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혼인잔치에서 입을 예복은 어떻게 준비하는가?(마22:11~14)_2022-07-24(주일)

by 갈렙 posted Jul 24, 202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유투브 주소 https://youtu.be/gn0etazFeFA
날짜 2022-07-24
본문말씀 마태복음 22:11~14(신약 37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2022-07-24 주일낮부예배

제목: 그날 혼인잔치에서 입을 예복은 어떻게 준비하는가?(마22:11~14)_동탄명성교회 정병진목사

https://youtu.be/gn0etazFeFA  [혹은 https://tv.naver.com/v/28137452 ]

 

1. 들어가며

  이 시대에 하나님께 서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그것은 뭐니뭐니 해도 성도들을 천국의 혼인잔치 안으로 더 많이 들여보내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재밌게 하고 알차고 보람있게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날 천국에 못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는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더이상 교회가 아니라 친교 단체 내지는 봉사 단체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도들 중에 과연 누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되는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것에 관한 첫 번째 문제를 다루었다. 그것은 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보다 자신의 소유나 돈 그리고 세상의 쾌락을 더 귀하고 가치있게 여기는 자는 결국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배웠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세상의 것이 더 좋아서 결국 구원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천국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가 나온다.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에 입는 옷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그 옷의 실체는 대체 무엇이며, 그 옷은 누가 주는 것이며, 그 옷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것인가?

 

2. 올바른 칭의론과 구원론은 어떤 것인가?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자기가 죄인이고 부끄러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자신은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자가 되었고 그래서 자신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 본다면 거기에는 좀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을 때에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 입혀지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구원의 완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끝난 것으로 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칭의는 구원의 노정에 이제 막 들어서게 되었음을 뜻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은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고 말했다(롬3:28).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다(롬3:24). 하지만 그것이 곧 구원의 완성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롬5:9의 말씀을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우리가 그분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후에, 더욱 그분으로 인하여 진노하심으로부터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구원'은 앞으로 받을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미 완성된 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이들은 칭의를 오직 믿음으로 얻는 줄로만 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서를 과대 해석한 것이다.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진술은 맞다. 하지만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들어본 일이 없기 때문에,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줄 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칭의가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하여 주어지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것은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에 나온다(눅18:9~14). 이 비유에 보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한 바리새인과 어떤 세리의 기도가 있다. 그때 바리새인은 남더러 들으라고 자신의 행위를 기도하면서 자랑을 한다. 하지만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다만 가슴을 치면서 회개한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지은 자입니다.(눅18:13)"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둘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18:14)" 그렇다. 칭의는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온전한 칭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칭의를 얻은 자 중에 구원에 이를 자가 있는 것이다. 즉 칭의를 얻은 자 중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자가 나오는 것이다. 

 

3.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의 비유는 누가 결국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가?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의 비유는 결국 누가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가?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천국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그것에 응답하는 자다. 그런데 이미 그 잔치 자리에 참여하기로 예정된 자라 할지라도 그날 청함을 거절한다면 그는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 또 하나는 청함을 받아서 그 잔치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는 자가 들어간다. 그 잔치 자리에까지는 갔으나 결국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채 쫓겨나게 된다면 그는 결국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4. 본문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은 왜 혼인 잔치에서 쫓겨나고 말았는가?

  그렇다면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도 누가 잔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는가? 본문에 보니 예복을 입지 않았던 어떤 사람이라고 나온다. 그때 그는 왕의 사환들('천사들'을 상징)에 의해 손과 발이 묶인 채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래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 대체 그는 무엇을 잘못했길래 그 잔치 자리까지 참여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는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입어야 할 옷(겉옷=엔뒤마)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다. 잔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은 사실 그가 누가 되었든지 상관 없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이나 죄인이어도 관계 없다. 그리고 그가 이방인이어도 상관 없다. 잔치의 초청에 응한다면 누구든지 잔치 자리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초청에 응하여 그 자리에 참석하게 된 자라도, 혼인 잔치에서 입어야 할 예복을 입지 않고 있으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곧 누구든지 겉옷을 반드시 입어야 하는 것이다. 그 옷이 없으면 그 잔치에 절대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5. 천국의 혼인 잔치에서 입는 예복은 누가 준비하는 것인가? 혼주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

  그렇다면, 천국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에 입어야 할 예복(엔뒤마=겉옷)이란 대체 어떤 옷이며, 누가 준비해 주는 옷인 것인가? 우리는 지난 시간에 누가 과연 궁극적으로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지를 들었다. 그 사람들은 먼저 초청받았던 자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의 것을 더 좋아했고 사랑했기 때문에 그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왕의 명령에 따라, 큰 길에서 만나게 되었던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이 대신 초청을 받고 그 잔치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영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그럼 먼저 초청받았던 자들은 누구를 지칭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고위층인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평행 본문을 보면, 이 잔치 자리에 참여하게 된 자들이 두 종류라고 나온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사회적으로 약자들인 계층의 사람들 곧 소외 계층의 사람들과 죄인들이 먼저 그 잔치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눅14:21~22). 그래도 잔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러자 주인은 길들과 산울타리로 가서 거기에 있는 사람까지 강권하여 데려다가 잔치 자리를 채우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된 자들이 또한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이방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소외 계층의 사람이 되었든지 아니면 이방인이 되었든지 이들은 원래 잔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잔치가 있는지 조차도 몰랐고 자신은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 이들은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전혀 생각도 안 해 본 자들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것은 그들이 예복을 마련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그날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입었던 옷들은 다 혼인집에 손님들이 준비해서 입고 간 옷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혼주가 자신의 아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 미리 준비해 놓았다가 그날 잔치 자리에 참여한 자들에게 입혀 주었던 옷이었다.

