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대를 이끌어갈 참된 영적 지도자(딤전2:4~7)_2020-05-17(주일) 스승의 주일 설교

by 갈렙 posted May 1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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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1ed5vMw_u_A
날짜 2020-05-17
본문말씀 디모데전서2:4~7(신약 338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스승의주일,영적지도자,사도바울,.디모데,복음핵심이해,한분하나님,바울의말기말씀사역,구원의방편,믿음여부

바울은 어떤 지도자였을까? 그는 자신이 아들처럼 낳았다는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낸 목회의 편지들을 통해서 그동안 교회에게 보냈던 것과는 좀 다른 편지들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구원론"에 대한 새로운 말씀들이 들어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육신을 언급하기 시작하였고, 믿음의 인내를 강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 그랬을까? 그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후계자들에게 이것을 강조한 것인가?

 

1. 들어가며

  우리의 시대와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이끌어갈 영적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치유와 은사능력이 뛰어난 목회자여야 하는가? 아니면 성도의 지적인 수준을 채워주는 교양있는 목회자여야 하는가? 아니면 늘 성도의 삶에 관심가져주고 심방오고 기도해주는 목회자여야 하는가?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지금의 시대와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를 동틀어 이끌어갈 영적 지도자상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사도바울이 자신의 아들같이 여기다가 제4차전도여행 중에 에베소교회에 머물게한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속에 그 해답이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에 따라 여러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유형의 지도자이든지 반드시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목회자가 알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어떤 목회자가 되어서 혼란스런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목회자가 될 수 있는가?

 

2. 디모데전서는 어떤 책인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사도바울의 목회서신으로 알려진 "디모데전서"가 있다. 디모데전서는 목회서신이라는 불리는 '디도서' 그리고 '디모데후서'와 함께 13개의 바울서신들 가운데 맨 나중에 기록된 3권의 목회서신들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디모데전서와 후서 그리고 디도서를 읽어보면, 우리는 사도행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의 목회서신에는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감옥에 있다가 잠시 풀려났던 A.D.62~63년경의 전도여행기록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에는 그러한 기사가 나오지 않는다. 이때 바울은 옥중에서 잠시 풀려나 일행과 함께 마게도냐를 거쳐(딤전1:3), 에게해를 건너 소아시아에 있는 드로아로 떠난다. 그리고 가보의 집에 들러 겉옷을 맡겨두고(딤후4:13), 그곳을 떠나 에베소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디모데를 그곳에 목회자로서 남겨둔다. 그리리하여 바울을 대신하여 목회사역을 감당하게 한다. 그리고 다시 소아시아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바다를 건너 지중해의 그레데섬에 도착하여 이번에는 디도를 목회자로 남겨두고(딛1:5), 배를 타고 아가야지방에 상륙한다. 바울은 거기서 겨울을 보내려 하다가 다시 로마관원에 붙잡혀서 로마로 압송되고 두번째로 감옥에 갇혀있다가, 2~3년 뒤 네로황제에 의해 순교를 당하여 주님 곁으로 떠난다. 그런데 바울이 아가야지방에 있을 때에  오면서 떨어드렸던 두 명의 목회자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디모데전서"요 "디도서"이며, 그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유언처럼 써 보낸 편지가 바로 "디모데후서"다. 그러므로 디모데전서와 후서돠 디도서에는 정말 목회에 필요한 필수요소들이 압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에 무엇을 썼는가?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무슨 내용의 편지를 썼을까? 그것을 읽어보면 대략 3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거짓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자와 이단을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여러종류의 거짓된 가르침과 이단들이 있었으니, 거기에는 쾌락주의자도 있었고 금욕주의자도 있었으며, 영지주의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성경을 왜곡해서 해석하는 거짓된 가르침도 있었다. 둘째는 경건생활의 핵심인 기도생활을 잘 할 것과 복음전파자로서 알고 있어야 할 복음의 핵심이 무엇이며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로 사명을 잘 감당할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셋째는 에베소에 교회의 직분자들인 장로들과 집사들을 세우되 어떤 기준으로 선발하고 세울 것인지가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그중에서 둘째부분으로서 디모데의 경건생활의 핵심인 기도생활에 대한 권면과 아울러, 디모데가 어떤 소명을 가진 자인지를 분명이 각성한 채 복음전파자와 교사로서 그가 꼭 알고 있어야 할 복음의 핵심내용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얻기를 바라시며 진리의 완전한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구원에 관한 소식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한 분인데 그분은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로서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다는 내용이었다. 어찌보면 너무나 평범한 내용처럼 보인다.

