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똑같이 말씀을 들어도 말씀을 더 풍성히 깨닫고 누리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게 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가? 그 시작은 미약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5년 10년 30년이 지난 후라고 한 번 가정해보자. 여기에 그 해답이 있다. 영적인 빈익빈 부익부, 주님의 말씀 속에 길이 있다.
1. 들어가며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분류해보면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강화말씀, 비유말씀, 기적과 치유기사, 예언 등등. 그중에서 비유말씀이 있다. 비유란 표현하려는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빗대어 나타내는 것인데, 천국이 어떤 것인지를 들려주실 때에 예수께서는 거의 모든 말씀을 비유를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천국을 비유로 들려주시다가 이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게 되리라(마13:12)"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조금 의이하게 생각이 되기도 할 것이다. "왜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 있는 자에게서 조금 빼앗아 없는 자에게 주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천국말씀을 들을 때에 왜 영적으로 빈익빈과 부익부의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찾아보고,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떻게 듣는 것이 좋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께서 들려주신 영적인 파라독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 중에는 우리의 이성이나 상식을 벗어나는 말씀이 있어서 우리를 깜짝 놀라케 하실 때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파라독스"라고 부르는데, 그러한 말씀 중에 대표적인 것은 다음의 3가지다. 첫째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종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마20:26~27). 그리고 둘째는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도 있다(마19:30,20:16). 그리고 셋째는 무릇 있는 자는 받아서 풍족하게 되겠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되리라는 말씀이 있다(마25:29, 눅19:26, 막4:24~25, 눅8:18). 오늘은 이것들 중에서 세번째에 해당하는 "말씀에 대한 영적인 빈익빈과 부익부"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께서는 과연 영적인 빈익빈과 부익부에 관하여 말씀을 들려주신 것일까? 그리고 사람이 이렇게 되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미리 그렇게 작정하시고 그렇게 만드시는 것은 혹시 아닌가?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오늘 말씀 속에 들어 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사람에게 말씀에 대한 빈익빈과 부익부가 발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결과이며, 그것을 하나님께서 작정하고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 우리는 대체 어떻게 말씀을 들어야 할까? 어떻게 말씀을 들어야 가면 갈수록 영적으로 부익부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3. 예수께서는 왜 천국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공관복음서를 읽어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언제나 병들고 약하고 소외된 자를 가까이 하셨다. 그들이 참으로 마음이 가난했고 주님을 잘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병들도 약하고 소외된 자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거부하거나 회피하거나 듣지 않으려는 자에게 주님은 관대한 적이 없으시다. 그것은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는 인간의 거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천국비유를 들려주시다가 아주 독특한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시는 어떤 말씀은 듣기에 조금 어렵기도 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도 않은 말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러한 말씀을 들려주신 이유는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 아니라고 하셨다. 이 부분에 우리는 중요한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렇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대에 어떤 자세로 들어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오늘 본문 말씀 곧 누가복음 8:16~17에 나온다.
눅8:16-17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침대)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등잔대)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7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등불을 켜서 그것을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대 아래에 둘 자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등불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둠을 밝혀주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것을 방지해주거나 길을 바르게 찾도록 도와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들려주신 천국말씀은 일종의 등불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천국말씀을 들려주실 때에 그 말씀을 숨겨두거나 감춰두어 그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그 등불과 같은 천국말씀을 들어서 자신의 영혼에게 도움이 되라고 주셨다는 것이다.
4. 영적으로 사람에게 빈익빈 부익부가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영적으로 말씀에 대한 빈익빈 부익부가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서 눅8:18에서 딱 한 마디로 요약하여 말씀해 주셨다.
눅8: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주의하라)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생각하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그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자신이 그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는가를 유심히 살펴보라는 것이다. 만약 그가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을 주의깊게 듣지 아니한다면 그 말씀은 그 사람에게 그 어떠한 영적 통찰력도 주지 아니할 것이며, 그가 이미 소유하고 있던 것조차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천국말씀 곧 영적인 말씀을 들을 때에 이렇게 생각한다. "아, 이 말씀은 너무 어려워, 목사님들이나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말씀이야. 오늘을 살아가기도 바쁜데 내가 이러한 말씀을 이렇게 신경을 써서 들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예배자로 여기에 앉아있다는 것이지, 이 말씀을 듣고 다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은 감추어두려고 들려주신 말씀은 하나도 없으며, 숨겨두려고 들려주신 말씀도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다 그것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말씀으로 주셨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헤아림으로 도로 도로 헤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이 말씀은 깨달을 수 없어"라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순간, 그 말씀은 우리에게 영영 깨달을 수 없는 말씀으로 다가올 것이라는 점이다. "아니야, 이 말씀을 내가 깨달을 수 없는 어려운 말씀이 아니고, 이 말씀은 등잔대 위에 올려놓은 빛과 같아서 내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하고 바른 길로 안내해줄 지침서와 같은 말씀이야"하고 말씀에 귀기울여 듣는다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어두운 길에서 등불이 되어주고, 항해하는 배의 등대가 되어준다는 뜻이다.