  그럼, 왜 혼주는 그날 잔치 자리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똑같은 예복(겉옷)을 입게 하였는가? 그것은 자신의 아들과 어느 정도 수준을 맞추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날에 거지들이 그 잔치 자리에 초대되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잔치는 어떤 잔치가 되겠는가? 그 잔치는 아마 거지 잔치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혼주가 옷을 내주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초대된 자들의 신분과 허물을 숨기기 위한 것이다. 만약 그 자리에 부자가 왔다고 치자, 만약 그도 혼주가 내주는 옷을 입지 않았다면 그는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거만한 모습을 드러내었을른지도 모른다. 혹 그가 구걸하던 거지였다고 치자, 그런데 그도 역시 혼주가 내주는 옷을 입지 않았다면 그는 더럽고 추한 거지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혼주는 모든 사람들의 신분을 아들의 수준과 어느 정도 부합하게 맞추기 위해 예복을 내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혼인 잔치에서 입었던 겉옷들은 다 손님들 자신이 준비해서 입었던 옷이 아니라 그날 혼주가 준비해서 주는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혼주가 내주는 옷을 입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혼주의 호의를 무시하는 처사가 되는 것이요, 혼주에게 상당한 무례를 저지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혼주가 내주는 예복을 입지 않고 거기에 들어와 식탁에 비스듬히 누워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왕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눈에 띄는 그 사람을 불러다가 말을 한다. "친구여, 그대는 왜 혼인 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에 들어와 있느뇨?" 그러자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도 역시 잔치 자리에 들어와서 보니 그 옷은 잔치에 매우 중요한 옷이었다는 것과, 만약 그 옷을 입지 못하는 자는 결코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옷을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6. 혼주가 주는 혼인 잔치의 예복의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때 혼주가 내주어 입게 된 혼인 잔치의 예복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 예복의 영적인 의미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비유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 이 땅에서의 혼인 잔치와 천국에서 치르게 될 혼인 잔치는 그 성격이 약간 다르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혼인 잔치에서 신부는 딱 한 명이지만, 혼인 잔치의 하객들은 신부가 아닌 객들로서 아주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혼인 잔치는 이와는 다르다. 천국에서의 혼인 잔치에서 신부는 혼자가 아니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곧 단체적인 신부이기 때문이다. 또한 결혼식에 참여하는 신부와 결혼식 후에 있는 피로연의 자리에 참여하는 자들은 다 동일한 신부들이라는 점이다. 각각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신부들이 곧 그날 하객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에는 신부가 입는 옷이 곧 하객이 입는 예복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부가 입을 예복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사도 바울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라고 정의했다(갈3:27~28). 왜냐하면 그 결혼 잔치는 어린양 되시는 그리스도의 결혼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소 그 옷은 그리스도의 옷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러한 옷을 마련해 줄 수 있는가? 아마도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옷은 오직 혼주이신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옷인 것이다. 아들의 수준의 옷과 비슷한 옷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옷이 어떤 옷인지에 대해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 옷은 "흰 옷"이라고 말씀하셨다(계3:4~5). 즉 결혼식 때에 신부들이 입게 될 옷은 "흰 옷"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천국의 모든 신부들은 흰 옷을 입고 결혼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데교회 안에 이렇듯 흰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 몇 명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신의 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라고 했다. 왜 그들은 흰 옷을 입고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우상 숭배 행위에 참여하지 않아서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았었을 것이다. 이처럼 앞으로도 이기는 자가 결국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에 장차 흰 옷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도 결코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거꾸로 뒤집어보라. 그럼 이 세상에서 자신의 흰 옷을 더럽히게 된 자는 결국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말이 되는 것이며, 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날이 되면 생명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고, 성밖으로 내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계3:4~5, 계22:15).

