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를 기념하는데 왜 예수님은 되고 죽은 자들은 안 되는가(고전11:23~26)_2019-11-17(주일)

by 갈렙 posted Nov 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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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gBUS4E9McnM
날짜 2019-11-17
본문말씀 고린도전서 11:23~26(신약 276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종교의3대표지,제의 신화 에토스,성만찬,유교의제사,이무영성도,한국교회의눈부신성장,성장의뒷면,추도예배,그리스도인의저주의근본원인

죽은 자를 기념하는데 왜 예수님은 되고 죽은 조상들은 안 되는가? 잘못 생각하게 되면 기독교인들은 자기네 것만 소중하게 여기고 타 종교의 것은 무시하는 종교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에서는 그렇게 극구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했다가는 불효자식이라는 말을 들을까봐, 제사제도를 변형시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죽은 자를 위해 제사를 드리거나 예배하고 하거나 했다는 기록이 없다. 과연 믿는 사람들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를 드려도 괜찮은 것인가?

 

1. 들어가며

  "성만찬"이란 예수께서 인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피흘려 죽으신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수께서 친히 제정하신 기념의식을 가리킨다. 이를 두고 사회문화 학자들은 "제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독교가 대체 무엇인가하고 묻는 이들에게 이 예식을 한 번만 보여주면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제의"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는 그것이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성만찬이요 또 하나는 세례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성만찬을 간단하게 요약해 본다면, 이것도 죽은 자를 기념하는 의식이 아닌가? 그런데 유교에서도 죽은 자를 기념하는 의식을 행한다.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이다. 바로 "조상제사"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성만찬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교의 조상제사와 같은 제의의 하나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되고 우리의 죽은 조상은 되지 않는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똑같은 죽은 자를 기념하는 의식인데 왜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은 괜찮고 유교에서 행하는 조상제사는 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록 하자.

 

2. 한국교회의 눈부신 발전과 성장의 때는 언제였는가?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후 가장 부흥하고 발전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1970년후반과 1980년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대한민국의 모든 동네마다 단골네(무당, 점쟁이)가 있었으나 그 시절에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섬에 따라 단골네(무당,점쟁이)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90년대를 기점으로 하여 기독교도 조금씩 쇠퇴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대를 넘어서 기독교는 답보상태에 빠져있다. 그렇다면 왜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까지 교회가 성장하고 전도가 잘 된 것일까?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조상제사의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었다. 성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것은 바로 조상제사를 대신하여 추도예배를 교회가 수용한 것이다. 조상제사를 안 드리자니 불효막심한 자라는 말을 들을 것 같고, 드리자니 우상숭배를 하는 것 같으니, 조상제사를 예배의 형태를 바꾸어 죽은 조상의 제삿날에 추도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것은 유교와 기독교간의 제의의 충돌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각종 선교단체와 교회가 열렬하게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가 엄청난 성장을 이룬 것이다.

 

