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이 땅의 참 성막의 대제사장이셨다(히8:1~6)_2020-03-15(주일)

by 갈렙 posted Mar 1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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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qvpQFt199e0
날짜 2020-03-15
본문말씀 히브리서 8:1~6(신약 340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속죄제사,참성막,참속죄제물,참대제사장,모형과그림자,본체와참형상,골고다언덕,십자가사건,둘째휘장,하늘성소,예수님의죽음과부활

예수께서는 누구신가? 히브리서는 예표론적성경해석방법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수님은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도 아니었다. 그리고 성전에서 죽으신 것도 아니었다. 그분은 단지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에서 버려진 채 죽임을 당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예수님은 나의 구주로 믿고 따르는가? 대체 그날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히브리서만이 들려주는 놀라운 속죄제사의 비밀, 우리는 지금 거기에 가보려고 한다.

 

[ https://tv.naver.com/v/12877650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1. 들어가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믿는 자들이다. 즉 예수께서 2천년전에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을 인류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대속의 사건이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에 의하면, 속죄일제사는 성전에서 대제사장이 집례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아뱌(요11:49)에 의해 성전에서 죽은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하나의 모형에 불과할 뿐, 진짜는 하늘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속죄사역을 한 것으로는 안 되고 죽고 부활한 후에 승천하셔서 하늘의 성소에서 제사를 다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진술이 맞는 진술인가?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골고다언덕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사건이 과연 인류를 위한 구속사건이었으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믿는 자가 받게 되는 혜택은 과연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인류의 구원을 위해 대속죄일 제사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구약성경 레위기 16장을 보면, 인류 구원을 위한 속죄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가 나온다. 거기에는 속죄제사를 드려 죄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3가지가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다. 첫째는 제사드리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그곳은 물론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선택하신 장소 곧 성막(성전)이 있는 곳이라야 한다. 아무데서나 제사를 드린다고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둘째는 제사에 사용될 속죄제물이 있어야 한다. 특히 죄인을 대신하여 죽을 흠없는 속죄제물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제사를 드려줄 제사장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속죄일 제사에는 그냥 제사장이 아니라 대제사장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골고다언덕에서 드린 속죄제사는 과연 대제사장이 인류를 구원할 대속죄일 제사를 드린 것이었을까? 그리고 오늘은 이 3가지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보도록 하자.

 

3. 예수님은 과연 성전(성막)에서 돌아가셨는가?

