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뜰에서 살게 될 하늘에서 복 있는 자(시65:1~4)_2022-06-26(주일)

by 갈렙 posted Jun 2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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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d33IE8imov8
날짜 2022-06-26
본문말씀 시편 65:1~4(구약 847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하늘에서복있는자,주의뜰,주의집,주의성전,주의궁전,시온산,예루살렘성,안뜰과바깥뜰,택하심을받은자,주님께가까이나아가는자,기도하는자,회개하는자,충성된종,깨끗한종

다윗이 쓴 시편 65편은 어떤 노래인가? 그는 왜 시온에서 찬송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는가? 그리고 주님의 택함을 받은 자 그리고 주님 부르실 때에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는 왜 천국에서 복된 자라고 언급하였는가? 시온산과 그리고 주의 성전과 주의 궁전은 대체 어떤 관련이 있는가? 내가 천국에서 복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천국에서 우리가 누릴 영광과 신분의 비밀이 놀랍게도 시편 65:1~4의 네 마디의 말씀 안에 다 들어있다.

 

2022-06-26(주일) 주일낮예배

제목: 주님의 뜰에서 살게 될 하늘에서 복 있는 자(시65:1~4)_2022-06-26(주일)

https://youtu.be/3Am7Mhu5huY  [혹은 https://tv.naver.com/v/27599540 ]

 

1. 들어가며

  시편은 어떤 책인가? 그것은 자신이 살면서 경험했던 간증을 기도나 시 그리고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은 그저 단순한 시가책이 아니다. 어떤 것은 자신이 체험한 깊은 영적인 것들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은 이해할 수 없는 표현들도 더러 있다. 그러므로 시편을 시편답게 설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우선적으로 시편은 메시야 예언을 많이 담고 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 그는 적어도 시편 25개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수록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도 부활 후 제자들에게 구약 성경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24:44)"고 하셨다. 그리고 시편은 만약 본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절대 알 수 없는 영적인 비밀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장차 이루어질 천국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아울러 심지어 천국에 있는 생명책과 눈물병까지도 기록해 놓고 있다. 특히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지도 기록해 놓았는데, 회개 없이는 결코 사람의 죄가 용서될 수 없음과 아울러 의인과 악인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는지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경험을 많이 한 후에 이 시편을 읽고 또 묵상한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65편은 대체 어떤 내용이 기록된 것인가? 그리고 이 시편이 말씀하고 있는 장소로서 '시온'과 그리고 '주의 뜰, 주의 집, 주의 성전'은 대체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가? 그리고 시편 기자는 하늘에서 어떤 사람이 복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렇게 복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2. 시편 65편의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에게 시편 65편은 주로 2개 구절이 설교 본문으로 자주 등장한다. 첫째는 2절 말씀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65:2)" 그러므로 2절 말씀은 주로 기도회 때 애용되는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육체이든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임을 전하려 할 때 이 본문을 사용한다. 그리고 둘째는 4절 말씀이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65:4)" 이 말씀은 주로 헌신 예배 때에 사용되는 말씀으로서, 설교자들은 '주의 뜰, 주의 집, 주의 성전'이 오늘날 '교회'라는 의미라면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만족하게 하신다는 본문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적용은 가능한가? 그렇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것은 이 말씀에 대한 적용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이 진정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분이 들으신다는 것이며, 주의 몸된 교회에서 봉사해서 복을 받으라는 말씀인가? 그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쓴 시편 기자가 진정 무엇을 말하려고 이 본문을 썼는지를 찾아가고자 한다. 참고로, 시편 65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1~5절까지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간증하고 있고, 6~8절은 '창조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9~13절에는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곧 '시혜자이신 하나님'을 간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3. 시편 65편 기자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이 시편을 쓴 것인가?

  이제는 우리가 시편 65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이 시편은 누가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 썼는지를 먼저 살펴 보자. 시편들 가운데에는 그 시편이 어떤 상황이나 사건 가운데 썼다는 기록들을 가지고 있는 시편들이 있다. 예를 들어 시편 51편 같은 경우는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어, 이 시편이 어떤 상황과 배경하에 썼는지를 가늠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시편 65편은 그 배경을 알기가 쉽지 않다. 표제어에 설명이 붙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노래의 표제어에는, 다윗이 지은 시편으로서 성가대의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시편은 다윗이 쓴 것이며, 이것을 가지고 다윗 시대에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같은 어떤 지휘자를 따라 불렀던 노래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시편에 수록된 내용을 살펴 보면(나중에 더 자세히 보겠지만) 다윗이 어떤 깊은 영적 체험을 하고 쓴 것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편은 다윗이 자신의 말년의 어떤 시점에 구원자요 창조주와 시혜자이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예배자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4. 시편 65편의 1~4절의 말씀은 다윗의 어떤 영적 체험을 기록한 것인가?

