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28 자유의지는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가?(롬6:12~16)

by 갈렙 posted Jun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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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5-06-28
본문말씀 로마서 6:12~16(신약 247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자유의지와 구원, 노예의지, 선택권, 죄와 투쟁하라, 하나님께 드리라, 육체를 쳐 복종시키라, 미국의 동성애결혼 허용

  이 세상의 보이는 생명체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지난 26일(2015.06.26)은  혹 세계기독교 역사에 치욕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국가이면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 미국이 대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미국연방대법원이 미국은 이제 동성간이라도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다고 최종적으로 결정해버렸던 것이다. 미국의 자녀들은 이제 엄마와 아빠의 돌봄과 사랑을 받고 자랄 수 있는 권한마저 상실케 되었다. 그리고 일평생 엄마라는 말과 아빠라는 말 중에서 하나를 영원히 불러볼 수 없게 되었다. 한 때 동성애 때문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오셔서 심판하던 때와 같이, 이제 미국은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날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미국인들은 대체 어디에 사용했던 것일까?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실 때에 과연 어디에 사용하라고 주셨는지를 말이다.

  너무나 칼빈주의에 물들어 있는 오늘날 한국교회는 더 이상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혹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죄를 짓고 마귀를 따르는 일에 익숙한 노예의지만 있을 뿐이라고 말할 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여 첫번째로 태어난 아들은 가인이며 그리고 둘째가 아벨이다. 그런데 어느날 두 아들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아벨만 제물을 받으셨다. 그러자, 가인은 분노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인아, 네가 선을 행했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를 죄를 다스려야 하느니라(창4:7)." 이 말씀은 죄가 사람의 성질을 타고 올라오더라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정말 인간에게 죄를 다스릴 수 있는 자유의지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가인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출애굽 2세대들에게 들려준 하나님의 말씀을 보자. "내가 오늘날 네 앞에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두었으니,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30:18).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과연 무엇을 버려야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인간 앞에 두신다고 하였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자기자신을 위해 생명과 복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비록 인간이 타락하여 죄악에 물들어 있는 상태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한 것에 대해서 "안 돼"라고 거부할 수 있는 의지가 남아있다는 뜻이다.

  만약 우리 인간에게 오직 죄를 지을 수 있는 노예의지만 남아있다고 하면, 예수님의 하신 말씀은 거짓이 되고 말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7:37~38)"고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비록 죄를 지어 죄악에 물들어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초청에 응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의지는 남아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인간이 비록 죄를 지어 그 생명이 꺼져가는 등불과 같기는 하지만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으며, 상한 갈대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꺾여진 상태는 아니라고 하신 것이다(마12:20,).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에게로 초청하면 우리는 그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태는 되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믿기로 결단하여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심으로 그후부터는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셨다(행2:38). 자유의지가 이전보다 훨신 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성령을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육체를 따라 살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권면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롬6:16)"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자신의 자유의지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 자유의지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성경은 크게 2가지를 권면하고 있다. 하나는 소극적인 측면이요 또 하나는 적극적인 측면이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를 더 이상 육체의 기회 즉 죄를 짓는데 사용하지 말고 죄와 투쟁하는 데에 사용하라고 말씀하셨다(롬6:12~13a).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라(롬6:12~13a)"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몸을 어디에 내주고 있는가? 육체의 욕망에 내주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게으름에 내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어떠한 죄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으니 앞으로는 마음껏 죄짓고 살라고 주신 것일까? 요8장을 보라.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주어진 심판은 돌에 맞는 죽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그녀를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여, 하나도 없나이다." 그 때 주께서 최종적으로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요8:11)" 과거, 그녀가 지었던 죄는 그냐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과거의 죄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은 주님께서 대신 담당하실 일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형벌받고 대신 죽으신 것이다. 하지만 그날 예수께서 그녀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은 앞으로 또 간음하라고 용서해 주신 것이 아니다. 과거의 죄는 예수께서 대신 해결해 주실 것이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용서해주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행태를 보라. 그들은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처리하는 데에 회개를 사용하고 있지 않고, 미래에 지을 죄들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악한 것이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죄를 용서해 준 것인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역이용하여 이제는 어떤 죄라도 지어도 괜찮은 것인양 죄를 짓고 있다. 이것은 나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악한 자를 반드시 벌하실 것이다.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쳐야 한다. 그렇게 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죄라도 마음껏 지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하에 죄를 짓는다면 그 사람의 회개는 받아들여지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여,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절대 죄에게 자신을 내주어서는 아니 된다. 바울의 권면처럼 우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지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데에만 써야 하는 것이다(갈5:13).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로써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데에 사용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더이상 죄에게 내주지 말고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이다(롬6:13b).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자기자신을 드리라는 것인가? 사실 이 부분에서 성도들은 잘 모른다. 하지만 마25장의 달란트비유를 보면 금방 감을 잡을 수가 있다. 어떤 주인이 먼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각각 그들의 능력을 따라 자신의 달란트를 나눠 주었다. 그때 주인의 돈을 받은 종들은 어떻게 했을까?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은 장삿일 즉 상업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원문에 보면 저마다 어떤 일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들이 자신이 행한 일을 통해서 이윤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왔을 때에, 그들은 그것을 가져다가 주인에게 드릴 수 있었다.

  그렇다. 대체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뚜렷히 알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먼저 자신의 은사와 달란트가 무엇인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것을 주셨는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왜 지금 나에게 이러한 직책과 자리를 허락하셨는지를 스스로 질문해 보라. 그러면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에스더가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니겠나이까"한 것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하나님께서는 왜 나에게 국회의원의 신분을 주셨을까?" "하나님은 왜 나에게 글을 잘 쓰는 재주를 주셨을까?"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 회사의 CEO라는 직책을 갖게 하셨을까?" 이렇게 질문하면 답이 나온다. 그것이 자신이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 성도들이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것으로 죄를 짓는데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미국처럼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육체의 쾌락을 위해 그러한 권리를 사용하게 된다면 그런 나라와 시민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 그리하면 당신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도 당신의 자유의지를 어디에 사용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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