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저주가 없으며(계22:1~5)_2021-06-20(주일)

by 갈렙 posted Jun 2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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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b5mYHMxRZdU
날짜 2021-06-20
본문말씀 요힌계시록 22:1~5(신약 422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저주의의미,저주의의미의발전,구약에서저주의의미,신약에서저주의의미,선언과재앙,귀신(뱀),대물림,저주의실체,저주의해결,회개와피흘리기까지싸움

오늘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저주의 실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재앙인가 불행인가? 아니면 또 어떤 다른 것인가? 사실 "저주"라는 개념은 구약시대의 개념과 신약시대의 개념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잘 모르면 예수님을 믿고도 저주 가운데서 살아가야 한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 저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가? 여기 그 해법이 들어있다(한 번이라도 끝까지 정확히 들어보시면 우리의 자손이 대대로 복을 받습니다).

1. 들어가며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그 의미에 있어서 어떤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그래서 한 단어가 처음에는 어떤 의미로 쓰였으나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은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그중에서 "저주"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 우리들이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저주"라는 개념으로 승화발전된 것의 하나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저주"라는 개념이 어떻게 창세기에서 쓰여지기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에 이르러 마침표를 찍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저주"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고 저주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증명해 보려고 한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어떻게 하면 이러한 저주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을까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말씀을 통하여 놀라운 영적인 발전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 

 

2. 저주는 이미 끝난 것인가?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실 때에 모든 인류의 저주의 값을 다 지불하셨으므로 저주는 이미 끝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게 한 관련 성경구절로서 갈3:13의 말씀을 언급한다. 갈3:13에 말씀은 이렇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대신 저주를 받으셨기에 저주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저주가 없는 것일까? 그런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갈3:13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다른데 있는 성경말씀과 충돌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충돌구절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한계시록 22:3의 말씀이다. 여기에 보면, "다시(더이상) 저주가 없으며"(계22:3)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장차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천국에서는 더이상 저주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 더이상 저주가 없다는 말은 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저주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고로, 그리스도께서 2천년전에 십자가에서 저주를 담당하셨기에 이미 저주가 사라지고 없어졌다는 말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실제 현실도 저주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성도라 할지라더 여전히 저주를 받는 성도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이론이야 어떻든지 실제 현실에서 과연 성도들이 저주를 받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아니한가? 성도들도 불신자들과 거의 똑같에 저주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성도들도 각종 질병에 노출되고 있고, 사건사고를 당하여 골치가 아픈 일을 겪고 있으며, 손대는 일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자녀의 앞길이 막히기도 하며, 돈은 자꾸 새 나가는데 들어오지는 않고, 시험은 보지만 늘 떨어지고, 부부가 이혼하는 등의 고통을 계속해서 겪고 있는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담당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저주는 이미 끝났다는 해석은 재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성도들을 속량하셨다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3. "저주"라는 말이 처음에는 어떤 뜻으로 쓰였으며, 구약시대에는 또 어떤 뜻으로 쓰였는가?

  "저주"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처음 사용된 단어가 아니다. 사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저주"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사용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저주"라는 단어는 어떤 단어들이 있는가? 신약성경에는 저주라는 단어는 크게 세 가지 정도 있다. 첫째로, "카타데마"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요한계시록 22:3에 한 번 나오는 단어다. 둘째로, "카타라"라는 단어가 있는데, 바울서신에 2번, 기타 공동서신에 세 번 나온다. 특히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카타라"는 갈3:10과 13절에만 나온다. 그리고 셋째로, "아나데마"라는 단어가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저주"라고 번역하기보다는 "파문"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단어다. 그러므로 헬라어로서 저주라는 단어는 "카타라"와 "카타데마"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서로 교차해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그 뜻이 거의 비슷하다. 그렇다면, 갈3:10과 13절에 나오는 "카타라"라는 단어는 대체 구약성경에서 어떤 히브리어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인가?