  그렇다면 시편 65편 1~4절의 말씀은 다윗이 체험한 어떤 장면을 기록한 것일까? 얼핏 보기에는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는 자 곧 그분의 성전에 사는 자가 복있는 자라는 것과 주의 뜰과 주의 집과 주의 성전이라는 표현을 통해서는 주님 가까이 나아가며 그에게 찬양을 드린다는 표현을 보고, 혹시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는 제사장들이 복 있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잘못 짚은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제사장이 아닌 다윗이 자신의 경험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요, 그는 유다 지파 사람으로서 왕이 되었기에,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자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지금 땅에 있는 지상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다윗 시대에는 지상에 성전이 없었다. 다만 펄럭이는 휘장 가운데 법궤를 안치하고 있었을 뿐이다. 또한 1절의 '시온에서 찬송이 주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을 보자. 이것은 제사장이 제사를 집례하는 상황이 아니라 어떤 잔치와 같은 상황에서 자기의 순서가 되어 찬송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으로는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주의 성전'이라는 표현은 '주의 거룩한 궁전'이라고 쓰여 있음을 본다. 여기서 '궁전(헤칼)'이라는 말은 주의 집과 주의 뜰이 바로 제사드리는 곳이 아니라 왕이 거주하는 처소로서 궁전이나 궁궐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시편 65편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제사드리는 공간이 아니라 성도가 주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왕의 처소 곧 왕의 궁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다윗은 대체 주의 궁전에서 무엇을 체험한 다음에 이 시편을 쓴 것인가?

 

5. 다윗은 과연 누가 복 있는 자리고 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다윗은 이 시편에서 누가 복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는 그것을 딱 2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는 장차 시온에서 주님께 찬양을 부르게 될 자들이 복 있는 자라고 했다(1절).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러면] 서원이 당신에게 [장차] 완성될 것입니다(1절, 히브리어 직역)" 그는 자신이 서원하여 기도했던 어떤 것이 이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분이 행하신 일을 찬양하기 위해 그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다윗은 지상에 있는 성전에서 서원제에 감사하려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건 아니다. 그가 생전에 왕으로 있을 때에 시온산에는 아직 성전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인가? 그것의 힌트는 '시온'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다. 여기서 '시온'이라는 단어는 시온산을 가리키는 말로서, 다윗이 왕이 된 후에 예루살렘으로 천도를 하게 되는데, 그때에 가나안의 여부스 거민에게서 빼앗아 자신의 왕궁으로 삼은 산이 바로 시온산이었다(삼하5:7). 그런데 자신은 생전에 시온산에 성전을 짓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언급한 시온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장차 들어가게 될 하늘의 시온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땅에 있는 시온산도 처음에는 다윗이 빼앗은 예루살렘 동남쪽의 작은 공간만을 가리켰으나, 나중에는 예루살렘의 동쪽의 대부분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예루살렘 도시를 대신하는 용어로 확대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지도를 보면, 예루살렘이라는 도시 안에 시온산이 있으며, 시온산 안에 다윗의 궁전(궁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장차 성도가 들어갈 천국이 시온산과 예루살렘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즉 현재 천국은 거대한 정방형의 새 예루살렘 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성 한 가운데에 '시온산'이 있고, 시온산의 한 중앙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나님의 처소가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들 중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천국에 시온산이 있다는 것을 이미 언급한 바 있으며(히12:22), 사도 요한도 천국에 올라가 시온산에서 144,000명의 성도들이 서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 광경을 기록해 놓았다(계14:1). 고로 시편 65편은 하늘에 있는 시온산에서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광경을 그대로 묘사해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고로 이 시편은 하늘의 시온산에서 예배하는 성도들이 자신이 찬양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이다.

  둘째는, 시온산 안에 있는 주의 궁전의 주의 뜰 안에 거주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였다(4절). 이때 다윗은 누가 천국에서 복있는 자인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것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시온산 그리고 시온산에서도 주님의 처소, 주님의 처소 중에서도 주님의 뜰 안에 거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거주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보면, 그 의미가 일시적으로 거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혹은 계속적으로 거주한다는 의미 곧 '정착하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예배드릴 때만 한 번 주의 뜰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아예 거기에서 거주하여 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누가 복 있는 자인지는 자명하다. 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갈 뿐만 아니라 주의 궁전의 뜰 안에 거주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주의 궁전의 뜰은 어떻게 생겼으며, 누가 과연 그 뜰 안에 거주하게 되는 것일까? 참고로,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뜰'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기재되어 있다. 즉 주의 뜰은 적어도 두 개 이상인 것이다. 

