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부활이 주어지는 신앙고백은 어떤 고백인가(요11:21~27)_2021-04-04(주일)

by 갈렙 posted Apr 04,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유투브 주소 https://youtu.be/_Zerz5Rl2xY
날짜 2021-04-04
본문말씀 요한복음 11:21~27(신약 165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아담의언약,노아의언약,예수님의언약,베드로의신앙고백,마르다의신앙고백,지금도오계시는하나님,하나님에대한정의,예수가곧하나님,생명의주관자

1. 들어가며

  회개에는 크게 두 방면이 있다. 하나는 구원을 얻게하는 회개의 방면이 있고, 또 하나의 저주를 없애주는 회개의 방면이 있다. 그런데 저주를 없애는 회개에도 두 방면이 있음을 최근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둘 다 조상들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그 방법이기는 하나, 하나는 조상들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할 때 주어지는 것이고(출20:5), 또 하나는 조상들 중에 남을 억울하게 하거나 죽인 일을 회개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 첫번째는 십계명 가운데 주셨던 말씀이고(출20:5),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과 세운 언약 중에 주신 말씀이다(창9:5~6).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와 세웠던 언약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전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노아의 식구들과 맺은 언약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한 골자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죄값을 그 사람에게서 묻겠다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가기 전까지는 그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함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만약 그것이 짐승이라면 그 짐승에게 보복할 것이며,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보복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얻기를 바라고 계시는데, 만약 누군가가 어떤 다른 사람을 죽여버리게 된다면 그에게는 더이상 회개할 기회가 없어지게 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이미 죽음의 노정에 들어선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구원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살려주시기를 원하시는가? 또한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한 사람만 살려주시기를 원하시는가?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와같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사람게 생명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또한 우리가 과연 어떤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 문제를 즉시 해결해주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마르다 앞에 당면해 있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마르다는 베다니의 사람으로서, 마리아의 언니요 나사로의 누이동생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자신의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 그러자 마르다가 사람을 급히 보내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거기에 도착하실 때에는 이미 장례를 마치고 마무리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이미 죽고 무덤에 묻힌지 벌써 4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오신 예수님이 오신자를 말을 듣고는 마중나가서 그분 앞에서 아쉬움을 토로하시 시작했다. 주님께서 조금이라도 일찍 오셨더라면 자신의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푸념섞인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사실 누군가가 병들었다고 한다면 고쳐주실 수 있겠지만 이미 죽어버린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말이다. 참으로 죽음은 모든 희망을 앗아가버리는 최고의 악한 능력이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누군지를 그에게 들려주신다. 그것이 바로 요11:25~26에 나오는 말씀이다. 

요11: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3.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마르다가 이렇게 고백한 것이 아닌가? 

요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러한 신앙고백은 꼭 마르다만 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베드로도 이미 이와 비슷한 고백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르다가 고백한 신앙고백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어떻게 다른가? 우선,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가짓수가 다르다. 베으로는 2가지로 신앙고백했고, 마르다는 3가지로 신앙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즉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당신은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것이었다면,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지금] 세상 안으로 오고 계시는 이이십니다"라는 것다. 그런데 한글성경만을 보면, 마르다의 신앙고백 역시 2가지 뿐이라고 읽힌다. 그러나 헬라어원문으로 보면, 그녀의 신앙고백은 정확히 세 가지인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정관사가 3개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어떠했는지 헬라어 원문성경으로 살펴보자. 

요11:27... σὺ εἶ ὁ χριστὸς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ὁ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ἐρχόμενος.

  요11:27에 의하면, 마르다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세 가지로 고백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σὺ εἶ ὁ χριστὸς)(You are the Christ)"이고, 둘째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σὺ εἶ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You are the Son of God)"이며, 셋째, "당신은 세상 안으로 지금 오고 계시는 이이십니다(σὺ εἶ ὁ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ἐρχόμενος.)(You are the who is coming into the world)"이기 때문이다. 앞의 2가지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완전히 동일하다. 다만 마르다의 신앙고백에는 "하나님"이란 단어 앞에 하나님을 수식하는 용어 "살아계신"이라는 말만 없을 뿐이다. 그러므로 핵심사항은 똑같다고 하겠다. 그런데 마르다는 베드로가 하지 않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그때 추가로 하였다. 그것은 "당신은 세상 안으로 지금도 [들어]오고 계시는 이"이라는 고백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마르다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에게는 붙힐 수 없는 고백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세상 밖에 있든지, 아니면 세상 안에 있든지 둘 중의 하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 지금도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시간과 공간 너머에 계시는 분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두고 말할 수 있는 대목이다. 
 