  구약성경에서 "저주"라는 뜻으로 쓰인 히브리어 단어는 총 5가지가 나온다. "아라르, 켈랄라, 알라, 하람, 카바드"가 있다. 그런데 뒤의 3가지는 그의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아라르"와 "켈랄라"라는 단어가 그 의미와 분야에 있어서 상당히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라르"와 "켈랄라", 이 두 단어는 어떤 의미이며,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첫째,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라르"라는 단어는 일종의 선언으로서 저주를 가리킨다. 히브리어로 "아라르"는 앞으로 이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선포적인 의미요, 선언적인 의미로서의 저주로서 사용되고 있다. 참고로 이 "아라르"라는 단어는 성경에 맨 처음 등장하는 "저주"라는 단어였다는 사실이다(창3:14). 그것의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에서 뱀에제 저주를 내리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아라르)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창3:14)". 이는 뱀에게 어떤 재앙의 저주가 따로 준비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앞으로는 배로 다니고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흙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선언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때 "저주(아라르)"는 앞으로 뱀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선언인 것이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재앙이나 불행을 더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선언적인 의미가 강한 단어라고 하겠다. 또한 창9:25에서도 "가나안은 저주(아라르)를 받아 그의 형제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다. 여기서도 아라르는 가나안에 대한 미래를 선언한 것이다. 즉 가나안 족속이 앞으로 그의 형제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선언인 것이다. 특히 모압왕 발락이 발람선지자를 불러 이스라엘에게 저주를 퍼붓도록 했을 때에도 "아라르"가 나온다. "[이스라엘 민족이]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데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이스라엘 백성)을 저주(아라르)하라(민22:6)." 이것 역시 이스라엘 민족에게 저주가 임하도록 선언해 달라는 의미로서 "아라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켈랄라"라는 단어는 형벌이나 불행 그리고 재앙으로서의 저주를 가리킨다. 이 개념은 히브리어 "베라카(복)"이라는 개념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래서 야곱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베라카)은 고사하고 저주(켈랄라)를 받을까 하나이다(창27:12)"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모세에게 "내가 오늘 복(베라카)과 저주(켈랄라)를 너희 앞에 두나니(신11:26)"라고 말씀하시면서, "만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켈랄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신28: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사용하셨던 "저주"라는 단어는 "아라르"로서 장차 그렇게 될 것을 선포하는 저주였다면, 시내산에서 율법말씀이 주어진 이후에는 하나님의 율법말씀에 불순종했을 때에 어떤 형벌로 주어지는 재앙으로서 저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이때 재앙으로 주어지게 될 저주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것에는 각종 육체적 정신적인 질병들, 기근과 전쟁으로 인한 빼앗김과 가난, 수고는 내가 했지만 누리지 못함, 토지소산에 열매가 맺히지 않음, 자손이 없어짐 등 갖가지 재앙들과 불행들이 있다.

 

4.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말씀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갈3:13의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알 것은 이 문장의 "저주"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구약성경에서 가져온 인용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 문장에 등장하는 "저주"라는 단어는 선언으로서의 저주인 "아라르"와 재앙으로서의 저주인 "켈랄라"가 함께 쓰인 문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이 갖게 된 자유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갈3:13의 후반부를 보자. 여기에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는 말씀이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신21:23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나오는 저주는 재앙과 형벌로서 주어지는 저주 곧 "켈랄라"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인류의 모든 죄들에 대한 형벌로서 십자가(나무)에 달리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러한 대속의 형벌 때문에 인류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둘째, 갈3:13의 전반부를 보자. 여기에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받았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일종의 선언과 같은 것으로서, 여기에 사용된 저주의 의미는 "아라르"다. 왜냐하면 갈3:10에서 "무릇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이 저주 아래에 있는 자"인데, 이것은 "누구든지 율법책이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고 하였다는 말씀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했다. 이는 사실 신27:26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럼 신27:26에 나오는 "저주"는 어떤 저주인가? "아라르"인가, "켈랄라"인가? 그것은 "아라르"이다. 신27:26을 보자.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라르)를 받을 것이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함을 입었다는 것은 일종의 선언으로서의 저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위의 2가지 사실을 정리해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았다는 말은 그분이 형벌로서의 저주를 받으셨다는 뜻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함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형벌로서 저주를 담당하셨으니 누구든지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원문에 따라 갈3:13을 번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셔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을 이제 아십시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이제부터 여러분도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5. 성도들은 어떻게 할 때에 실제적으로 저주에서 벗어나게 되는가?