 

4.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해준 복음의 핵심내용은 왜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바울서신을 많이 읽어본 사람들은 바울이 이때 디모데에 써보낸 복음의 핵심내용에 상당히 변화가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전에 써 보냈던 편지들 곧 바울이 개척했던 교회들과 빌레몬에게 보내었던 10개의 편지들과 목회서신들에는 많은 변화를 보이는 문장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전에 바울이 잘 언급하지 않았거나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내용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사람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얼핏보면 이것이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디모데는 왜 할머니 때부터 유대인으로 살았던 집안으로서,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경건한 유대교의 신앙을 물려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유대인들은 매일 신6:4~9의 쉐마를 낭독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신6:4~5)" 그런데 바울은 유독히 하나님이 하나요 유일한 분인 것을 강조한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딤후2:5에서만 이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딤전1:17에서도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훌로 하나이신 하나님께..."라고 썼다. 특별히 여기에 나오는 "홀로 하나이신"이라는 말은 두 단어가 아니다. 한 단어로서 헬라어로보면 "모노스"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단일한, 유일한, 오직"이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다. 그런데 이러한 단어를 또 한 번 더 사용한다. "하나님이 그의 나타내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딤전6:15)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유일하신"이라고 쓰고 있다. 이 말도 "모노스"라는 단어다. 영어로 말하면, 스테레오가 아니라 "모노"라는 것이다. 단일한, 유일한, 하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한 분 하나님을 바울은 강조해야 했는가?

 

5. 바울은 목회서신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가?

  바울이 한 분 하나님을 강조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목회서신(딤전,딛,딤후)에서 하나님을 기록할 때 약간 이상한 부분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로서 새로운 단어를 붙여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디모데전서의 첫 시작부터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딤전1:1)" 바울은 여기서 이전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던 호칭을 하나님에게 붙여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구주(소테르)"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이전까지는 항상 아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붙혀서 사용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은 사도바울만이 아니라 사도베드로와 사도요한도 마찬가지였다. 이 둘도 "구주"라는 명칭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사용하지 않고, 목회서신에서 무려 6차례나 하나님의 명칭을 기술할 때 동시에 사용한 것이다. 딤전4:10에 가서는 아예 설명까지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그는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4:10)" 사실 "구주"라는 단어는 "구원자"라는 뜻으로, 천사가 아기예수의 탄생 때에 붙혀준 명칭으로,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그리고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이전의 편지들이나 사도베드로나 요한의 서신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이 단어를 붙혀 사용했다. 하지만 목회서신을 쓰면서 사도바울은 이 명칭을 하나님에게 사용했는데, 무려 6번이나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딤전1:1,2:3, 4:10, 딛1:3,2:10,3:4). 바울은 하나님은 유일한 분이라고 하면서 그분에게 구주라는 명칭을 붙여놓았는가?

 

6. 바울이 디모데전서에 새롭게 언급한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새로운 표현은 무엇이었는가?

  더욱이 바울은 이전에는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새로운 표현을 사용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육신을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딤전3:16). 그는 디모데전서에서 먼저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언급했다(딤전1:15). 그러나 좀 더 뒤쪽에 가서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나타난 바 되신 분을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하지 않고, "그는"라고 언급했다(딤전3:16). 그러나 여기서 "그는"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보면, 인칭대명사인 "그(he)"가 아니라, 관계대명사로서 "호스(그리고 그는)"이다. 그러므로 "그분"이란 앞에 있는 어떤 명사주어를 받는 것인데, 앞에 있는 명사주어 가운데 3인칭,남성,단수는 "하나님"이시다. 고로 후대의 사본인 TR헬라어사본이나 비교적 앞에 쓰인 비잔틴사본에서는 아예 "그는" 이라는 관계대명사를 "하나님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바꾼 것인지 처음부터 그렇게 한 것인지는 사실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난 바 되셨다고 명명한 것이다. 그렇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이 되셨다고만 말하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고 말하였다. 이는 보다 더 분명한 메카니즘을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1:23에서도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임마누엘"이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처녀의 몸에 잉태되셨음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성육신만을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예수님은 한 분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것이라고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7. 바울은 왜 유일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해 디모데에게 강조해야 했는가?