 

6. 하늘에서 주의 궁전과 주의 뜰은 어떻게 생겼는가?

  천국에서 하나님의 처소는 새 예루살렘 성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 볼 때에는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시온산을 가리키며, 더 좁게는 시온산 안의 한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주님이 계시는 천국의 뜰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떻게 나누어져 있을까? 그것의 예표는 바로 '성막'이자 '성전'과 같다. 왜냐하면 3절 말씀에 보니 그곳이 죄를 사함받는 장소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성경에 나온 바에 따르면, 주의 궁전의 모습은 주님이 모세에게 이 땅에 성막을 지으라고 함으로서 그 모습이 점차로 공개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성막은 그 뜰을 한 개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안뜰'이라는 뜰이다. 그런데 솔로몬 시대에 최초로 성전이 지어지는데, 이때 솔로몬 성전은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설계도를 받아서 지은 성전으로서 이 성전에는 뜰이 2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안뜰'과 '바깥뜰'이다. 그런데 이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된 후 다시 지어졌는데, 두 번째로 지어진 성전은 뜰이 무려 4개가 되었다. 성소가 없는 바깥뜰에는 '이방인의 뜰'과 '여인의 뜰'이라는 뜰이 있었고, 성소가 있는 안뜰에는 '이스라엘(남자)의 뜰'과 '제사장의 뜰'이라는 뜰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뜰의 구분이 천국에 가면 자신의 신분에 따른 거주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막에도 나오고, 에스겔 성전 환상에서도 나온다. 도표로 정리하면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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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누가 주의 성전의 뜰에서 살게 되는가?

  그렇다면 누가 성전의 뜰에서 살게 될까? 성전의 뜰을 넓게 본다면 새 예루살렘 성전 전체를 가리킬 수 있지만, 작게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 주변만을 가리킬 수 있다. 사실 천국에 들어가서 우리가 살 장소는 이미 구획으로 정해져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구획을 넘어서 다른 곳으로 갈지라도 그곳에 집을 짓고 살 수는 없다. 그것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주의 뜰에 정착하여 살게 되는가? 누가 더 주님 더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살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4절 말씀에 그 조건이 2가지로 나온다. 

  첫째, 우선적으로 그곳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아서 이 땅에 보내어진 자들이 살게 된다(시65:4). 시65:4의 말씀을 히브리어로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시65:4[직역] 당신이 택하시고 있고, 가까이 오게 하시고 있어서, 당신의 뜰들 안에 [장차] 거주하게(정착하게) 될 사람은 복된 자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집 곧 당신의 거룩한 궁전(왕궁)에 좋은 것으로 [장차] 만족할 것입니다. 

  그렇다. 주의 뜰들(안뜰과 바깥뜰 혹은 4가지 뜰들) 안에 들어가서 정착하며 살게 될 자들은 두 종류의 사람들인 것이다. 하나는 주님이 택하신 자들이다. 이들은 주님께서 영혼을 이 땅에 보내기 전에 천국의 낙원에 있는 영혼을 불러다가 사명을 주어 이 땅에 보낸 자들이다. 이 땅에는 그러한 자들이 시대마다 있었다. 본문을 보니, '택하신다'는 동사의 시제나 '가까이 오게 하신다'는 동사의 시제나 둘 다 '미완료'구문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때도 그렇게 하셨지만 아직도 그렇게 하시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그럼, 구약 시대에는 누가 택함을 받아 성전에서 봉사했는가? 그것은 단연코 제사장들이었다. "여호와께서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만이 주의 뜰 안에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출19:22). 그중에서 대제사장은 성전의 지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제사장은 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도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이 땅에 보낸 사명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은 자신이 제사장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보자. 예수께서 12제자들을 선택하실 때에 그들이 제자가 되고 싶다고 제자가 된 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 주님께서 그를 지명하여 불러서 당신의 제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의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 준다(롬9:20~21)

