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와 천국복음(70) 교회의 두 종류의 지도자들과 회개의 상관관계(계2:20~28)_2020-09-27(주일)

by 갈렙 posted Sep 27,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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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_Z8f19po1TU
날짜 2020-09-27
본문말씀 요한계시록 2:20~28(신약 401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추석명절,우상숭배,두아디라교회,이세벨선지자,작은교회공동체지도자들,이세벨의교훈(가르침),두무리의교회들,지도자의영향

성도들이 회개를 하고 안 하고 하는 것은 대체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물론 개인이 죄를  깨닫고 회개한다면 더할나위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에는 자신에게 말씀의 꼴을 나눠주는 말씀사역자에게 그것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말씀사역자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분명히 제시해 줄 때, 성도는 사망의 길로 가지 않고 생명의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두아디라교회에게 있었던 두 종류의 사역자와 그 작은 교회 성도들의 상태를 진단해보고 지금 나 자신은 지금 어떻게 하고 하는지를 점검해 보도록 할 것이다.  

1. 들어가며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는 밧모섬에 있는 사도요한에게 A.D.95~96년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7개 교회를 향해 편지를 써보내라고 했다. 그중에서 네번째 교회는 두아디라교회였다. 두아디라교회는 칭찬은 아주 작고 책망이 아주 많은 교회였다. 그런데 그 책망의 주요한 요인이 주의 종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 교회의 성도들의 잘못이 아니라 주의 종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하여 교회가 함께 통째로 우상숭배를 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강한 책망을 쏟아낸다. 대체 두아디라교회의 지도자는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인가? 만약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이 교회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교회에게도 많은 교훈을 시사한다. 우리나라도 기독교인구가 대한민국의 1/4이 되었지만 여전히 두아디라교회의 상황에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두아디라교회의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성도들의 삶의 상관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지도자의 견해가 얼마나 성도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두아디라 교회는 한 개의 교회인가 아니면 여러 개의 교회를 가리키는가?

  우리는 "두아디교회"라는 교회의 명칭을 보면서, '두아디라'라는 도시에 교회가 있으며, 그 교회를 "두아디라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왜냐하면 두아디라 도시 안에서는 여러 개의 작은 공동체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며(계2:24), 또한 거기에는 작은 공동체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계2:22). 이 도시의 작은 공동체 교회들을 하나로 합쳐서 부를 때 "두아디라 교회"인 것이지, 두아디라 교회는 한 개의 공동체만을 가진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헬라어로 이 성경을 볼 때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신 말씀 중에서 두 번씩이나 두아디라는 단수로 사용하지 않고 복수로 사용했기 때문이다(계2:18,24). 또한 본문에는 두아디라 공동체 가운데 거짓선지자인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 가지 않은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계2:24). 뿐만 아니라 이 교회 안에는 주님께서 "내 종들(예수님의 종들)"이라고 하는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계2:20). 그러니까 이 교회는 커다란 한 개의 교회가 있었으며, 그 교회의 이름은 "두아디라 교회"라고 부르며, 그 교회 안에서는 작은 공동체 교회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작은 공동체 교회들의 지도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작은 공동체 교회들의 지도자들을 가르치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여선지자 이세벨"이었던 것이다(계2:20). 

 

3. 한 개의 교회 안에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성도들이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개 교회 안에 전혀 다른 종류의 성도들이 있게 된 원인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한 개의 큰 교회 안에 작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이 누군가로부터 어떤 가르침을 받아 자기 교회 공동체에게 그것을 전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두아디라 교회에는 다수의 작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이 있고, 이들 중 대부분은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자기가 속한 교회 공동체에 가서 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아디라 교회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세벨의 추종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 안에서는 당시도 이세벨의 가르침을 수용하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세벨이 가르쳐준 사탄의 깊은 것을 체험하지 않는 작은 교회도 있었다. 결국 이들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되었고 나중에는 천국에서 빛나는 영광을 받게 될 자들로 나온다. 

 

4. 두 무리의 교회들은 왜 나뉘어지게 되었으며, 그것은 말씀을 전하는 지도자와 어떤 상관이 있는가?

  두아디라 교회는 두 무리의 교회들이 있었다. 한 무리는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 무리가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세벨의 어떤 가르침을 따라갔던 것인가? 그때 대다수의 작은 교회 지도자들은 다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갔다. 그것은 성도들이 속한 도시상업조직(길드)에서 우상숭배행위를 했는데 그것을 우상숭배행위라고 정의하지 않고 하나의 "문화"에 불과한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우상숭배한 뒤에 나온 음식(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도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아니라 "친교행위"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상업조직에서 섬기는 수호신 앞에 경배하는 것이 약간 꺼림직했던 성도들은 이세벨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후에 자유롭게 우상숭배를 하게 되었으며, 우상의 제물을 함께 나눠먹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상업조직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은 성도들의 경제활동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몇몇 소수의 두아디라 작은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이세벨의 가르침을 거부했다. 그것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엄연히 우상숭배행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고전10:20을 보면,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말씀에 따라, 그것은 분명히 우상숭배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세발이 그것을 하나의 "문화"라고 규정해 줌에 따라, 성도은 이제 꺼리낌없이 우상숭배를 행할 수있었다. 하지만 소수의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결코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공동체에 가서 전하지도 않았다. 