  결국 갈3:13에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말은 히브리어 원문으로 본다면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저주가 다 끝마쳐진 것이 아니다. 그때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 우리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붙들어서 실제로 우리가 처한 저주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의 사도들은 성도들이 실제로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회개하라"는 것이다. 지은 죄를 자백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로 하여금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다 해 마치신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도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가 지은 죄들을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 고로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저주를 받고 있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우리 조상이 지은 죄를 자백하지 않아서인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지금도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지 않아서인 것이지 결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6. 신약에 들어와서 저주의 실체는 어떻게 바뀌었는가?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구약에서의 저주의 실체와 신약에서의 저주의 실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사용하신 저주는 선언으로서의 저주였다. 하지만 십계명이 주어진 다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형벌과 재앙으로서의 저주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저주는 곧 재앙으로 결론지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불순종하여 죄를 지었으면 재앙을 받으면 되었다. 물론 그 죄에 그 재앙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재앙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저주도 끝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때에도 신약과는 달랐다.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인 선한 천사를 보내 재앙으로 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의 저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한 천사가 순종함으로 재앙이 내려졌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재앙은 단회적인 것이었다. 고로 구약시대의 저주의 실체가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재앙이나 형벌이었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약에 들어와서는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탄생하기 직전에 하늘에 있는 타락한 천사들이 쫓겨내려와서 귀신이 되었기 때문이다(계12:3~5).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타락한 천사들이 "용과 뱀들"이 된 것이다(계12:7~9, 눅10:18). 그리하여 이때부터 귀신들은 사람들 속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구약시대에도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들이 간혹 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 탄생 직전에 하늘에서 쫓겨내려온 천사들은 집단적이었다. 하늘의 천사들의 1/3이 사탄을 타라 쫓겨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음부에 사탄의 왕국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들은 저주받은 채 쫓겨났기에 그들의 모양이 흉측하게 변하였다. 그들의 최고 대장 루시퍼는 큰 용이 되었고 나머지도 다 용들(지위가 높은 놈들)과 뱀들(지위과 낮은 귀신들)이 되어 공중과 이 땅과 음부로 쫓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귀신들이 직접 사람의 몸 속으로 침투해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그러한 일이 거의 없었다. 아니 없었을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성령께서 단 한 번도 사람의 영 속에 들어간 일이 없었고, 귀신들도 들어간 일이 없었던 것 같다. 루시퍼가 그의 천사들과 더불어 하늘에서 쫓겨나기 전까지는 그랬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예수 탄생 직전에 용과 그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쫓겨났다. 뱀이 되어서 말이다. 그러자 그때부터 귀신들도 사람의 몸 속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참고 성령께서도 오순절 이후부터 사람의 영 속에 들어오셨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이르러 저주의 실체는 재앙이나 형벌이 아니라 이제는 귀신들이 된 것이다. 곧 뱀들이 저주의 실체가 된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함으로 심판을 집행했다. 즉 전쟁이나 기근과 전염병과 같은 재앙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다 하나님의 허락을 따라 일을 수행했다. 하지만 신약시대 이후 귀신들 곧 뱀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 하나하나 허락받지 않는다. 죄를 지으면 그냥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다. 특히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을 때에는 3~4대까지 사람들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출20:5). 그러므로 신약시대에 이후 저주는 귀신들이 그 실체인 것이고, 귀신들은 인격체이므로 귀신이 쫓겨나가지 않는다면 귀신들은 이제 그 사람의 자식과 자손에게 계속해서 내려감으로 반복적으로 저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성도가 회개하여서 자기의 몸에서부터 귀신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귀신은 계속 자기자식과 후손에게 내려가서 계속해서 저주를 줄 것이다. 적어도 출애굽기 20:5의 말씀에 따라 자손 3~4대까지는 말이다. 