5. 우리는 예수께서 들려주신 영적인 말씀들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들려주신 영적인 말씀들은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천국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나의 신앙에 등불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다음의 3가지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모든 말씀은 깨달을 수 있으며 내 것 되게 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므로 말씀을 들을 때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눅8:18a).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기 때문이다. 그 어떤 천국말씀도 그것을 숨겨두기 위해서 혹은 감춰두기 위해서 주어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드러내어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천국말씀이라도 내가 듣기에 어렵다고 하면서 스스로 포기해서는 아니 된다. 그 말씀을 우리에게 알 수 있도록 들려주신 말씀이기에, 반드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매주 말씀을 들을 때에 이번 주에는 과연 어떤 말씀을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인가를 기대하면서 사모하면서 말씀을 들으러 주님께 나아와야 한다.
둘째, 이미 들은 말씀을 마음에 간직해두는 것이다(눅8:18b). 주님께서는 이때 그가 만약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게 그것은 장차 주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고로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에 한 번 듣고 흘려버릴 말씀으로 듣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그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어야 한다. 그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는 그 말씀을 가지고 다른 말씀들을 분석할 수가 있어서 진리의 말씀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말씀을 간직하고 있을 때에 다른 것과 비교해볼 수 있고 그 차이를 발견해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들었던 말씀 중에 어떤 말씀은 어디가 성경말씀과 다르며, 어떤 말씀은 어디에서 성경말씀과 일치하는지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을 반복해서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 들은 말씀이라고 그 말씀을 여러 번 들어보는 것이다. 한 번 들어서 이해할 수 없다면 두 세 번 들어보면 이해하는 것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듣는 중에 깨달음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비밀로 감추어두려고 말씀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아주 작은 깨달음이 왔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감사하며 들을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대로 한 번 살아보는 것이다(마25:28~29). 이것은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주신 빈익빈과 부익부의 말씀의 핵심골자의 내용이다.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누구나 모든 말씀을 다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초보는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의 1/10도 못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해두어야 한다. 그리고는 다짐하기를 "나도 언젠가는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를 전부다 깨달을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거야"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말씀이 있다면 그대로 한 번 실천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이 진실이요 실제라는 것을 실제로 경험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새겨놓는 것이다.
6. 나오며
이미 이 세상은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 전염병을 기점으로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안에 들어온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다. 요한계시록 6장에 의하면,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은 사람에게 내리는 3가지 중요 재앙이다. 그리고 나서는 '짐승'에 의한 재앙이 온다고 되어 있다. 그는 왜 '짐승'인가? 짐승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를 핍박하고 죽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곧 있으면 출현하게 될 짐승을 어떻게 마주 대해야 할까?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성도를 광야에 두신다고 말씀하셨다. 광야는 물 한 모금, 풀 한 포기 얻기 힘든 장소를 가리킨다. 하지만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광야에서 40년간을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물이 없어 목말라 죽지 않았으며,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려 죽은 자도 없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말씀을 믿고 따라가는 그들의 필요에 하나님께서 다 응답하셨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다. "여기가 광야인데, 어디서 우리가 마실 물을 얻을 수 있으며, 어디서 먹을 양식을 구할 수 있겠어요?"라고 말하면 말할수록 그러한 것들은 점점 더 우리 주변에게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을 믿고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반석을 쪼개서라도 물을 공급해주실 것이고, 하늘에서라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시어 공급해주실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알곡과 쭉정이로 나누는 시대다. 말씀을 사모하고 듣는 자는 더 풍성한 말씀으로 인도해 주시겠지만 세상 것을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실없는 것으로 들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선택하는 일인 것이지 하나님께서 강제로 행하시지 않는다. 천국말씀을 사모하라. 그리고 말씀을 들었으면 말씀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라. 그리고 그것을 받은 것에 감사하고 실천하라. 그러면 우리가 사모하고 간직하고 실천하는 만큼, 그것은 우리에게 열려지고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없는 영적인 기갈의 시대에 선다 할지라도 풍성한 생명의 양식으로 채워지는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21년 02월 14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