  우선 예수께서 인류구원을 위한 속죄제물로 죽으시려면 "장소"가 합당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한 장소에서 제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구약성경에서 대속제물을 바치는 장소는 어디였는가? 그것은 성막이었다. 혹은 그것이 발전된 성전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과연 성막 혹은 성전에서 돌아가셨는가? 우선 확실한 것은 예수께서는 결코 성전 안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날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문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의미한 죽음이라는 말인가? 그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속죄제일 제사를 완성하기 위한 첫번째 단추부터 끼워보자. 예수께서는 과연 성막(혹은 성전)에서 돌아가신 것인가? 이부분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것은 히9:8의 말씀이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9:8).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장막"이 무엇이며, "성소"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첫 장막"이 무엇인지는 히9:1~2에 보면 나온다. 거기에서는 첫 장막을 "성소"라고 부르며, 그것 안에는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첫 장막은 첫째성막으로서 성소를 가리킨다. 그러면 둘째장막은 둘째성막으로서 지성소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히9:8의 말씀을 보면, "첫장막"과 "성소"와 충돌한다. 둘 다 똑같은 말인데,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첫장막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했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히9:8에 나오는 "첫장막"과 "성소"가 각각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선 "첫장막"을 지상에 있는 성전의 성소라고 가정해보자.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 과연 지상의 성소가 어찌되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첫장막"이란 지상의 성소를 가리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성소에 들어가는 길"에 나오는 성소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우선 헬라어원문을 보면, 이따 "성소"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성소들"인 것이다. 여기서부터 실마리가 풀리가 시작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성소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들이라고 풀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서는 구약을 모형론적으로 설명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히9:11~12에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일의 좋은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후에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1~12)". 고로 예수께서 속죄사역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의 영(부활체)는 하늘에 있는 성소 안으로 들어가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히9:8의 "첫장막"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히10:19~20에 나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들]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10:19~20)"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갈 장소는 다름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성소들(성소와 지성소들)이라는 사실과 아울러, 지상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둘째 휘장이 예수님의 육체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첫장막(첫째성막=성소)은 예수님의 육체였던 것이요, 둘째장막(둘째성막=지성소)는 예수님의 영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첫째휘장을 열고 들어가면 일곱금촛대와 분향단과 떡상이 놓여있으며, 좌우에 싯딤나무로 지어진 판자들이 있고 앞쪽에는 지성소를 구분하는 둘째휘장이 있는 곳이 "첫째성막"으로서 "성소"인데, 지상의 성전의 성소는 모형이고, 이것의 실체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각도에서 성경을 보면 많은 부분이 열리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요1:14에서 사도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거하시매"라는 단어를 보면, "스케노오"라는 헬러어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천막을 치다. 장막을 치다. 성막을 짓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육신을 입은 사건이 곧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성막을 치신 사건인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땅에 물질적인 성막(모형) 말고 또 하나의 진짜 성막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야말로 "움직이는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그런데 사도요한은 이 성전을 가리켜 "예수님의 성전된 자기 육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요2:21).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체는 성전의 첫째방으로서 성소였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이 성전의 성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지상의 성전에 있는 둘째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마27:51), 그리고 한 가운데(눅23:45)가 찢어졌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성전의 휘장은 모형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이 성전의 성소 곧 첫장막이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히 예수님이야말로 걸어가는 성막(성전)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분의 몸은 첫째장막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그분의 영은 둘째장막에 해당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곱금촛대에 불을 밝히고 분향단에서 향을 사르고 떡상에 떡을 진설하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몸안에서 행하는 사역이었고, 지성소의 법궤 위에 피를 뿌리는 것은 그분이 영 안에서 행하시는 사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성막(성전)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이같은 일들로 인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걸어다니는 성막(성전)이었기에 그분이 어디서 돌아가시든 그분은 속죄제사의 첫번째 조건인 속죄제사는 성막(성전)에서 드려야 한다는 조건이 충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께서 골고다언덕에서 돌아가시지 않고, 예수님의 베데스다 못가에서 돌아가시든, 벳바게 언덕에서 돌아가시든 상관없이 그분이 돌아가신 그 장소가 성막(성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4. 왜 예수께서는 골고다 언덕에서 돌아가셨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것은 왜 예수께서는 여러 장소들이 많은데 굳이 "골고다언덕"에서 돌아가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번째 이유는 그것이 대속죄일 제사에서 죽임당할 속죄속죄제물에 대한 규례 때문이다(보다 더 정확히 말하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원래 바랬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온 회중의 죄를 사하는 대속죄일 제사는 레위기 16장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대속죄일 제사 때에 온 이스라엘 회중을 위한 속죄제는 2마리의 속죄양(숫양2마리)가 사용되었는데,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속죄양으로 드려졌고 또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한 속죄양으로 드려졌다. 여호와를 위한 속죄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지성소(둘째장막)의 법궤 위와 동편 앞에 뿌려야 했다. 그리고 또 한 마리는 안수 후 산 채로 광야의 무인지경에 내다 버려야 했다. 그때 아사셀 양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버림받아 죽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골고다언덕에서 죽으신 것은 이 두 마리 속죄양으로 죽으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아사셀 양처럼 버림받아 골고다언덕(당시에는 성문밖에 위치해 있었다)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그 장소가 여호와를 위한 속죄양의 피가 떨어질 자리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1988년경 미국의 저명한 고고학자 론 와이어트가 예루살렘을 여행하던 중 천사의 지시를 받고 예수께서 돌아가신 장소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 법궤의 위치까지 알아낸다. 그곳은 골고다언덕의 바위 밑이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날 지진이 일어났었는데, 그때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피가 고여있다가 지진으로 벌어진 틈새를 따라 밑으로 스며들었으며, 지하 예레미야 동굴에 감추어둔 법궤 위와 동편에 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를 위한 한 마리의 속죄양의 피가 지성소의 법궤 위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골고다언덕이야말로 성전(예수님의 몸)이 있는 장소였고, 지성소(법궤가 놓여 있음)가 놓여있는 장소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참고로 그 자리에 법궤가 있었던 이유는 남유다가 타락으로 인하여 멸망이 가깝자, 경건한 제사장들이 법궤를 당시 예레미야의 동굴로 옮겨놓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5. 예수님은 흠없는 속죄제물이셨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흠없는 속죄제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동정녀(처녀)마리아의 태를 빌려 태어나셨기에 죄된 본성을 갖지 않은 채 이 세상으로 들어오신 분이기 때문이요, 그분은 이 세상에 살면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요 죄를 짓지도 아니하셨기 때문이다(고후5:21, 히4:15, 요일3:5).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5)" 그래서 사도베드로는 예수님의 피를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같은 그리스도의 피(벧전1:19)"라고 하였던 것이다.

