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과 가문의 저주를 끝낸 한 여인(마15:21~28)_2021-04-11(주일)

by 갈렙 posted Apr 1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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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hGTzR4PIjBQ
날짜 2021-04-11
본문말씀 마태복음 15:21~28(신약 26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가나안여자,함의아들가나안,흉악한귀신들린딸,가나안의저주,가문의저주,우상숭배의죄,종이되는저주,귀신들림의저주,책임과믿음과인내,민족적인저주종식,가문의저주종식

1. 들어가며

  이 세상 모든 일을 들여다보면 원인이 없는 것은 없다. 모두가 다 원인이 있어서 어떤 결과가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그 원인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인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어떤 요인에서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아니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왜 나는 그렇게 수고하고 노력하는데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일까? 내 몸의 병은 왜 이리 잘 낫지 않으며, 내 몸의 건강은 이리도 회복이 더딘 것인가?" 그런데 이런 것에도 다 어떤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 원인을 "저주"라는 용어를 동원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의 저주에는 그것이 민족적인 것도 있으며, 가문에서만 발생하는 가문의 저주도 있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어떤 가나안 여인이 안고 있는 민족적인 저주와 그녀의 가문에 드러워진 우상숭배의 저주가 무엇이었고, 그것이 어떤 열매를 맺어왔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이 여인은 과연 저주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현재 내가 안고 있는 여러 저주의 문제는 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2. 예수님을 찾아온 이 가나안 여인은 대체 누구인가?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인가? 그리고 이 여인은 대체 누구였길래 예수님을 찾아온 것인가? 우선 이 여인은 결혼한 여인이었고 작은 딸을 둔 여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15:22,막7:25). 그렇지만 남편에 대한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 여인에 대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말씀은 서로 다른 종류의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첫째,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가나안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마15:22). 그리고 둘째,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헬라인"이자 '수로보니게 족속의 사람"이라고 소개해주고 있다(막7:26). 그럼, 그녀가 "가나안 사람"이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이 여인이 최소한 예수님과 같은 민족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셈족 계열의 사람이요, 이 여인은 함족 계열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어찌 보면 둘은 서로 앙숙지간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헬라인"이었다는 말은 그녀가 최소한 헬라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배운 사람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리고 그녀가 "수로보니게 족속"이었다는 말은 그녀가 "시리아-페니키아" 족속이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시리아"는 이스라엘 땅의 북쪽에 위치한 국가 시리아를 가리키는 말이며, 페니키아는 두로와 시돈을 중심으로 탄생한 해양도시국가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해양문화 도시 출신의 여자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조금 배운 여자였고 부유한 집안의 여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3. 이 여인은 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인가?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물론 본인이 가진 직접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어린 딸에게 있는 귀신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귀여운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하여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애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어느날 소문을 듣게 된다. 죽은 자도 살리며 귀신도 쫓아내고 바람과 풍랑도 잔잔케 하시는 분이 자기의 가까운 마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는 유대 장로들과의 안식일논쟁으로 인하여 더이상 소모적인 논쟁을 피하기 위해 갈릴리 가버나움을 떠나 두로지역으로 들어와 계셨다. 그때였다. 예수님을 소문을 듣고 찾아온 그녀는 큰 소리로 주님을 찾았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마15:22)" 그런데 사실 사람치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누군가를 찾아오지만 이처럼 염치 불구하고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이 여인은 큰 소리를 외치며 주님께 나아온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님을 찾아가서 조용히 말한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방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민족의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녀를 돌려보내려고 하는데, 그녀는 오히려 이제는 엎드려 절을 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주님께서도 그녀를 향하여 메몰찬 말을 던진다. 아마도 그녀를 시험하는 모양 같으시다.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합당한 것이 아니니라" 이 정도의 말을 들었다면 아마도 누구나 화를 내고 예수님을 떠나가버릴 만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당신 민족에게는 자녀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시고, 가나안의 이방민족에게는 개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어떤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정심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단 한 마디의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예수님을 감동시키고 말았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주여, 그렇습니다. 어린 개들도 역시 주인의 상으로부터 떨어지고 있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오,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되어라. 너의 이 말 때문에 평안히 가라. 귀신이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기 때문이니라"(마15:28, 막7:29). 그녀는 자신이 딸의 문제를 그 시로부터 해결받았다. 그런데 그녀의 행동은 단지 자신의 딸의 문제만을 해결받은 것이 아니었다. 이는 가나안민족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인 저주를 풀어버린 결과를 낳게 하였고, 자신의 가문에 드리워진 가문의 저주를 하루 아침에 풀어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4. 이 여인이 가지고 있었던 2가지 저주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자신이다(요8:24). 그러므로 과거 노아의 아들이었던 함과 그의 손자였던 가나안에게 내렸던 저주는 곧 예수님이 내린 저주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있는 가나안 여인에게 주님은 노아 때의 일을 기억하고 계셨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일은 가나안민족에게는 민족적인 저주를 안겨주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날 예수님을 찾아와 문제를 해결받게 된 것은 민족적인 저주를 뚫고 그 문제까지 해결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녀에게는 어떤 민족적인 저주가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창세기 9장의 사건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홍수 후에 노아가 술을 먹고 취하여 벌거벗은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을 본 함이 자신의 형제들에게 누설한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노아는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 일은 노아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일이 되었고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함은 직접적으로 저주를 받지는 않았다. 아마도 홍수사건을 노아와 같은 겪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도 훙수이후 함에게도 축복을 명하셨기 때문일 것이다(창9:1). 한편 저주는 그때 그의 넷째아들이었던 가나안에게 내려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함이 노아의 수치를 드러낸 사건에 가나안 자신도 어떤 형태로든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되었든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만들므로, 부모의 명예에 손상을 끼친 이유로 인하여, 함의 아들 가나안은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럼, 함의 아들 가나안이 받은 저주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평생 남의 밑에 들어가 종으로 살아야 하는 저주였다. 우선은 자기의 형제들의 가장 천한 종이 되는 저주를 받았으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종이 되어서 살아야 하는 저주를 받은 것이다(창9:25~27). 그러므로 그녀는 B.C.2500년경부터 이미 종이라는 민족의 저주 아래 놓여 있었던 여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가문에도 저주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딸 아이가 귀신이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귀신이 들려있다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귀신이라고 해서 함부로 사람의 몸 속에, 특히 어린아이의 몸 속에 그냥 들이밀고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 합법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애굽기 20:5에 의하면, 사람에게 나타나는 저주가 우상숭배가 그 원인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므로 그녀의 어린 딸에게 귀신이 들어간 것은 아마도 그녀의 가문에 우상숭배의 저주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그녀의 가문에 왜 우상숭배의 저주가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그녀가 태어난 가나안 땅이 우상숭배의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가나안이 우상숭배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땅은 약 천 년이 지난 다음 이스라엘에게 넘어가게 된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그때 가나안의 아들들은 대부분 여호수아의 군대에게 죽임을 당했거나 혹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종들이 되었다. 그중에 기브온 거민들은 나무패며 물깃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함의 넷째아들 가나안과 그의 자식들이 살고 있던 최북단지역과 최남단지역은 이스라엘의 공격에도 살아남은 지역이었다. 그중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시돈과 두로지역은 이스라엘에게 완전히 먹힌 지역은 아니었다. 나중에 또 시간이 흘러가니, 이 지역은 수리아에 의해 통치되기도 하였고, 페니키아라는 국가를 이루기도 하였는데, 이 때 이들 지역사람들이 숭배하던 신은 바알신과 아세라신이었다. 예를 들어, 북이스라엘의 제7대왕이었던 아합왕(B.C.874~853)은 두로와 시돈의 왕이었던 엣바알의 딸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 여인이 시집오면서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가지고 들어와 북이스라엘을 온통 바알신앙으로 바꾸어버렸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가나안사람들의 신은 바로 바알신과 그의 아내격인 아세라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바알신을 섬기고 있던 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는 우상숭배로 인하여 가문의 저주가 동시에 내려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그녀의 딸에게 귀신이 들어간 일인 것이다. 

