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05 지금도 그분만이 행하시고 있는 일들(계3:20)_부활주일설교

by 갈렙 posted Apr 05,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유투브 주소 http://youtu.be/kRXZna6B6f4
날짜 2015-04-05
본문말씀 요한계시록 3:20(신약 403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부활절, 부활의 시기, 부활했다는 증거, 빈 무덤, 부활후 나타나심과 이를 본 자들의 증언, 성령의 오심, 적극적인 복음전파


  오늘은 기독교의 최대의 절기인 부활절이다. 우리는 부활절의 이 아침에, 우리가 가져야 할 부활신앙이란 대체 어떤 것이며 또한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오늘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이러한 사실을 여타의 종교창시자들과 비교해가면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여타의 종교지도자들과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도 더불어 살펴볼 것이다.

  먼저, 우리가 가져야 할 부활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자. 많은 사람들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부활의 시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특히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약 절반 가량은 믿는 자들의 부활이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믿는 자들의 부활은 지금이라도 우리가 죽는 즉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부활의 진리를 왜 기독교인들 중에 절반 이상이나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바울이 말한 것에 대해 해석의 오해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예수께서는 살아계실 때에 사람들의 부활의 시기에 관해서 말씀을 들려준 적이 있다. 요5:28절을 보라. 여기에 보면,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사람이 죽으면 잠자는 상태에 들어가 있다가(아마도 낙원이라는 곳에 가 있다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자기 무덤으로 가서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믿는 것은 부활을 육체의 부활로 오해하는 데에 기인한다. 우리가 부활할 것은 과연 썩어질 육체인가 신령한 몸인가? 썩어질 육체가 부활을 입은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다(고전15:42~44). 육체의 몸이 있듯이 영의 몸도 있는데, 부활하는 것은 우리의 영이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다. 그러므로 땅의 흙과 부활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부활하는 날 무덤이 열리거나 빌딩이 무너질 리가 없는 것이다.

  한편 즉각적인 부활이 아니라 먼 미래의 부활신앙을 갖게 하는 데에는 사도바울이 쓴 초기의 서신들도 한 몫했다고 보인다(고전15:51~52, 살전4:16~17), . 왜냐하면, 고전15장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고 했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는 마지막 나팔소리와 함께 재림하시게 될 터인데, 그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썩지 아니할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라고 했으니, 믿는 자들의 부활이 그때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고전15:52절의 끝을 보라. "우리도 변화되리라"고 했다. 그렇다. 사도바울은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자신이 살아있을 때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도 변화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우주적인 종말은 개인적인 종말과 함께 나타날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사도바울의 최기의 서신에서는 개인적인 종말(개인의 죽음)을 우주적인 종말(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똑같이 본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2천년이 지나서 지금까지 지연되고 있다. 아마도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받기를 바라는 주님의 마음이 반영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벧전3:9).

