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속(救贖)받은 것인가 구원(救援)받은 것인가(골1;13~14, 빌2;12)_2021-10-31(주일)

by 갈렙 posted Oct 3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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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baHIPRHvQRE [혹은 https://tv.naver.com/v/23299443 ]
날짜 2021-10-31
본문말씀 골로새서 1:13~14(신약 325면), 빌립보서2:12(신약 319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구원과구속의개념,구원과구속의차이,구속은구원의방편,고엘제도,

구원과 구속이라는 단어는 알 것 같으나 설명을 하라고 한다면 설명하기가 꽤 쉽지 않은 기독교 용어다. 구원과 구속이라는 용어는 때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나는 현재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 아니면 구원을 받고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앞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인가? 구원을 위한 구속이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며, 우리는 어떻게 할 때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여기 완전한 구약의 예표와 더불어 그 해답이 있다.

1. 들어가며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믿는 이들 중에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었으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에게 헬라어 원문을 들여다 보셨는지 묻고 싶다. 한글 성경은 사실 번역문인 것이지 그것 자체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영감된 말씀이라고 할 수 없는데도 한글 성경에 그렇게 나왔으니 자신은 그것을 진리로 믿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실수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것들은 헬라어 원문 성경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특히 구원론과 관련된 본문들은 더더욱 그렇게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있는 자는 구원이 이미 완성된 것이며, 이러한 구원은 안전하고 불변하다고 말하는 구절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을 계속해서 이루어가라(성취하라)고 하는 말씀은 있다는 사실이다(빌2:12). 그러므로 구원은 나 자신이 구원을 확신한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구원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내가 얻은 구원은 과연 무엇이며, 이 구원은 언제 완성되는지를 성경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하여 '구원'이라는 개념과 '구속'이라는 개념을 함께 비교 검토해 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구속을 받은 자인가 아니면 구원을 받은 자인가? 하나님은 구원자이신가 아니면 구속자이신가를 살펴보자.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여정 속에 어디쯤 와 있는지를 돌아보고 구원을 이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2. 구원에 관한 성경적인 진술은 무엇인가?

  구원에 관한 성경적인 진술 가운데 오늘 우리는 두 구절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골로새서 1:13~14의 말씀이요, 또 하나는 빌립보서 2:12의 말씀이다. 그런데 골로새서에 나오는 말씀은 한 마디로 신실한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며 동시에 지금도 구원받고 있는 중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빌립보서에 나오는 말씀은 구원은 앞으로 얻어야 할 미래적인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선 두 구절을 살펴보자.

골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건져내셨고)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가진다. 가지고 있다.)

  먼저, 골로새서 1:13~14의 말씀을 보자. 사도 바울은 성도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골1:1)을 향하여 말한다. 이들은 이미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난 자들이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겨진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속량 곧 죄사함을 얻고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본문 중 14절을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원문성경인 현재형으로 번역하지 않고, 과거형이나 현재 완료의 형태로 번역하고 있음을 본다. 즉 '우리가 속량(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본문을 그렇지 않다. 이 본문은 과거형도 아니며 현재 완료형도 아니다. 오히려 이 문장은 현재형 내지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실한 형제들이란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그때에도, 여전히 속량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고 있는 상태이며, 그러한 자들 중에 회개를 통하여 죄사함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두 번째 말씀을 살펴보자. 

빌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런데 골로새서의 본문과는 달리 빌립보서의 말씀은 구원을 과거형이나 현재 완료형으로 표현하지 않고 있다. 이 본문은 또한 현재형도 아니다.오히려 두렵고 떨림으로 성취해야 할 미래의 일로 표현하고 있다. 즉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문장은 헬라어 원문상 '너희 자신들은 [어찌하든지] 계속해서 구원을 완성해 가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도에게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진정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인가? 

