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눅13:22~30)_2019-11-10(주일)

by 갈렙 posted Nov 1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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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8bMMkk8ieXQ
날짜 2019-11-10
본문말씀 누가복음 13:22~30(신약 118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성경적인구원관,예수께서들려주신구원관,한번구원영원한구원,구원탈락가능성,좁은문좁은길구원,판단기준

구원의 길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좁은 문을 따라서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단지 믿기만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길을 가려면 믿음이 필요하고 그 길을 가려면 인내도 필요하다. 그 길을 가려면 남들로부터 비난과 죽음까지도 감내해야 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는 것처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겸손히 고백하는 것이 요청된다. 오늘 말씀을 깊게 들여보다 보라. 이것이 바로 좁은 문이자 좁은 길의 2대 요건이다.

 

1. 들어가며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인가? 만약 사람이 구원을 얻는데에 인간편에서 아무것도 해야 할 것이 없다면 왜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그토록 힘쓰라고 말씀하신 것일까?(눅13:24) 저마다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종류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전하는 자는 자신의 제시한 구원론이 성경을 벗어나 있는지 잘 살펴야 한다. 만약 누군가 잘못된 구원관을 전하여 그 메시지를 듣는 자들 중에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말씀을 전한 자도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 중에 구원받을 사람이 적다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은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안전한 것이며,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은 것이며, 구원받은 자는 구원에서 탈락되는 일이 없는지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보고자 한다. 예수께서는 구원에 관하여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2.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것인가?

  어느 목회자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것이며, 한 번 얻은 구원은 잃어버릴 수 없다고 강변한다. 물론 그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반대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하지 않으며, 한 번 얻은 구원이라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말씀이 무엇이며, 진짜 그것이 확실한지는 살펴보아야 한다.

  "한 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고 주장하시는 분에게 있어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있다면, 그것은 요10:28의 말씀일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그래서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영생을 주시면 그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고 나와 있지 않으냐? 그러므로 사람이 한 번 구원얻으면 잃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설령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천국에 데려가시기 위해 회개를 시키시는데 말을 듣지 아니하면 징계의 채찍을 대서라도 그를 천국에 데려가신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에서 탈락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누가 그 영생을 받게 되는지에 관하여 살펴보보면 자신이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이 영생을 주실 자들은 "그들"이다. 그럼, 그 본문에서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바로 앞구절에 나와 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10:27)" 그것은 "주님의 양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를 주님의 양이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3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어야 한다. 둘째는 주님께서 그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내가 아는 것이 아니다. 셋째, 그분이 주님을 따르고 있어야 한다. 모두가 다 현재형이다. 지금 현재 상태가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고로,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보면 우리는 누가 영생을 얻지 못하며 어떤 자가 영원한 구원에서 탈락될 수도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첫째는 지금 현재 주님의 음성(말씀)을 듣고 있지 않는 자다. 둘째는 우리는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고"고 하는 자다. 셋째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주님의 뒤를 지금도 따라가지 않는 자다. 이런 자는 주님의 양이 될 수 없으므로, 그런 자에게 영생은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3. 모든 구원의 판단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러므로 모든 구원의 판단기준은 주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과연 어떻게 말씀하셨는지가 제일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으로부터 신앙을 이어받은 사도들은 과연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만약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예수께서 드려주신 말씀과 사도들이 들려준 말씀이 충돌한다면(그럴 리가 없겠지만), 우리는 사도들의 말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구원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유명한 설교자나 신학자나 교수가 말했다고 해서 그것을 쉽게 따라가면 아니 된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논리나 주장을 먼저 던져놓고는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한 구절씩만 쏙 뽑아서 사용하는 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잘못된 해석자이나 이단에 속한 사람일 확률이 매우 높다. 우리는 성경말씀 자체와 성경말씀의 문맥에서 그 의미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구원에 관한 말씀도 그렇다.

 

4. 왜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을까?

  그런데 구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진짜 말씀하고 있는 바를 놓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분에게 있어서 산상수훈의 말씀은 상당히 골치거리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지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하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분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율법을 다 지켜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도 없으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거꾸로 해석해야 한다고 한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그렇게 살아보고자 애쓰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믿기만하여 구원을 얻는 것을 알고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식이다. 진짜 그런가? 그러나 정작 이분은 "아버지의 뜻"의 의미를 "율법의 행위"로 해석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들을 보고 그분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뜻"을 율법을 온전히 다 지키는 것으로 해석하여,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더욱이 산상수훈에 나오는 좁은 길 구원에 관한 말씀에 있어서는 더더욱 이상한 해석을 내놓는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지 말라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눅13:24의 말씀을 가져다 쓴다. 그리고 눅13:24의 말씀은 잘못 번역된 것이며, 이 말씀에 대한 헬라어원문은 정반대로서,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고 항변한다.