  그렇지만 사도바울이 죽음에 임박할 때에 쓴 마지막 편지에는 우주적인 종말이 자신의 개인적인 종말과 같지 않을 수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딤후4:6~8,18).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이 고전15장에서 우주적인 종말관을 가지고 썼던 말씀(고전15:51~52)을 가지고 자신의 개인적인 종말신앙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적인 종말이 우주적인 종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은 우주적인 종말 전에 개인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요5장에서 말씀하셨던 '무덤'이라는 단어는 흙으로 만든 무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체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자신의 영혼이 육체 밖으로 나오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것을 영적인 비유의 말씀으로 말씀신 것이다. 다시 말해 무덤 속에 있는 자란 자신의 육체 속에 있는 영혼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부활의 시기와 관련지어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완성된 이전과 이후의 부활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전에 있었던 구약의 성도들은 사실 곧바로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품 곧 낙원이라는 곳에 가 있었다(눅16:22, 23:42~43). 그리고 어느날 예수께서 오셔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셨다(요19:30). 그리고 예수께서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첫번째 부활이라는 사실이다(레23:10~11). 사도바울도 예수님의 그 부활이 바로 첫번째 부활임을 알고는 예수님의 부활이 부활의 첫 열매라고 증거하고 있다(고전15:20). 이외 같은 사실은 과연 무엇을 말해주는가? 예수께서 부활의 열매로서 처음 맺히게 되었으니 그때부터 부활의 많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하게 될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요12:24, 고전15:20). 그랬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구약의 성도들을 낙원에서 천국으로 옮기셨다(엡4:8~10). 그리고 그후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죽게 된다면 그날 육체의 무덤 속에 있던 자의 영혼이 육체에서 빠져나와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부활의 시기를 잘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죽어보면 알 것이다. 죽어보면 자신의 영혼이 잠자는 중간상태에 들어가게 되는지, 아니면 부활의 몸을 입고 천국으로 곧장 들어가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 있는지를 말이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라. 제단 아래에 수많은 순교자의 신령한 영혼들이 있다. 그들은 이미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에 참여하여 천국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계6:9). 그리고 오늘날 천국에 갔다가 왔다는 이들의 간증을 들어보라. 천국에는 이미 구약의 성도들 즉 노아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모세, 다윗, 다니엘, 이사야 등이 가 있으며, 신약의 베드로와 요한과 그리고 순교자 스데반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주기철, 최권능, 손양원 목사 등도 다 그곳에 가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렇다. 믿는 자가 부활의 신령한 몸을 입는 날은 먼 미래의 일이 결코 아니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죽게 되면 그날 우리는 신령한 몸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두번째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듣고는 그분은 죽었다가 그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이 세상의 어떤 한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나되 계속해서 자신을 나타냈던 자가 과연 있었던가? 그리고 수십년 아니 수백년이 지난 다음에 다시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던가? 그러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은 죽으면 그후에는 곧바로 심판을 받게 되고, 이어서 영의 세계의 어느 한 쪽으로 들어가게 된다(히9:27). 그곳의 한 쪽은 천국이요 다른 쪽은 지옥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인간의 영혼은 함부로 다른 세계로 왔다갔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영계의 법칙이다. 즉 천국에 있는 영혼이 이 세상으로 나올 수 없으며, 지옥에 있는 영혼도 이 세상으로 나올 수가 없다(눅16:26). 다만, 천국에 있는 영혼이 이 세상으로 올 때에는 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분이 데리고 오는 경우 뿐이다(계19:14, 유1:14, 살전3:13). 비록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마음대로 이 세상에 왔다 갔다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아직까지 모든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그러한 경우를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다음에 부활하여 사람들에게 나타내보이신 예수님을 대수롭지 않게 그냥 보아 넘겨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곧 그분이 사람이 아니라 신(神)이라는 증거, 하나님이라는 증거를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영계의 영역을 자기 맘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없다. 특히 천국과 지옥에 가 버린 사람이 이 세상으로 나올 수가 없다. 다만, 우리가 하도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으니까, 전능자요 창조주이신 예수께서 초자연적으로 우리 영혼을 우리의 육체로부터 분리시켜 천국과 지옥으로 데려가실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전능자이며 창조주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약 예수님이 신 즉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예수님은 죽으신 다음에 혹 부활은 하실 수 있었겠지만(죄를 짓지 아니하셨으니까) 그래서 천국으로 들어가실 수는 있었겠지만, 이 세상에 사람들 앞에 나타나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결코 영계의 한계를 스스로 넘나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40일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나시어 자신이 부활하신 것을 증명해 보이셨다. 제일 처음으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리고 여자들에게, 이어 열 제자들에게, 도마를 포함한 열 한 명의 제자들에게, 갈릴리의 7명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에게 그리고 승천하실 때에는 500여 형제들에게 동시에 나타내 보이셨다(고전15:5~7). 하지만 그때 승천하셨던 예수께서는 신 즉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사도바울에게도 나타나신 것이다(고전15:8). 인간이라면 사실 이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 천국에 들어가 있는 모세나 아브라함이나 주기철목사의 경우 그들이 이 세상으로 나오고 싶다고 해서 과연 나올 수 있을까? 절대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영계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니실 수 가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사람 앞에든지 나타나실 수가 있다. 그러나 만약 예수께서 100% 사람이었다고 한다면, 그분은 부활 후에 사람들 앞에 나타나실 수가 없으셨을 것이다.