 

7. 귀신은 아무에게나 들어갈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귀신은 아무 사람에게나 들어갈 수 있는가? 그건 아니다. 귀신은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에만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짓지 아니한다면 귀신은 단 한 사람에게도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에게 들어오실 때에는 문을 노크하고 들어오시는데, 귀신이 어떻게 함부로 우리 몸속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다 합법적으로 들어온다. 즉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에 우리 몸 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물론 우리 몸 속에 귀신이 들어올 때에는 다 뱀의 형상으로 들어온다. 왜냐하면 첫째로, 요일3:8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로,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이긴 자였던 뱀에게 "너는 살아있는 동안 흙(아파르)를 먹을지니라"고 저주를 선언하셨는데, 이때 흙은 사람의 몸을 만든 재료였기에(창3:14), 귀신들은 사람의 몸을 자기의 집과 양식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또한 셋째, 예수께서도 귀신들이 사람에게 나간 후에 자기 집으로 다시 들어온다고 말씀하심으로, 사람의 몸이 귀신의 집이라는 것을 말씀해주셨다(마12:43~45). 그러므로 신약시대 이후 저주는 이제 인격체인 귀신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제 귀신들은 사람들이 죄만 지으면 그 사람의 몸을 제 집 드나드는 것처럼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8. 신약시대 이후 성도들은 저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로 신약시대 이후 성도들이 저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의 몸 속에 침투해 있는 귀신들(뱀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귀신들이 우리 몸 속에 남아있는 한 온갖 불행과 재앙과 고통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의 몸 속에 있는 귀신들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지은 죄들을 낱낱히 회개하는 것 뿐이다. 회개할 때에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뿐더러 우리의 몸도 깨끗해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요일1:9). 어떤 사람은 회개는 한 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니다. 구약시대를 보라. 누가 어떤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에 해당되는 제물을 바쳐서 제사드렸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지은 죄만 용서를 받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범죄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범죄할 때마다 귀신이 우리 몸 속에 들어왔다고 쳐보자, 그 놈들이 나갈 때에 과연 한꺼번에 나가겠는가? 결코 아니다. 한 번 회개하면 한 개의 영만 나가는 것이다. 고로 내가 누군가를 10번 누군가를 미워했다면 10번을 미워했다고 자백해야 귀신이 비로소 그때 다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어쩌면 시간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니 처음 믿을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회개를 많이 할수록 그는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얼마나 회개를 했느냐에 따라 우리와 우리의 자손이 더이상 저주를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9. 나오며

  요한계시록 22:3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기쁨과 감사를 선물해준다. "다시는(더이상) 저주가 없으며"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에는 귀신들이 한 놈도 없기에 천국에서는 우리가 더이상 저주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가 몸붙혀 사는 동안만큼은 귀신들과 싸워야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은 죄 때문에 들어온 영들도 다 내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 우리는 회개를 지속적으로 해 나가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회개를 하찮은 것으로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은 일평생 저주와 씨름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자. 혹 자신이 어떻게 회개할 줄을 모른다면 "회개기도문"을 구해서, 그것으로 160번 이상 회개를 해보라. 그러면 기적이 나타날 것이다. 이것에 대한 수많은 임상보고들이 올라오고 있기 때문이다. 회개해 보라. 그러면 나와 내 가정에 있는 저주들이 벗겨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회개를 누가 대신해줄 수는 없다. 나와 내 가정은 내가 회개함으로서 저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저주로부터 지켜낼 수도 있다. 회개만이 저주와 영원히 이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21년 06월 20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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