  그런데 또하나 놀라운 사실이 디모데전서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바울이 "유일한 하나님"에게 "구주"라는 용어를 붙여서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구주(소테르)"라는 단어는 바울의 목회서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1번만 예외)을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붙여서 사용되고 있다. 일례로 사도 베드로나 사도 요한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구주"라는 용어를 붙여서 사용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목회서신에서 "구주"라는 용어를 예수님에게만(4회)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에게 더 많이 사용했다(6회)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딤전1:1, 2:3, 4:10, 딛1:3,2:10,3:4). 왜 그랬을까?

  사도바울이 예수님에게만 사용하는 용어로서 "구주"라는 용어를 목회서신에 와서는 왜 하나님에게 더 많이 붙여 사용한 것인가? 그것은 4차전도여행을 하면서 무엇인가 충격을 받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단 영지주의의 초기 세력들이 막 발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와 그레데섬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해야 할 두 명의 사역자들(디모데와 디도)에게 꼭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이 이것을 넣은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이제 모든 사역을 접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상황에서, 두 명의 후배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과 전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두 분은 하나인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영지주의 이단 사람들은 구약의 여호와를 저급한 신이라고 보았으며, 신약의 예수님은 가장 최상의 신이라고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구약의 여호와는 분풀이를 하시고 화부터 내시고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신약의 예수님은 용서하고 긍휼을 베푸시는 분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고로 사도바울은 보통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용어만을 사용하다보면, 나중에는 아버지와 예수님은 전혀 별개의 존재인량 인식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바울은 아버지도 구주요, 예수님도 구주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구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8. 믿음으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바울은 또 무엇을 말했는가? 

  마지막으로 사도바울은 구원의 방편으로서 믿음에 대하여 새로운 권면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 번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끝까지 지켜내지 않는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내 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딤전1:19~20)" 그러나 이전의 편지들에서 사도바울은 구원은 은혜로 받은 것임을 매번 강조했었다. 그러나 목회서신에서부터 그는 전혀 다른 뉘앙스로 믿음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전의 편지들에게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앗으면 그것으로 인하여 진노하심에서 구원얻을 것이라고 했다(롬5:9). 그리고 빌립보성도에게 쓴 편지에는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빌1:6)"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내가 확신하노니...그 어떤 다른 피조물일지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목회서신에 들어와서 사도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딤전6:12)"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까지 흠없고 책망받을 것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했다(딤전6:14). 그리고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도 했다(딤전6:21). 그리고 본인도 죽는 그날까지 믿음을 지켜왔다고 했다(딤후4:7). 

 

9. 나오며

  바울이 목회서신을 써 보내던 시점부터 바울에게 있어서 상당히 많은 변화가 찾아온 것 같다. 그것의 하나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강조였다. 심지어 성육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이라고 말하면서도(딤전1:15) 동시에 하나님의 성육신(딤전3;16)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자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으로까지 그 범위를 더 넓혀놓았다. 보통 사도들이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분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국한시키어 표현하던 것에서, 이제는 한 분 하나님의 사역으로 그 범위를 더 넓힌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영지주의가 교회 가운데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다른 분으로 보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딤전6:20). 그러므로 위격적인 면에서 분명 아버지와 아들은 다르지만 한 분 하나님이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이단세력에 의해 기독교는 계속 공격을 받고 미혹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구원론에도 상당한 변화가 찾아왔다. 오직 믿음을 통한 구원에서 믿음의 인내를 강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번 가진 믿음이라도 그것을 끝까지 지키지 않는다면 믿음에서 파선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시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 바울은 제4차 전도여행을 끝으로 자신의 사역이 끝나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쓴 목회서신들 곧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와 디모데후서는 그가 유언처럼 쓴 목회서신들이다. 우리도 이제는 그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하여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강조와 믿음의 인내를 통한 구원을 다시 한 번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2020년 05월 17일(주일)

정병진목사

 

2020년 05월 17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