 

1)눅13:24의 말씀은 반어법적인 표현인가? 아니면 사실적인 표현인가?

  그렇다면, 눅13:24의 말씀은 반어법적인 표현인가? 아니면 사실적인 표현인가? 먼저,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를 개역개정성경으로 살펴보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이 말씀이 곤혹스럽다. 왜냐하면 구원받기 위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힘쓰라"에 대한 헬라어는 "아고니조마이'인데, 이 단어는 "분투적으로 힘쓰다. 싸우다. 쟁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은 이것을 정반대로 뒤집는다. 즉 이 말씀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노력해야 겨우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는 한 사람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반어법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많은데, 이 말씀도 그러한 말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헬라어를 직역한 킹제임스성경에도 이 말씀은 개역개정성경말씀과 반대로 번역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2)눅13:24의 헬라어문장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헬라어문장으로 눅13:24의 말씀은 어떻게 되어있고, 킹제임스번역본은 이 말씀을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가?

눅13,24 헬라어원문.jpg

  헬라어원문에 의하면, 눅13:24의 말씀은 이렇다. "너희는 계속해서 분투적으로 힘쓰라. 좁은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도록.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자들이 들어가기를 장차 찾을 것이다. 그러나 장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을 킹제임스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자들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능히 들어가지 못하리라(눅13:24)" 여러분은 이 번역본의 차이를 알고 있는가? 헬라어원문의 뜻은 이렇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좁은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그러면 많은 자들이 아니겠지만 몇몇이라도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킹제임스는 정반대다. "많은 자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구하겠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맞는 것인가? 결론적으로 킹제임스가 번역을 잘못한 것이다.

  그런데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요 믿기만 하면 다 구원받는다는 분은 이 본문이 킹제임스번역본이 훨씬 더 헬라어원문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고 말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투쟁하라.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절대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번역을 정말 잘못한 것이다. 헬라어의 어디에 "절대로"라는 말이 들어있는가? "할 수 없다(be able to)"는 동사에 반대를  뜻하는 부정어 "우크(not)"만 붙어 있을 뿐이다. 이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시제가 "직설법 미래 능동태"다. 그러므로 "장차 할 수 없을 것이다"는 뜻이다. 만약 부정을 강조하기 위한 "절대부정"의 문장을 만들려고 했다면, "우 메"라는 부정 부사어 2개를 사용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할 수 없다는 부정문장이다.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절대부정 문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눅13:24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너희는 좁은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도록 계속해서 분투적으로 힘쓰라.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자들이 들어가기를 장차 구할 것이다. 그러나 장차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할 수 없다"는 문장은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찾을(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구원의 문이 닫혀버리면 들어가기 위해 문을 찾는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구하다"는 동사와 "할 수 없다"는 동사가 대등접속사인 "카이"를 두고서 양쪽에서 둘다 "직설법 미래 능동태" 문장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뒷문장에서 생략된 단어는 "제테오(찾다. 구하다)"인 것이지, "에이스에르코마이(들어가다)"라는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한 번 구원 영원한 구원을 주장하는 분은 구원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요 절대 주권자인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는 것인데,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하는 것은 아무 쓸모없는 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에게 있어서 눅13:24의 말씀이 대단히 거북스러운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우리더러 구원얻기 위해서는 좁은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기를 분투적으로 힘쓰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3)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준 말씀처럼, 비록 구원의 문이 좁은 문이라 할지라도, 그 문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와 방법은 조금 후에 다룰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니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만큼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던져주는 구원을 "아나 받으라"고 했을 때, 턱 받으면 그때 바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구원의 방법을 붙들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사는 자들의 대부분은 그것을 붙들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넓은 길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심판의 때가 찾아오면 구원받기 위해 그들 모두가 구원의 문 앞으로 달려나올 것이다. 그리고는 문을 열어달라고 문지기에게 외칠 것이다. "주여,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 하지만 문지기는 열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날 그토록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지만 그들이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당신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당신은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주님을 알았었다고 항변한다. 그런데 왜 외면하느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님의 답변은 동일하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나를 떠나가라"