 

5. 이 여인은 2가지 저주를 어떻게 끝내게 되었는가?

  가나안 여인은 그날 예수께 나와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그녀가 이룩한 놀라운 사실에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녀가 자기민족 대대로 내려온 저주를 없앴기 때문이요, 또한 자기의 딸에게 들어있는 귀신들을 쫓아냄으로 가문의 저주도 같이 타파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과연 어떻게 자기의 민족과 가문에 드리워진 저주를 그날 끝낼 수가 있었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녀의 책임의식 때문이다. 그녀가 자신의 딸을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했을 때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있는 문제를 남의 탓이나 조상의 탓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은 엄연히 자신이 부여안고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딸의 문제를 자신의 조상이나 가문의 탓이라고 여겼다면 그녀는 평생 남의 탓만하다가 원망하고 불평하는 삶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그 문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이기 때문에 자신이 그 문제를 오롯이 해결하겠다고 생각했기에 그 문제를 풀 수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녀의 믿음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주권자로서 오직 예수님을 상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예수님을 부를 때에 어떻게 부를 것인가 그리고 그분에게 어떤 신앙을 고백할 것인가에 대해 아주 많은 신경을 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맨 처음에 외칠 때에,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큰 소리로 불렀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님"이라는 말은 가나안인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선언이다. 왜냐하면 가나안사람들에게 주님은 수천년간을 오직 바알신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녀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도 대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구약성경을 통틀어 메시야에 대한 가장 완벽한 칭호가 있다면 그것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때 예수님을 칭할 다양한 다른 이름들을 조사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한 번만 불러도 주님이 얼굴을 돌이켜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칭호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결정한 칭호가 바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외침을 듣고 자신의 얼굴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셨다. 