 

3.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구약성경에 속하지만 가장 신약성경다운 성경책이 한 권 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서'다. 그중에서도 이사야 40~66장의 말씀은 거의 신약성경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사야 40장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등장한다. 마치 세례 요한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53장에 가면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어린 양이 나온다. 그리고 66장에 가면 새 하늘과 새 땅도 나온다. 이것도 역시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런데 제2이사야라 불리는 이사야 40~66장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칭하는 대명사가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그가 '구원자'요 '구속자'라는 칭호다.

사49:26 내가 너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자기의 살을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이 말씀의 뒷부분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우리말과는 달리, "왜냐하면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야곱의 전능자는 네 구속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원자'이시며 동시에 '구속자'라는 것을 사람들이 장차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구원자'라는 말과 '구속자'라는 말은 같은 단어인가 아니면 다른 단어인가? 히브리어를 보면, 이는 각각 다른 단어이다. 먼저 '구원자'라는 단어는 '예수아'이며, 이 단어는 원래 동사 '야솨'에서 온 것이다. 동사 '야솨'는 '구원하다. 구출하다. 구조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아'는 '구원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구속자'는 이와는 전혀 다른 단어이다. 왜냐하면 '구속자'는 '고엘'이라는 단어로서 이 단어는 원래 '가알'이라는 동사에서 왔기 때문이다. '가알'이라는 동사는 '되사다. 도로 찾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수행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고엘'이라는 단어는 '구속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때로는 '기업 무를 자'라고 번역되기도 한다(레25:25, 룻4:1). 

 

4. 구원과 구속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인가? 아니면 구속을 받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사람은 '구속'이라는 방편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구속'이라는 것도 이미 끝이 난 구속의 상태가 있으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 있으며,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구원과 구속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먼저 '구원'이란 인간이 어떠한 좋지 않은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건져내어 구출하신다는 뜻으로서, 성경에서 구원은 이러한 전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즉 사람이 죄를 지어 죄와 죽음과 마귀의 속박에 매여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건져내어(구출하여)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전 과정을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구속'이란 이와 다른 뜻이다. '구속'이란 하나님께서 이러한 구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구원의 방편을 일컫는 말로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어떤 일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구속의 과정을 통하여 결국에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과 구속을 우리가 경험할 때에 가장 중요한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구속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라고 한다면, 구원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지만 우리의 반응에 따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5. '구속'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구약에서 '구속'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인들의 '고엘' 제도를 알아야 한다. '고엘'이란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구속하는 자'요, '무르는 자'를 일컫는 히브리어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속'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율법 중에서 희년법이라는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희년법에서 고엘 제도는 이스라엘 사회에 필요한 자유와 해방의 법으로서, 어떤 사람이 위기를 당했을 때에 그 사람과 가까운 근족(고엘)이 그 사람을 대신 회복시켜 주라고 하는 명령을 가리킨다(레25:25). 이때 이러한 책임을 수행할 자를 일컬어 '고엘(구속자=redeemer)'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레위기 25장에 보면 고엘이 책임져야 할 것이 총 5가지 정도라는 사실이다. 

  첫째, 근족이 토지를 팔았을 경우 그 사람의 땅을 도로 사 주어야 한다(25절)는 것이다.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레25:25)"라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근족이 노예가 되었을 경우에는 돈을 지불하고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47-49절)는 것이다. "만일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은 부유하게 되고 그와 함께 있는 네 형제는 가난하게 되므로 그가 너와 함께 있는 거류민이나 동거인 또는 거류민의 가족의 후손에게 팔리면 48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49 또는 그의 삼촌이나 그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 그의 살붙이 중에서 그를 속량할 것이요(레25:47-49)"라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근족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에는 그 과부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 주어야 한다(신25:5-10; 마22:24)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의 구체적인 실례가 바로 룻기서에 나오는 보아스의 예이다. 넷째, 근족이 누구에게 죽임을 당했을 경우에는, 그를 복수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민35:9~28)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째, 친족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경우에 따라 친족의 죄값을 대신 치러 주어야 한다(민5:8)는 규정도 있다. 이것 전체를 '구속'이라는 말하며, 이것을 행하는 자를 '구속자(고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6. 고엘 제도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어떻게 설명해 주고 있는가? 