  좀 더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신적 존재로 숭배하고 있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마호메드)와 석가모니(싯다르타)가 그들이 죽은후에 과연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나타난 일이 있었던가?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100% 인간이었기 때문에 죽은 다음에 들어간 그 영역에서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지 그들의 가르침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후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해석하고 첨가한 내용들로 가득찬 경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꾸란은 무함마드 사후 800년이 지나서 완성되었고, 불경은 석가모니가 죽은 후 300년이 지나서야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아는가? 다시 말해서 꾸란이나 불경은 후대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지옥에 있는 그들은 경전마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이 세상으로 나와서 말해줄 수가 있을까? 그들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자신은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그만 후대의 사람들이 첨가한 것을 가지고 수많은 추종자들이 그 가르침에만 목매고 있다. 지금도 유대인과 기독교인과 같은 이교도들의 목을 칼로 잘라서 죽이고 있는 이슬람세력을 보라. 자살테러를 감행해서라도 천국가겠다고 뛰어드는 그들을 보라. 그들에게 무함마드가 그렇게 시켰을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후대에 완성된 꾸란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 그렇게 따라 행하는 것이 그들의 결정이요, 그것이 곧 지금 이 세상의 종교들이다. 만약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잘못 알아듣고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하여 무고한 생명을 죽인다면 예수께서는 즉시 나타나시어 말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신으로서 언제든지 사람 앞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함마드나 석가모니는 자신도 영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잘못 행가고 있는 중생들에게 조치를 취할 수 있으랴...

  그렇다면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우리 주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역사고 계시는가? 계3:20에 의하면,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우리 속으로 들어오시어 우리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려 하신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 성도들은 오늘날 어떻게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을 만나뵐 수 있고, 그분을 내 마음 속으로 모셔들일 수가 있을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마음)에 그분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그 일을 행하신다(요일3:24). 다시 말해 부활 후 40일만에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그후로는 직접 나타나시기 보다는 그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고,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면 그에게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전체적인 과정을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 영 가운데로 들어오시어 지금도 교제하고 싶어하시는 것이다. 그 첫번째 증거가 방언으로 말함이다. 성령을 받은 자는 기본적으로 방언을 말하게 되는데, 이것은 죽었던 자신의 영이 살아남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은 자신의 영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드릴 수가 있다(행2:4, 고전14:2). 이것이 바로 방언기도인 것이다. 만약 그때 우리가 우리의 빌 바를 잘 알지 못해 서성이고 있노라면,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도와주신다(롬8:26). 또한 성령께서는 당신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여러가지 표적들로 말미암아 확살히 증거해주신다. 예를 들어, 사람의 상식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기적적인 치유와 회복, 축사(귀신을 쫓아냄) 그리고 환상과 꿈 등으로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성경께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셨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지도해주신다. 또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도 책망함으로 깨우쳐 주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더욱더 예수님을 더 잘 믿을 수 있게 도와주시고 있으시다.

  하지만 무함마드나 석가모니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들의 속성은 단지 사람뿐이기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갇혀있는 감옥에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죽은 후에 사람들 앞에 단 한 번도 나타난 일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을 영으로 가르쳐주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슬람교나 불교를 신봉하는 자는 오로지 무함마드나 석가모니가 남겼다고 하는 가르침에만 목을 매고 살아가고 있다.

  지금 이 말씀을 증거하고 있는 나 자신도 사도바울처럼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꿈으로 주님을 만나보았다. 그리고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경말씀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고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 또한 병들었을 때에는 기도함으로 나음을 입고 있으며, 날마다 방언으로 기도함으로 내 영이 하나님과 더 깊이 교통을 나누고 있다. 그렇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그분이 신 즉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갈 길을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있음을 가르쳐준다. 이것은 그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바로 그 일을 주님이 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800_2015-04-05 지금도 그분만이 행하시고 있는 일들(계3;20).ts_20150405_184848.851.jpg


 


Articles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