  셋째, 그녀의 인내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첫 외침은 효과적이었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주님께서는 가나안사람 같은 이방인들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표시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때 당신은 오직 셈 족속의 잃어버린 양들만 관심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대답은 놀라웠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예. 그것은 옳은 일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개들이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먼저는 주님의 잃어버린 양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시고 혹 그 다음 차례가 있다면 개같은 저에게도 관심을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님은 그녀의 반응에 감동하고 말았다. 그 정도면 떨어져 나갈 줄 알았는데, 그녀는 그녀를 메몰차게 대했던 예수님의 반응을 보고도 끄떡하지 않았고 주님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며 주님을 끝까지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람은 한 두 번은 주님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인처럼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찾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그녀는 좀 배운 학식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학식을 이용하여 예수님께 과격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들보다 더 많이 배운 것을 오히려 자신을 더 낮추는데 사용하였다. 그녀의 겸손과 그녀의 믿음이 여기에서도 진가를 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녀는 주님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말도 철저히 주님께서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골라서 말했다. 그러자 주님의 마음도 완전히 그녀에게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6. 그녀가 남긴 위대한 신앙의 유산은 무엇인가?

  우리는 가나안인이었던 그녀가 보여준 말과 행동에 경의를 표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이 일로 인하여 2가지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 일로 인하여 주님께서 이방인에 관한 편견이나 제한선을 없애버리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이 때까지만해도 자신의 관심은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부활 후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을 받을 대상을 유대인에게서 이제는 모든 이방인에게까지 넓히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28:19). 그녀로 인하여 유대인이 아닌 자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일로 인하여 우리도 우리 가문의 저주를 이길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자신의 가문의 저주가 우상숭배로 인하여 발생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딸 아이가 귀신이 들린 이유는 그녀의 딸 아이가 지은 어떤 범죄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린 아이가 죄를 지었다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겠는가? 그러므로 그 아이에게 귀신이 들어간 이유는 조상들의 우상숭배의 죄로 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우상을 숭배하면 삼사대까지 죄를 묻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귀신이 그 아이 몸 속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아이에게 들어온 귀신은 이미 몇 대의 윗 세대 내지는 가문이 지었던 우상숭배의 결과로 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녀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주권자로서 기꺼이 바알을 버리고 예수님을 선택했다는 점에서도 놀랍기만 하다. 그렇다. 오늘날 귀신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하는 이유의 핵심은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부족한 것에 있다. 물론 조상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떠한 믿음을 소유하느냐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에게 절대적인 믿음이 보여주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훗날 사도베드로에게 주어진 촛대도 사도바울에게로 옮겨졌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도베드로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보자기 환상을 통하여 그의 마음을 돌이킬 것을 주문하셨다.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왜 더럽다고 하느냐?"(행10:10~15) 이는 주님께서 "내가 이제는 이방인들도 회개케 하여 그들마저도 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는데 왜 너는 안 된다고 말하느냐?"와 같은 뜻이다. 그렇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기꺼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사도바울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그리고 그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약속의 자손이 될 수 있으며, 심지어 하늘나라까지 상속받을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갈3:26~29). 

 

7. 나오며

  자기의 자녀에게 들어온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참된 믿음이 대체 어떤 믿음이어야 할까? 우리는 그 해답을 이 가나안여인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첫째로 자기에게 불어닥친 불행한 사건을 오롯이 자기의 문제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고 진짜 자신의 문제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그녀는 그 문제의 해결이 열쇠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음을 믿었으며, 또한 셋째로, 그것을 해결하는데 중간에 맞딱뜨리는 어떠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결코 흔들리지 아니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있을까? 내게 있는 저주의 문제는 내가 해결하고 말 것이라고 하는 강한 책임의식이 내게 있는가? 그리고 일편단심을 주님만을 내 문제의 해결자로 알고 붙들고 갈 자신이 있는가? 그런 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면, 지금도 저주가 우리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4월 11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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