  그런데 방금 살펴본 고엘 제도를 분석해보면, 이 제도는 완전히 우리를 위해 고엘이 되신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한 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엘’ 제도는 인류가 범죄하여 죽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기업을 잃고 쫓겨나게 된 상태에 놓이자,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류의 근족(고엘)이 되시어 사람으로 오셨음을 말해주며, 댓가를 치르시고 인류를 건져내어 해방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인류를 당신의 신부로 삼으시고 신랑이 되어주시며, 잃어버린 기업을 되찾아 주려 오신 분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적용해 보면 이렇다. 첫째, 죄는 인류가 지었지만 그로 하여금 영원히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수께서 대신 죄값을 죽음으로 치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죄를 지음으로 인류가 받아야 할 고통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감당하신 것을 말한다. 셋째, 예수께서 오시어 인류를 죄짓게 만든 원수 사탄 마귀의 머리를 박살 내어 복수해 주신 것을 가리킨다. 넷째, 예수께서 마귀를 이기심으로 죄와 죽음과 사탄 마귀로부터 우리 인류를 영원히 해방시켜 주신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다섯째, 그리스도께서 과부가 된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통해 구원받을 자를 낳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던 인류를 천국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고 계심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구약의 '고엘제도'는 영락없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엘이 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7.  고엘 제도가 실제로 실행된 사례가 있었는가?

  그렇다면 실제로 이러한 고엘 제도가 실행된 적이 있는가? 있다. 적어도 개인적으로 실행된 예도 있으며, 민족적으로 실행된 예도 있다. 

  먼저, 개인적으로 실행된 예를 보자. 그것은 룻기서에 나온다. 베들레헴에 유다 지파 사람으로서 엘리멜렉이라는 인물이 살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나오미였는데, 그 땅에 기근이 심하자 엘리멜렉은 자신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  땅에 가서 살게 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멜렉이 죽고 만다. 그러자 나오미는 두 아들을 장가 보내는데, 그 곳 사람인 룻과 오르바를 며느리로 얻게 된다. 그런데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말론과 기룐도 역시 죽고 말았다. 그러자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며느리를 떼어놓으려 한다. 그때 오르바는 모압에 남게 되지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가게 된다. 그러자 가난해진 나오미는 남편의 땅을 팔려고 내놓는다. 그러자 이러한 사실을 들은 보아스라는 근족이 룻의 효심과 신앙심을 알아보고는 엘리멜렉과 그의 아들들인 말론과 기룐의 땅을 사려고 한다. 하지만 서열로 치자면 그는 두 번째 순번이었다. 첫 번째 서열을 가진 '기업 무를 자(고엘)'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고엘로서 그 땅을 사기를 원했다. 하지만 과부 룻까지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말론의 아들로 입적시켜야 한다는 말에 그만 그는 포기하고 만다. 결국 보아스가 그 땅을 사서 나오미에게 돌려주며, 그는 과부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을 낳고는 그 아들을 말론의 아들로 입적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엘 제도이 법이 시행될 때에 근족 중 순번을 따라 적용되는데, 그것은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있고 그것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두 번째로 이 제도가 민족적으로 실행된 경우를 보자. 그것은 출애굽기에 나온다. 이때 근족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 애굽땅에서 종노릇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으로부터 구속하여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인도하신다. 그런데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시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들을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속전으로 죽게 하셨다. 그래서 그날 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집에서 수만 마리의 양이 죽어 갔다.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할 사람 대신에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을 피 흘려 죽은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때 죽어간 ‘어린 양’은 바로 장차 이 땅에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시러 오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인류의 죄를 예수님에게 넘긴 뒤에 이렇게 외쳤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그리고 사도 바울도 그분을 유월절 양이라고 했다(고전5:7). 또한 사도 베드로는 이 땅에 죄없이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월절 양이 되실 수 있었다고 하였다(벧전1:18~20). 그런데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왔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합당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출애굽하여 광야에 나오게 되었더라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는 못 들어간다는 것을 말해준다. 