3. 한국교회의 쇠퇴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쇠퇴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2가지다. 첫째, 믿음을 강조했지만 회개를 가르치지 않아 기독교의 윤리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고 구원도 받고, 복도 받아 부자가 되고 잘 살 수 있다는 말에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책임도 있었지만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는 것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자만 되면 곧 복을 받을 것이라는 도식이 성립하게 되었고,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부자가 되면 부정부패까지도 눈감아 준 것이 바로 한국기독교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불신자들은 기독교인의 윤리의식을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기독교의 혼합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우상숭배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라는 형식을 빌어 유교의 조상제사를 추도예배라는 형식으로 들여온 것 때문이다. 성경은 죽은 자에게 절대 제사하지 말 것이며, 심지어 죽은 자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죽은 조상을 섬기는 일을 추도예배로 변형시켜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 댓가를 지금 처절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4.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교회에 들어온 결과는 어떠했는가?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는 처음에는 감리교회에서 받아들여졌다. 그것이 1930년대의 일이다. 그리고 이어서 구세군과 성결교가 받아들였다. 그것은 1950년대의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로교가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왜냐하면 죽은 조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전도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상제사 대신에 추도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양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현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도 여전히 불치병이나 중한 질병에 시달리는 자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녀들 중에 귀신에 시달려 고통받는 이들도 있으며, 환경 때문에 늘 눌려 사는 사람이 많고, 우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성경 갈3:13에서는 예수께서 율법의 저주를 속량하셨다고 나와 있는데, 왜 성도들은 저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교회가 수용한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변형된 우상숭배였기 때문이다. 추도예배는 죽은 자의 제삿날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죽은 자를 추모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는 단 한 번도 죽은 자를 추모하며 예배하라는 말씀이 없다. 죽은 자 때문에 슬퍼한 일은 있어도 죽은 자 때문에 제사를 드리거나 예배를 드리라는 말씀도 없고 또한 드린 적이 없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죽은 모세의 시체를 감추어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시신을 놓고 우상숭배행위를 할 것 같으니까, 하나님께서 아예 시체를 치워버린 것이다. 그런데 죽은 조상의 기일에 제사대신에 추도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저주가 성도의 가정과 삶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5. 사도바울은 왜 이방인들에게 제사드리는 행위를 금지시켰는가?

  사도바울은 A.D.55년경,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편지 한 통을 써 보낸다. 그것이 고린도전서다. 이 편지에는 무려 4장(8장~11장)에 걸쳐 우상숭배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이방인에게 있어서 그 문제만큼 심각한 문제는 더이상 없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니 절대 제사드리지 말라고 하였다. 그것이 우상숭배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즉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림으로 우상과 교제하게 되면, 하나님의 분노만 가져올 것이라는 것이 사도바울의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은 비록 예수믿고 세례까지 받기는 했지만, 끝내 죽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내려놓지를 못했다. 1970년대 이후에는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어느새 당연한 기독교 의식으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예수님과 성경은 죽은 자에 대해 기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특히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체가] 죽은 자들은 자기의 [영이]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예수님을 비롯한 사도들은 철저히 우상숭배행위를 금지했던 것이다.

 

6. 사도바울은 왜 죽은 자에 대한 제사를 하지 말라고 하면서, 죽은 예수님에 대한 기념은 하라고 했는가?

  그러면 불신자들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기독교는 자기네 제의는 그렇게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왜 남의 종교의 제의는 그렇게 망치려드느냐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대답해야 하는가? 그런데 알고 보면 참으로 간단한 것이 이 질문의 대답이다. 왜냐하면, 죽은 조상은 제삿날에 결코 오지 못하지만, 예수께서는 성찬식 때에 얼마든지 오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왜 그런가? 죽은 우리의 조상은 피조물로서 사람이며, 예수님은 사람이었던 적이 있기는 했으나 그분은 사람이 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리고 죽고 부활한 이후에도 역시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은 공생애기간에 33년반의 삶동안만 육체를 취하신 것뿐이지, 그분은 원래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이 비록 육체를 입고 오셨다고 할지라도 그분은 동시에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분이 인류구원을 위해 속죄사역을 완성하고는 다시 하늘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때 이후 줄곧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다(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표현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님은 재림 전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는 줄로만 알고 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표현은 단지 시110:1에서 가져온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아직까지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성육신 이전이나(요16:28) 성육신 이후나 하나님으로 계신다(계7:17,22:1,3).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핵심은 무소부재하시고 동시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어디에나 편재해 계시며, 또한 동시에 여럿으로 존재가 가능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동정녀마리아의 태를 빌려 이 세상에 태어났어도 그분은 여전히 동시에 하늘에도 계시고 이 세상에 계셨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만찬에 참여할 때면, 주님께서는 영으로 그 자리에 오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얼마든지 성령으로 임재하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찬식을 많이 참여하여,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한다고 할지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죽은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은 다르다. 죽은 조상은 유한한 피조물이기에, 죽은 다음에는 자신의 생각대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할 수 없는 존재다. 즉 이승과 저승을 왔다갔다 할 수가 없는 존재가 죽은 후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생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아무리 죽은 조상에게 음식을 차려놓고 술을 따라놓고, 거기에 절을 한다 할지라도 죽은 조상들이 와서 그 제사를 받지 못한다. 한 번 죽으면 심판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고, 심판 후에는 영생과 영벌로 갈라져서 영원히 그곳에 가서 거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죽은 사람은 자신이 한 번 들어간 장소에서 나오지 못한다. 제사를 받으려고 이 세상으로 나올 수가 결코 없는 것이다. 그렇다. 죽은 조상은 어느 누구도 무소부재한 상태에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동시존재도 안 된다. 그러므로 후손들이 아무리 죽은 조상에게 잘 음식을 잘 차려놓아도 그 음식을 먹을 수다 없으며, 후손에게 복을 줄 수도 없는 것이다.