 

5. 두 무리의 공동체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책망과 칭찬은 어떤 것이었나?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분명한 우상숭배를 우상숭배가 아니라 "문화행위"와 "친교행위"로 바꾸어버린 지도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하셨을까? 그것은 엄히 책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세벨의 가르침을 거부한 소수의 작은 교회 성도와 지도자들에게는 축복해주셨다. 

  첫째, 이세벨과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대다수의 작은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어떤 책망을 하셨는지 살펴보자. 먼저, 이 모든 일들을 조장했던 이세벨에게는 주께서 이미 그녀를 침상에 던져 놓았다고 말씀하셨다(계2:22). 이는 앞으로 주께서 그녀에게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고 현재형으로 말씀하신 것이다(계2:22). 고로 주님께서 그녀를 가리켜 "침상 안으로 던지고 있다"는 표현한 것은 일종의 환유법으로서 그녀가 질병에 침상에 누워있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이세벨은 하나님이 주신 질병의 징계에 이미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질병이 자기의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이미 그녀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었지만 그녀는 회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간 대다수의 작은 교회 공동체 지도자들도 역시 이미 큰 환난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들과 그들의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에게 커다란 어려움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게2: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은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하거나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가 맞이하게 될 엄한 징계가 있을 것임을 선언하셨다. 그것은 그녀의 자식들을 살해하겠다는 것이었다(계2:23). 하나님께서 그녀의 자식들을 죽여버리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목회자의 자녀가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거나 자살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의 종들이 죄를 짓게 하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한 질병에 걸려 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자신에게 중한 질병이 발생하고 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의술을 의지하며 자기자식이 죽어나가도 잘 모른다. 오히려 성도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여 그들도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둘째, 몇몇 소수의 작은 교회 지도자들은 아무리 이세벨이 자기를 꾀어 그렇게 가르치라고 했어도, 그녀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그냥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살았던 것이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축복을 약속하셨는가? 그것은 그러한 성도들에게는 같은 종류의 다른(알로스)의 짐을 지우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셨다(계2:25). 신앙을 지키려다가 막대한 경제적인 손실을 받은 만큼 다른 것에서는 그러한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르치는 지도자에게는 철장(쇠지팡이)로 성도들을 양육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시고 있다고 말씀하셨다(계2:27). 이는 철장을 가지고 양떼인 성도들을 안전하게 지켜낼 수 있게 하시고, 성도들을 공격하는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킬 수 있도록 권세와 능력을 이미 부여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장차 미래에는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철장 권세로 악의 무리를 쳐단하는 일에 함께 참여하게 해 준다는 것을 약속해주셨고(계2:26), 또한 천국에 들어가서는 광명한 새벽별을 주시겠다고 했다(계2:28). 이는 새벽별이신 그리스도가 그의 분복이 되게 하겠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천국에 들어갔을 때 영광스러운 선두주자의 복을 주시겠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새벽별은 새벽녁 마지막으로 어둠을 밝히는 별이자 새벽을 밝아오게 하는 별이기 때문이다. 

 

6. 나오며

  그렇다. 성도들이 과연 생명의 길을 걸어가느냐 사망의 길을 걸어가느냐의 차이는 성도들을 지도자는 말씀사역자의 사역에 달려 있다. 말씀사역자가 누구에게 배웠든지 상관없이 그가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면 그가 가르치는 교회의 성도들은 생명의 길로 인도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가르침인지도 모른채 그것이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고 경제적으로 편하게 하는 일이라고 판단하여 적당히 타협하는 안을 제시한다면, 얼핏 보기에 그것은 성도들을 이롭게 하고 살릴 수 있는 일같이 보이나, 실제는 성도들을 사망의 길로 끌고가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각 교회의 말씀사역자는 자기가 전하는 꼴이 지금 어떤 말씀인지를 늘 점검해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참된 생명의 길로만 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 주님이 바라는 것이다. 만약 어떤 것이 성도들을 더 힘들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길이라면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전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용기가 있는 말씀사역자가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사실 이 땅에 흠이 없는 지도자는 정말 거의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지도자를 만났다고 해서 지도자를 그냥 버릴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러면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을 지도하는 지도자가 오직 성령에 사로잡혀 진리의 말씀만을 전하는 목회자가 될 수 있도록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반대로 목회자는 자신이 성도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전한다면 자기자신은 지옥에 떨어질 것처럼 각오하고서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그렇다. 내가 선택한 지도자의 가르침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나 자신이 받을 복과 저주가 결정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들어가게 될 천국과 지옥도 그렇게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내가 섬기는 교회의 지도자가 바른 가르침을 전할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 오실 때까지 자신이 가진 믿음도 변질되지 않도록, 그것을 꼭 붙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0년 09월 27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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