  둘째, 주님께서 가까이 오라 하실 때에 그렇게 주님께로 나아가서 쓰임받는 자가 그곳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초청을 받을 때에 그 초청에 응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주님 나라에서 일하라고 초청받을 때에 그대로 응하면 된다. 이것은 마치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이 타락할 때에 하나님께서 제사장은 아니지만 '나실인(일정 기간 동안 자신을 구별하여 주님께 드리는 사람)'을 써서 그로 하여금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구약의 삼손이나 사무엘은 나실인이었으며, 세례 요한과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나실인이었다. 유다 지파 사람이었던 예수께서도 원래는 대제사장이 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율법의 나실인 규정을 따라 예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나실인으로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쓰임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딱 2가지다. 첫째는 주께 기도하여 자신을 서원제로 드리는 자가 그렇게 쓰임받을 수 있다(1~2절). 즉 서원하여 자신을 주께 드리기로 결정한 자가 그렇게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다윗도 역시 유다 지파 사람으로서 제사장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사장이 죽고 거의 없어지자, 다윗도 기도를 통해 주님의 뜻을 이뤄 드리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자신을 주께 드리기로 서원한 바대로 주님께서 그에게 이뤄 주셨으니, 이제 주님께 드릴 찬송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1절). 둘째는 제사장이 아닌 세속에 속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한 자가 그렇게 쓰임받을 수가 있다(3절). 죄악된 말과 죄악된 행동을 하는 죄인일지라도 속죄를 통해 죄용서를 받은 자라면 그도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8. 주님께 쓰임받기 위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주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어도 좀더 주님의 지성소 가까이에 들어가서 그곳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로 나와 있다. 하나는 그가 만일 주님으로부터 택함받아 이 땅에 보내어진 자라면 그는 주님이 맡겨 주신 일에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종으로 부름받은 자라면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거기에 잘 나와 있다. 만약 하늘에서부터 이 땅에 사명을 받아서 내려온 자라 할지라도 그가 만약 악하고 게을러서 맡겨진 일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그는 새 예루살렘 성밖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절대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은 주님이 주시지만 그것을 행하느냐 마느냐는 본인의 결정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실인처럼 서원 기도를 통해 자신을 드리기를 원하는 자는 날마다 회개하여 깨끗한 그릇으로 자신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믿고 회개하여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나실인처럼 드리고 싶어하는 성도들이 더러 있다. 그러면 그는 먼저 더러운 자신을 더욱더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결국 죽어서 거룩한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 누가 더러운 자신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을 주께 드리면, 그는 결국 귀한 그릇으로 쓰임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로 시편 24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의 산(시온산)에 오를 자가 과연 누구이며, 그의 거룩한 곳(지성소)에 설 자가 누구인가?"(시24:3). 이어 그는 손(행동)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시24:4). 그렇다. 회개가 관건이다. 회개를 통해 깨끗한 그릇이 되기만 하면 더욱더 주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는 주님의 지성소 가까이 나아가 예배하고 거기에서 정착하며 사는 자가 되는 것이다. 

 

9. 나오며

  다윗은 그때에 이미 본 것이다. 다윗은 장차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이 어느 위치에서 예배를 드리며, 또한 어떤 처소에서 영원히 거주하며 살게 되는지를  본 것이다. 다윗이 시편 65:4에 언급한 "주의 뜰들"은 바로 성도들의 신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의 뜰을 넓은 의미로 본다면, 그곳은 새 예루살렘 성 전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좁은 의미로 본다면, 주님의 보좌 가까이 위치한 지성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우리가 어떤 장소에 앉아 예배를 드리며, 그리고 어디에서 거주하게 될른지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택정함을 받아 천국을 전파하도록 이 땅에 보내어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는 서원 기도를 통해 자신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정해서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미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는 자신의 직분에 충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밖으로 내어 쫓겨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옥에도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땅에서 천국복음을 듣고 주님의 사역으로 초청을 받은 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드릴 것인가를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적당히 살다가 간신히 턱걸이로 천국에 들어가 성벽 주변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이 땅에서 주님께 서원하였던 것을 잘 이뤄 드려 주님의 보좌 가까이에서 살 것인지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한 것이 없는데 그가 보좌 가까이에 가서 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다 자신이 행한대로 보상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더 보좌에 더 가까이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그것은 누가 더 자신을 깨끗한 그릇으로 드리느냐 하는 것이다. 고로 이것 역시도 회개가 관건인 것이다. 날마다 회개하자. 그래서 주님께 깨끗한 나실인으로 주님께 자신을 드려 영원히 영광스러운 신분을 준비하여 천국에 들어가자. 

 

2022년 06월 26일(주일)

정병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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