 

6. 예수님은 진정 속죄제사를 드릴 자격을 갖춘 대제사장이었는가?

  이제는 마지막 단계에 왔다. 예수님은 자체가 성막이셨고 흠없는 속죄제물이셨다. 그렇다면 그분은 속죄제사를 드릴 수 있는 대제사장이셨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더욱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자체가 1장부터 10장까지 예수님께서 속죄제사를 드릴 대제사장으로 합당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을 내서 차근차근 히브리서를 읽어보라. 1장에는 그분이 죄를 정결케하는 일을 하셨다고 나오고(1:3), 2장부터는 계속해서 예수께서 대제사장이시라고 말씀할 뿐만 아니라, 얼마나 대제사장으로서 합당하신 분인지를 증거하고 있는데, 그분은 천사보다 뛰어나고(1~2장), 모세보다 뛰어나며(3~4장), 아론보다 뛰어난 분(5~10장)이라고 증거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으로서, 영원무궁토록 대제사장의 신분을 갖고 계시다고 증거한다(7장). 예수께서 얼마나 뛰어나신 분인지를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볼 것이다(매일 새벽 유튜브로 방송하는 "아침묵상(홈페이지)"을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7.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자는 어떤 복을까?

  그렇다면, 골고다언덕에서 인류를 위한 속죄제사를 믿는 자들은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가? 많다. 아주 많아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차다. 우선 예수께서는 요3장에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3:15).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의 속죄제사로 인하여 죄들에 대한 용서를 받을 수 있고(히9:22,2:17,1:3), 우리들의 양심이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다고 했으며(히9:14), 죄인들을 거룩하게 하며 온전하게 한다고 하였다(히10:14). 그리고 그날 예수께서 열어놓은 새롭고 산 하늘 길을 따라 하늘(셋째하늘=천국)에까지 들어갈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으며(히10:19~20), 결국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히9:25).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앉으셔서(히8:1), 중보자로서 일하시는 그분의 도우심을 받아(히2:18),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히4:16), 우리가 드린 기도가 응답되며(히7:25~26),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처인 하나님의 나라까지 상속받을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히3:14).

 

8. 나오며

  고로 우리는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드린 제사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완전한 속죄제사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 그분은 골고다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이 땅에 성막을 치신 것이다. 그분이 성육신하신 것이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해 인류의 죄를 전가받은 후, 당신이 이 세상의 죄를 없이하시려고 죽으신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구원자로 오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무려 350가지 이상의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셨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두 마리의 속죄양으로서 돌아가셨다. 그 표적이 바로 지상성전에 있던 둘째휘장이 찢어진 것이며, 예레미야동굴의 법궤 위에 피가 뿌려진 것이다. 그리고 3일동안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무덤 속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늘로 가셨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의 중보자로서 대제사장적인 직무를 감당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그분만을 붙들고 기도하며 살기를 바란다.

 

2020년 03월 15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