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는가?

by 갈렙 posted May 07, 202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이 글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용례에 대한 연구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사복음서를 중심으로 "하나님 호칭 연구: 예수님의 '아버지' 어휘 사용에 관하여"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용례를 추적했습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다루었지만, "서신서 인사말에 관한 샬롬복음 연구: 은혜와 평강"이란 글에서 신약의 서신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을 정리해두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미처 다루지 않은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하는 것을 추적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구약(창세기~말라기)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름

  구약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 부른 것은 총 15번, 신명기 32:6; 사무엘하 7:14; 역대상 17:13, 22:10, 28:6; 시편 68:5, 89:26; 이사야 63:16, 64:8; 예레미야 3:4,19, 31:9; 말 1:6과 2:10에 등장합니다. 총 39권의 성경 중에서 15번의 등장하는 것이 그 사용빈도가 극히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일부 인물들에게 제한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중에서 역사서(삼하, 대상)에 4번이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하고 있지만, 이는 각각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반복해서 언급되는 것으로 실제로는 한번 일어난 일이 다시 기록된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서가 언급하는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는 표현은 한 단락의 시작과 끝을 둘러싸는 내용으로 한 본문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예레미야서에서의 "아버지"는 하나님이 자신을 유다/이스라엘의 아버지로 호칭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과 말라기에는 각각 다른 의미 단락이지만 전체적으로 한 권의 성경에 각각 2번씩 하나님이 아버지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표1.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 in OT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1] 모세가 인식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라고 알려준 것(신 32:6), [2] 다윗이 인식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 하나님이 솔로몬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하신 것(삼하 7:14, 대상 17:13, 22:10, 28:6), [3] 다윗이 인식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 시편(시 68:5, 89:26), [4] 이사야가 인식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사 63:16, 64:8), [5] 예레미야가 인식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 하나님이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아버지로 언급한 것(렘 3:4, 19, 31:9), [6] 말라기가 인식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말 1:6, 2:10)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여섯 개의 단락은 선지자와 왕들(모세와 솔로몬,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말라기)이 화자(speaker)이거나 아버지 됨의 대상(~의)이 됩니다. 그 내용을 한 본문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모세가 인식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언급한 것은 신명기가 맨 처음입니다. 신명기 31장 30절부터 32장 47절까지 모세의 노래라고 불리는 내용 중에,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게 이스라엘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그 와중에 모세는 이스라엘을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으로 부르며 여호와에 대한 태도(신 32: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를 "이같이 보답하느냐"라는 말로 문제를 제기합니다. 여기서 모세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데, 이 아버지 됨을 너(이스라엘)를 지으신 이(he created you), 만드신 이(he made you), 너를 세우신 이(he established you)와 함께 언급함으로써 창조자, 주권자로서의 하나님, 아버지에 합당한 삶을 요구합니다. 

#1.

신명기 32: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여호와)는 네(이스라엘)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Deut 32:6 הֲ־לַיְהוָה֙ תִּגְמְלוּ־זֹ֔את עַ֥ם נָבָ֖ל וְלֹ֣א חָכָ֑ם הֲלוֹא־הוּא֙ אָבִ֣יךָ קָּנֶ֔ךָ ה֥וּא עָֽשְׂךָ֖ וַֽיְכֹנְנֶֽךָ׃

 

  모세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언급하기 이전에도 물론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추측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모세 오경 중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들자는 논의를 하시고 실제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습니다(창 1:27). 또한 그 뒤에 최초로 결혼에 대해 언급하면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을 언급하였습니다(창 2:24). 이는 간접적이지만 하나님이 부모가 된다는 개념을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창세기 6:1-4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문맥상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이었던 가인과 아벨 중에, 믿음의 계보라고 할 수 있는 아벨을 대신하는 셋의 후손들을 가리킨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천사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욥기 1:6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경우를 제외하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그 누구에게도 직접적으로 아들, 자녀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고, 사람도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하였다는 뚜렷한 증거는 찾기 어렵습니다.

 * 굳이 창세기에 나온 아들, 자녀에 대한 언급에 주의를 기울여보면, 하나님이 하와에게 자식을 낳는 고통을 주겠다는 것이 최초의 언급이었고, 실제 가인을 낳은 것이 첫 번째 자손을 낳은 사건입니다.  "아들"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창 4:17에서 가인이 자신의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성 이름을 지었다고 할 때 아들이라는 말이 처음 언급됩니다.

 

Sculpture by Michelangelo Buonarroti “Moses”

 

  그 뒤로 모세 오경 중에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고 호칭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말하도록 하셨습니다(출 4:22-23). 아마 모세는 이 일을 계기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모세는 그 뒤에 곧장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출 5:1). 하나님께서 "내 아들 내 장자, 내 아들"로 호칭한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바꾸어 말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하지 않다가, 신명기에 와서야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표현합니다. 신 14:11(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로 지칭했고, 신 32:5(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에서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언급합니다.