 

7. 죽은 자에게 제사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므로 죽은 자에게 제사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식 제의에 익숙한 사람들은 여전히 죽은 조상이 올 줄로 알고서, 죽은 자에게 복을 달라고 제사를 드린다. 그것도 한 번 정도로 끝마치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해마다 기일이 되면 죽은 조상에게 제사드리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제사드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귀신들이 그곳으로 몰려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군가로부터 경배를 받고 싶어하고 높이여김을 받고 싶어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늘에서 쫓겨날 때 그들은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들(귀신들이 되었다)은 한 마디로 "저주받은 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이 자기의 죽은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면, 결국 귀신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모습으로 나타나 제사를 받는다. 그래서 영안이 좀 열린 가족이 있다면, 죽은 조상이 왔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이제 귀신들은 너무나 쉽고 간편하게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고 섬김을 받게 된다. 그러다가 그중 누구에게 들어가게 되면 영원히 그 사람 속에서 터를 잡고 살아갈 수도 있다. 죽은 조상이 올 수 없기에 가짜 죽은 조상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가변이(변화가) 가능한 귀신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귀신이라 할지라도 죽은 조상의 모습을 완벽하게 흉내낼 수는 없다.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비롯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고 해서 자기의 죽은 조상이라고 믿지 말고,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귀신이 어설프게 변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귀신에게 속지 말라.

 

8. 나오며

  왜 기독교에서 조상제사를 금지시키는 것인가? 그것은 기독교가 유교에 비해 우월하니까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조상제사라는 것이 저주와 귀신을 불러들이는 합법적인 의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교회에서 추도예배라는 형식으로 쓸쩍 가져다가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가 어느시기에 기독교예식서에 추도예배와 장례예배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아니다. 추도예배와 장례예배는 변형된 제사의식에 해당한다. 대상과 종교의 형식만 바꾼 것 뿐이다. 신구약 성경을 동틀어, 단 한 번이라도 죽은 자에게 제사하라든지 죽은 자에게 음식을 바쳤다고 한 기록이 있는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차 잘못하면 우상숭배인 조상숭배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도 죽은 조상의 기일에 맞처 추도예배나 죽은 자들에 대한 장례예배를 드리게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징계가 쏟아지는 것이다. 추도예배나 장례예배가 변형된 우상숭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여전히 똑같이 불치병이나 중한 질병에 걸리게 되고, 자녀들이 귀신에 시달리며, 가족에게 온갖 사건사고와 우환과 환란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살아계셔서 언제라도 부르기만 하면 즉시 오실 수 있는 예수님만을 신적 존재로 알고 섬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분을 맞이하는 성만찬은 아무리 해도 괜찮은 것이다. 무소부재하시고 동시존재가 가능하신 그분이 그 순간에 영으로 임재하실테니 말이다.

 

2019년 11월 17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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