 

8. 고엘 제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구속'에 관한 영적 비밀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고엘 제도를 통해 알 수 있는 구속에 관한 영적 비밀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우리의 고엘이 되어 주신 우리 주 예수님께 영원무궁토록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아무도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근족도 결코 아니었다. 그분은 영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요3:24). 그런데도 그분은 우리가 죽게 되었고 마귀의 포로가 되어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계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우리를 위해 고엘이 되어 주신 것이다. 예수의 성육신은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의 죗값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자신을 속전으로 내 주신 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그날 우리의 원수까지 갚아 주셨다. 사실 그분은 엘리멜렉의 첫 번째 고엘처럼, 고엘로서 의무를 감당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것을 누가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고엘이 되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 영원히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구속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알고 하늘에 마련된 우리의 기업을 얻을 때까지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의 교회 생활은 곧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과 똑같기 때문이다. 광야에 나왔지만 아직 기업을 되찾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죽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교회 생활은 우리의 중간시험대인 것이다. 과연 하늘의 기업을 물려받기에 합당한 자인지를 알아보는 시간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탈락되면 아니 된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상 숭배하면 광야에 엎드려져 죽으면 아니 되는 것이다. 애굽의 음식과 생활을 동경해서도 안 된다. 또한 약속의 땅이 필요없다고 해서도 아니 된다. 왜냐하면 그땅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엘이 되어주셨고 또한 우리를 불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그 땅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잘못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즉시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나라에 들어가도록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면 그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일에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천국에서 받을 우리의 기업은 오직 지금 여기 이 땅에서만 장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의 비유를 보라.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이 있다면 그 일에 충성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19장의 므나의 비유를 보라. 그것은 똑같은 상황에서 충성하고 있다면 더 많이 남긴 자에게 더 많은 기업이 할당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말자. 그리고 충성하자.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에 한 번이라도 더 힘쓰자. 

 

9. 나오며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흑암의 권세에서 이미 벗어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골1:13~14). 그러면 영적으로 볼 때 그러한 사람은 이미 생명의 아들의 영역으로 옮겨진 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류에 대한 구속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구속은 우리가 젖과 꿀이 흐르는 하늘의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아야 끝나기 때문이다. 고엘이 되신 예수께서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합당한 댓가를 치르셨다. 그런데 그 땅은 광야를 통과했던 자에게만 주어졌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중요한 교훈이었다. 출애굽을 통해 구속의 은총을 받았지만 감사할 줄 모르는 자는 다 광야에 남겨졌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 엎드려져 죽었다. 또한 누가 광야에서 죽고 말았는가? 광야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원망과 불평했던 자도 그랬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실 땅에 대한 약속을 믿지 못했던 자도 역시 광야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도 역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 땅에서 남겨질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중에는 단 한 사람이라도 불타 없어져 불못으로 변해 버릴 이 땅에 남겨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이 광야를 탈출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래야 구속의 전 과정을 다 밟게 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니 이것을 위해 이미 주께서 댓가를 다 지불해 놓으셨다. 그러므로 그 땅에 못 들어가게 되는 것은 그분의 책임이 아니다. 다 우리의 책임이요 우리의 몫이다. 그래도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주께서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이다. 다만 우리가 그 땅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 못하여 그 땅에 못 들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2가지에 힘써야 한다. 첫째는 잘못한 일이 있다면 즉시 자백하여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죄 가지고 그 땅에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맡겨 주신 일이나 주님이 부탁하신 일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이 땅에 남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모두가 다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기꺼이 고엘이 되신 우리 주님의 뜻을 받드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2021년 10월 31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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