 

7. 그리스도의 신부들은 신부 옷을 어떻게 단장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장차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들은 신부 옷을 어떻게 준비하고 단장해야 하는가? 그것은 2가지다. 하나는 필수 사항이고 또 하나는 선택 사항일 수도 있겠지만 후자도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첫째는 자신에게 입혀진 흰 옷을 그날 결혼식 때에 입을 수 있도록, 날마다 씻어 깨끗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계22:14). 그래야 새 예루살렘의 문 안에 들어가며 그 안에 있는 결혼식의 장소 곧 영광의 광장으로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신의 옷을 깨끗하게 간직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오직 예수의 피에 자신의 죄를 씻어내는 길밖에 없다(계7:14). 왜냐하면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자신의 옷이 더럽혀지기 때문이다(요일1:7). 그런데 생각해 보라. 만약 회개하고 믿었던 그날에 죽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그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수십 년을 신앙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날 동안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마귀와 귀신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활동하고 있으며, 자기 안에 죄성이 가득한데 어찌 죄를 짓지 않고 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천국의 혼인 잔치의 필수적인 조건은 회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회개없이는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더럽혀진 옷을 깨끗하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둘째로, 신부가 자신의 옷을 단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이 만약 신부라면 자기의 옷에 수를 놓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고, 보석을 달아 더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그가 남자라면 그는 자기의 머리에 쓸 면류관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사61:10). 그러나 이것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니 그것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준비하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다(계19:7~8). 어린양의 아내가 자기 자신의 세마포 옷을 스스로 아름답게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진짜 더 깨끗하고 거룩한 신부로서 준비되기를 원한다면, 그래서 거룩하신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 결혼식에 참여할 성도가 되기를 진정 원한다면 그는 날마다 회개하여 자신의 옷을 깨끗하고 빛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더욱더 의로움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면류관과 보석으로 자기 자신의 옷을 아름답게 단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맡겨진 일에 충성하는 것으로 준비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렇다. 이러한 일은 오직 자기 자신이 자기의 의로움으로 단장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단장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8. 신부가 자신의 혼인 잔치를 위하여 겉옷을 준비하는 핵심 진리는 무엇인가?

  신부가 자신의 결혼식과 혼인 잔치를 준비할 때에 입어야 할 예복 곧 신부복이자 겉옷이란 대체 어떤 옷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입혀 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인가 아니면 자신이 준비한 옷인 것인가? 그것은 둘 다이다. 그러나 그 옷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이다. 그리스도의 공로 없이는 우리는 스스로 절대 의로워질 수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입혀 주신 칭의의 겉옷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의의 옷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 번만 회개하는 것으로 되어지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함과 동시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 열매들로서 옷에 수를 놓고 보석들을 달아야 한다. 이것은 순종과 충성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어 내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마태복음 25장의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삶과 같다고 하겠다. 당시 열 명의 처녀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기다리고 있었으나 다섯 명은 미련하여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고 그저 처음 준비한 등과 기름만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다. 하지만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날마다 댓가를 지불하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여 신랑을 마중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신랑은 더디 왔고 기름이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었으니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련한 다섯 처녀는 그때 비로소 기름을 사러 갔지만 때는 늦고 말았다. 그렇다. 기름은 일평생 준비하는 결혼 예복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 순종과 충성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없는 자는 그날 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이다. 

 

9. 한 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히 안전한 것인가?

  우리는 지난번과 오늘 비유의 두 가지 비유 말씀을 통하여,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분명하게 배울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예수님을 믿어 의의 옷을 입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옷이 더럽혀진 것을 모른 채 계속 죄를 짓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자는 그날 버림을 받고 말 것이다. 더럽혀진 옷을 입고 천국 결혼식과 혼인 잔치의 피로연에 동시에 참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미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라도 옷이 더럽혀져서 도무지 잔치 자리에 입고 갈 수 없는 수준이 되어 버린 자는 결국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 자리에 들어갔다고 할지라도 쫓겨나고 말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최소 그가 언젠가는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한 번 믿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었던 자라 할지라도 최종적으로 천국 문에 이르렀을 때에 그곳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번 구원받았다고 해서 영원히 구원이 보장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그를 억지로라도 끌어다가 천국에 데려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것은 교리에서나 나올 뿐이다. 예를 들어, 성도의 견인과 같은 교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교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다. 칼빈의 교리 중에서 그의 기독교강요 제4권에 비로소 등장하고 있는 "성도의 견인교리"를 들어보았는가? 곧 한 번 구원받았으면 그는 최종적으로 구원에서 탈락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 교리의 핵심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의 말씀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목숨이 끝나는 그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가야 하기 때문이다. 

 

10. 나오며

  어떤 사람은 자신은 반드시 천국에 들어갈 줄 확신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렇게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자들 중에는 그날에 이르러 손발이 꽁꽁 묶인 채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날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쫓겨난 자신을 보고 거기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겠지만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일생 가운데 얼마든지 더럽혀진 자신의 겉옷을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허송세월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초청에 응한 자가 가는 것이 맞기는 하지만,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입혀 준 의의 옷을 날마다 깨끗하게 씻지 않는 자는 그곳에서 쫓겨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더럽혀진 옷을 입고 그날 새 예루살렘 성 안의 영광의 광장에서 펼쳐지는 어린양의 결혼식 및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성밖에 버려져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자신의 더럽혀진 의의 옷을 희고 깨끗하고 빛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서 그 열매를 준비하자. 그리고 순종과 충성함으로서 면류관과 보석과 수놓은 옷으로 단장해야 한다. 그래서 그날 우리 모두는 천국 문 앞에서 기쁜 얼굴로 만날 수 있는 성도가 되자. 할렐루야!

 

2022년 07월 24일(주일)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