  예수님의 이 비유의 말씀은 자신은 응당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가 그날에 버림받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저런 자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가 오히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은 내쫓겨나고 다른 사람이 천국잔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업자득이다. 그는 예수께서 그토록 구원받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알려주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자신은 예수님과 혈통적으로 그리고 민족적으로 같으니 그들은 긍휼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예수님 앞에서 식사를 했다고 하며, 주님이 가르치시는 현장에 있었다고 하니, 그래도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려고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주님은 적당히 발을 내밀어 넣는 것으로 천국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으실 것이다. 왜 그런지는 누가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받는지에 관한 말씀 속에서 찾아보자.

 

5. 그렇다면 누가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누가 과연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가? 주님께서는 좁은 문을 통과하여 들어가서 구원받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구원받은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러한 사례를 말씀해주셨다. 그것이 바로 28~29절의 말씀이다. 여기서 주님은 첫째,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는 누구든지 다 참여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혈통적인 조건을 가진 자만이 구원의 경주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얼마든지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유대인의 대표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선지자들"을 언급하셨으며, 이방인으로서는 "동서남북으로부터 들어오는 사람들"을 언급하셨다. 그리고 둘째, 좁은 문을 통과하여 구원받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유대인의 예를 통해서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믿음"과 그리고 "회개"를 통한 구원의 방법이다. 먼저, 여기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따라다가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과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약속했지만, 그들은 사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누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천국도 본 일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믿는다. 이것이 바로 믿음을 통한 구원이다. 그것이 첫번째의 좁은 문이자 좁은 길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 "선지자들"은 누구를 예표하는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딱 2가지 사역을 했다. 장차 구원자로 오실 메시야가 누군지를 예언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해서는 메시야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라 즉 회개하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좁은 길의 두번째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실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걸어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끝까지 붙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간에 환난과 핍박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 잠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거나 주님을 떠나도 되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좁은 길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주님이 구원자인 것을 내려놓거나 포기해서는 아니 된다. 목이 칼이 들어와도 말이다. 이것이 첫번째 좁은 길이다.

  그리고 두번째 좁은 길은 날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면서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사실 누가복음 전체는 회개복음서다. 왜냐하면 회개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5장에는 고기잡이의 기적 중에 베드로의 고백이 나온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누가복음 15장에는 돌아온 탕자의 회개가 나온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에는 음부에 떨어져 불꽃 가운데서 고통받는 부자가 나온다. 하지만 이미 죽은 후에 회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기회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18장에는 바리새인와 세리의 기도 가운데 세리의 회개기도가 나온다. 세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한 채 다만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고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9장에는 회개를 실천하고 있는 삭개오가 나온다. 그리고 누가복음 23장에서는 회개하는 한편 강도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누가복음 24장에서는 죄사함을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 전파될 것이라고 나온다. 그렇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죄인이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 구원받게 하려고 오신 것이다. 누가복음 13장의 말씀처럼, 실로암 망대에 치어죽은 열여덟사람이 죄가 많아서 아니라,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두번째 좁은 길은 자신의 죄를 시인하면서 회개하는 것을 가리킨다.

 

6. 나오며

  예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는 방법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때 그것을 붙들어야지 그것을 뒤로 미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뒤늦게 깨닫고 주님께 찾아와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지만 주님은 그때 거절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평소 때 넓은 길을 가다가 이제 심판하려고 하니 좁은 길을 가겠다고 하는 자들을 더이상 받아주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대부분 어느날 주님이 누군지를 문득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분이 그분이 나를 위해 모진 고통을 감내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음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내가 좀 힘들라고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주님 때문에 고난받는다고 해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주님을 부인해서는 아니 된다. 목숨이 끊어지는 그날까지 말이다. 이것이 첫번째 좁은 길이다. 그리고 두번째 좁은 길이 있다. 그것은 겸손이다.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 자신의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하여 겸손히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죽는 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의 삶을 지속하려면 겸손이 필요하다. 겸손한 자가 회개하며, 회개하는 자가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좁은 길이다. 그러므로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내가 어떤 선행이나 공로를 쌓아서 구원을 쟁취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고 어떠한 어려움에 처한다고 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며, 날마다 주님앞에 겸손히 회개하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19년 11월 10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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