또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감사의 조건들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아니한지 돌아보아야 한다.

 

4. 왜 9명의 나병환자는 병고침을 받았는데도 예수님께 감사하러 가지 않았는가?

  이제 오늘 본문 말씀(눅17:11~19)을 보자. 여기에는 나병환자 10명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이 어느날 자기의 동네를 지나가자, 이내 멀리서 소리쳐 부른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것도 연거푸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들은 상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그들은 지나가는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죽은 자를 살리며 나면서 못 걷는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선생님이여"라고 불렀는데, 그 의미는 우리말성경처럼 "교사"가 아니라 "만물의 주관자"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속성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인자가 풍부하고 은혜와 긍휼이 많은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의 외침을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고, 주님은 그들에게 한 가지를 명했다. 그것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시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순종했고 길을 가다가 병고침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한 명의 나병환자는 즉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돌렸고 뒤돌더니 예수님께 도로 가서는 그분 앞에 엎드리면서 절하면서 그분에게 감사하기를 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은 바로 사마리아 나병환자였다. 그렇다면 나머지 9명의 나병환자는 유대인이라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나머지 유대인 나병환자는 예수께로 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후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에 의하면 그들은 다시 돌아와 예수께 감사를 했어야 했던 자들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중대한 것을 놓치고 만 것이다. 감사하지 않는다면 문제될 것이야 없겠지만 그 뒤에 있을 축복을 그들은 전혀 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5. 감사를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9명의 나병환자는 무엇을 놓쳐버리고 말았는가?

  그렇다. 9명의 나병환자들은 그만 돌아와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는 4가지 축복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그 축복이란 어떤 것인가?

  첫째,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돌릴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사실 사람이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돌리게 될 일이 많지는 않다.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즉시 병이 낫게 되자 즉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하셨다는 깨달을 때에 즉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감사는 하나님의 영광돌리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을 인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만약 9명의 나병환자들이 자신이 받았던 복을 알고 감사했더라면 그들이 받은 병고침은 한 없이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놓침으로 기적은 한 번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감사는 받은 은혜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인치는 작업인 것이다.

  셋째, 그들은 이미 받은 은혜 외에 또 계속해서 받을 수 있는 복의 은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사마리아 나병환자가 주님께 돌아가 감사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네 믿음을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병고침 이외에 다른 더 큰 축복을 받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 감사는 더 큰 축복을 가져오게 하는 통로인 셈이다.

 넷째, 만약 그들이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곳에서 받을 상급을 놓치고 말았다. 천국에 가면 공짜는 없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 한 마디, 기도 한 조각도 천국에 가면 우리에게 상급이 되어 내게 돌아온다. 그들은 천국에서 받을 상급받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6. 우리는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감사할 기회가 주어지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는가?

  첫째, 감사하고는 싶으나 드릴 것이 없는 경우가 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나병환자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다. 사마리아 나병환자는 나병환자가 되어 동네에서 떨어져서 거지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주님께 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감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돌아가 엎드려 경배하며 감사했을 것이다. 그렇다. 이러한 경우에는 온 마음과 정성을 주님께 드리면 된다. 마음을 다해 주님께 찬양을 드리고 그분께 엎드려 경배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신다.

  둘째, 무엇인가를 드릴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만약 농부가 되어 추수한 곡식이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면 된다. 도시에 있어 셀러리맨이라고 하면 자신의 수입으로 감사하면 될 것이다. 마26장에 보면, 값비싼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드린 여인이 나온다. 제자들은 그것을 낭비라고 말했다. 그것을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더 나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 여인이 잘한 일이라고 칭찬해주셨다. 주님께 드리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큰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낭비가 아니며, 값지고 귀한 것이다.

  셋째, 드릴 것이 없지만 자신의 몸이나 혹은 은사와 달란트가 있는 경우다. 드릴 것이 없지만 주님의 몸된 교회에 몸으로 봉사하는 것도 감사를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 그리고 은사와 달란트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드리는 것오 일종의 감사의 표현방법이다. 다만 드리는 것이 물질이 아닐 뿐이다.

  넷째, 이것은 드릴 것은 없으나 드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여 자기자신의 생애 자체를 주께 드리는 경우다. 받은 은혜가 너무나 커서 드리고는 싶으나 현재의 형편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가진 물질도 없고 은사와 달란트도 없다. 그렇다고 주님께 드리고픈 마음은 간절할 때 어떤 이는 자신의 전 생애를 주께 바쳐버린다. 주님이 쓰시려할 때에 나귀가 되어드리겠다고 서원하는 것이다. 나와 같은 경우는 25살 청년의 시절에 그랬다.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가진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은사와 달란트도 없었다. 하지만 내 몸은 드릴 수 있지 아니할까 생각했다. 그래서 주님께 헌금봉투에 내 몸을 드린다고 바쳐버렸다.

 

7. 나오며

  감사란 무엇인가? 감사란 받은 은혜에 보은하는 것이다. 감사는 받은 은혜를 완전히 내 것으로 인치는 거룩한 행위이다. 감사란 은혜 위에 또한 은혜가 이어지도록 축복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아홉명의 나병환자는 그날 이러한 중대한 축복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는 받은 은혜가 없는데도 바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바칠 없이 없는데 빚을 내서라도 바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칠 것이 없을 때에는 우리의 소중한 마음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성껏 물질을 준비하면 그 물질을 기쁘게 받으신다. 혹 바칠 것이 없이 자기자신을 바칠 때에는 그 사람을 당신의 가슴 속에 심어놓으신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는 복된 자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자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 영적인 인침과 놀라운 기적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감사는 놀라운 축복의 통로이니까.

 

2019년 10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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