4.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은 자기들의 구원자나 하나님아들 혹은 하나님으로 믿지 아니하는가?
  그렇다면 왜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당신은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이"라는 고백을 했던 것인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유대인들은 왜 지금도 예수님을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나 하나님으로 믿지 않은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선지자들 중의 하나 정도라고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예수님은 결코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왜 그런가? 그것은 5~6가지 이유 정도가 있는데, 그 중에 핵심은 딱 2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한 분이지 절대 두 분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둘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 기독교인들은 신성모독자다. 하나님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둘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은 오직 홀로 한 분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에게 또한 아들이 있는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로 그들에게 기독교인들은 다신론자들일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유대인들은 사람은 절대 하나님(신적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찌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이실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그들은 반문한다. 그러나 실로 그들은 성경을 사실 그대로 믿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사야7:14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장차 처녀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며,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오시는 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사야 9:6의 말씀을 통하여는, 장차 아기이자 아들로 태어나시게 될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선지자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아왔다. 지금도 그들은 메시야에 관한 직접적인 예언의 말씀들 즉 이사야 9장과 53장같은 말씀을 소상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슬쩍 넘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제대로 가르쳐주면,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마르다와 마리아는 어떠했는가? 그들은 비록 성경말씀을 많이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직접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보고 그분이 누군지를 알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이셨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예수님을 지금도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이 곧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5. 마르다의 신앙고백의 의의는 어떠한 것인가?
  그렇다면, 마르다가 말한 세번째의 신앙고백 곧 "당신은 세상 속으로 지금도 들어오고 있는 이"라는 고백은 어떤 의의를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르다는 예수께서 당신을 자기에게 직접 찾아오셔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그날 직접 들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베드로도 결코 고백하지 못했던 새로운 고백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그렇게 고백하게 해주었으리라 본다. 그렇다면, 그녀의 신앙고백은 어떤 의의를 가진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서 이제는 그분을 하나님으로 끌어올리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시간과 공간 밖에서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오시면서 역사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은 과거에 있든지 아니면 현재에 있든지 아니면 미래에 있든지 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지금도 역사속으로 들어오시면서 계신 이라고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예수님을 "호 에르코메노스(지금도 오고 계시는 이)"라고 고백하였다. 그녀에게 예수님은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살아서 역하시는 이, 지금도 하나님으로서 나 자신 곁에 오셔서 일하시는 이, 영원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지금 내 곁에 오셔서 나를 만나주시는 이"라고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이미 하나님으로 보고 있었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하나님께서 당신이 누군지에 관하여 스스로 소개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때 마르다의 신앙고백이 하나나님의 자기선언 속에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요한계시록 1:8의 말씀이다. 
계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그렇다. 주 하나님(여호와 엘로힘)께서는 계1:8의 말씀처럼 자기를 5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 나는 알파와 오메가다. 둘째 이제 있는 이다. 셋째, 전에도 있었고 아직도 있으며 계속해서 있는 이다. 넷째, 지금도 오고 계시는 이다. 그리고 다섯째, 전능한 자다. 그런데 놀랍게도 원문을 직역해놓고보니, 마르다의 신앙고백에 등장하는 일정 부분이 하나님의 자기선언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오고 계시시는 이(호 에르코네노스)"라는 고백이다. 우리 한글성경에는 "장차 올 자"라고 번역해놓았지만, 헬라어원문을 보면, 동사 현재 분사 능동태 구문으로서, "지금도 오고 계시는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그날 고백한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고백한 신앙고백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녀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그때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분은 역사속으로 들어오셔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을 "지금도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예수님을 구원자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분에서, 하나님으로 끌어올린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기적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놀라운 신앙고백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놀라운 일을 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지 나흘씩이나 된 나사로를 살아나오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날 예수께서는 왜 마르다에게 오셔서 먼저 자신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소개하신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내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직 끝는 것은 아니니, 네 오빠가 죽은 상태에 있다고 결코 절망하지는 말거라" 라는 뜻이다.
  이 세상에 있는 문제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의 문제다. 죽음은 모든 것을 다 끝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주관하고 계시는 이가 그날 그 자리에 오셨다. 그런데 그분이 그날 누군가를 다시 살려준다면 그는 다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날, 나를 믿고 있는 자는 죽어도 장차 다시 살겠지만 무릇 살아있고 그리고 나를 믿고 있는 자는 그 시대까지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나사로가 죽을 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탄마귀가 강제로 그를 죽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를 죽도록 허락한 일이 없는데 누가 감히 그를 죽일 수가 있겠느냐?"고 하시면서 나사로를 살려내신 것이다. 도로 그를 원래의 자리에 갖다 놓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그분만이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기 때문이다. 
 
7. 나오며
  그날 마르다의 이러한 신앙고백은 정말 놀라운 신앙고백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일하시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예수님을 인류의 구원자로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현재 속에서 일하시면서 기적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사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직접 우리 눈으로 보기는 어렵다. 음부의 문들(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이 비로소 죽을 때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다의 신앙고백은 다르다. 그 고백은 이제 시간의 역사 가운데 들어오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직접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나사로가 세마포에 의해 동동 감긴 채 통통하고 뛰면서 무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마르다의 신앙고백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를 현재의 시간 속으로 끌어당길 수가 있는 신앙고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하나님은 대체 어떤 하나님인가? 과거에 아브라함을 만나주셨던 분으로 끝나버린 하나님인가? 아니면 앞으로 우리를 음부의 권세로부터 이기게 해 주실 미래의 하나님으로 알고 그대로 끌려가고 있는 것인가? 물론 우리 주 하나님은 과거에서 역사하셨고 미래에도 ㅇ역사하실 하나님이시기다. 하지만 마르다는 그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고 그분을 또한 우리에게 소개해주었다.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다가 단 하나의 신앙고백을 더함으로써 말이다. 그 고백은 "당신은 지금도 세상 안으로 들어오고 계시는 이이십니다."라고 고백이다. 지금도 이 세상에 오셔서 바로 우리 눈 앞에 계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와 계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자. 그것은 오늘도 내가 그분을 "지금도 우리 곁에 오셔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믿을 때에 역사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여러분과 저에게 이러한 큰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소망한다. 
 
2021년 04월 04일(주일)
정병진목사

[크기변환]20210404_162629_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