* 신명기 14장은 자녀 됨의 정체성이  죽은 자를 위한 행동을 금지하는 근거가 되고, 32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악행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다는 결론이 됩니다

  정리하자면, 모세 오경에는 모세의 하나님 아버지 인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창조 기사와 인류의 초기 역사에서 희미하게 나타나 있고, 출애굽기에는 처음으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을 내 아들이라 언급하심으로 자신의 아버지 되심을 구체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아들(자녀)이라는 표현 대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호칭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 관계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에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2회 언급했고(신 14:11, 32:5),  신명기 32:6에서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2. 다윗이 인식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 솔로몬의 아버지

  모세 이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다윗의 시대에 와서야 다시 등장합니다. 시편을 제외하고는 사무엘하에 1번, 역대상에 3번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4번의 사건이 기록된 본문은 모두 하나의 사건이 반복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중에서 사무엘하 7장 5-16절은 시간상으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내용으로 그 정황을 가장 풍성하게 보여주는 본문으로 기준점이 될만합니다.

  노년의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나단은 흔쾌히 수락했지만, 정작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 건축 계획을 거절하셨습니다(5-7절). 그리고 그동안 하나님이 다윗을 왕 삼고 돌보셨음을 말씀하시면서(8-11절) 네 몸에서 날 씨를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세우겠다고 하십니다(12-15). 그 맥락 안에서 "나(여호와)는 그(네 몸에서 날 씨)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14)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는 하나님에게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네 몸에서 날 씨'(12), '그'(14)는 문맥상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을 가리키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다윗도 그렇게 이해했음을 이 사건을 회상하는 그의 표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대상 22:9-10, 28:6). 하지만 다윗의 후손은 솔로몬을 넘어서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16)는 말씀은 다윗과 솔로몬을 잇는 유다 왕조의 존속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었고, 여기서 다윗의 몸에서 날 씨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2. 

사무엘하 7:5–16 (NKRV)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여호와)는 그(네 몸에서 날 네 씨/12절/솔로몬)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2 Samuel 7:14 אֲנִי֙ אֶהְיֶה־לּ֣וֹ לְאָ֔ב וְה֖וּא יִהְיֶה־לִּ֣י לְבֵ֑ן אֲשֶׁר֙ בְּהַ֣עֲוֺת֔וֹ וְהֹֽכַחְתִּיו֙ בְּשֵׁ֣בֶט אֲנָשִׁ֔ים וּבְנִגְעֵ֖י בְּנֵ֥י אָדָֽם׃

#3. 

역대상 17:13 나(여호와)는 그(네 씨/11절/솔로몬)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나의 인자를 그에게서 빼앗지 아니하기를 내가 네 전에 있던 자에게서 빼앗음과 같이 하지 아니할 것이며

1 Chronicles 17:13 אֲנִי֙ אֶֽהְיֶה־לּ֣וֹ לְאָ֔ב וְה֖וּא יִֽהְיֶה־לִּ֣י לְבֵ֑ן וְחַסְדִּי֙ לֹא־אָסִ֣יר מֵֽעִמּ֔וֹ כַּאֲשֶׁ֣ר הֲסִיר֔וֹתִי מֵאֲשֶׁ֥ר הָיָ֖הלְפָנֶֽיךָ׃

 

  사무엘하 7:14와 역대상 17:13을 살펴보면, 이 두 본문 모두 하나님과 그(다윗의 몸에서 날 씨)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거듭(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니) 언급하고 있고, "헤세드(חֶ֫סֶד)"를 빼앗지 않겠다는 약속이 등장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헤세드'가 은총(삼하 7:15)과 인자(대상 17:13)로 다르게 번역되었습니다) 다만 이 두 본문에서의 차이는 사무엘하 7:14에는 "죄를 범하면 ...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고, 역대상에는 이 내용이 빠져 있다는 점입니다. 

  역대상 22:16과 28:6은 다윗이 위의 두 본문에서 다루는 동일한 사건을 회상하며 언급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앞의 두 본문은 나단 선지자가 만군의 여호와의 말을 다윗에게 전하는 형태이지만, 역대상 22장 본문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28장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모든 고관들에게 성전건축을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즉, 삼하 7장과 대상 17장에서 다윗이 이해한 성전 건축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내용을 솔로몬과 이스라엘 고관들에게 전해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역대상 22:6–16 (NKRV)

다윗이 그의 아들 솔로몬을 불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부탁하여 7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9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10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지라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여호와)는 그(솔로몬)의 아버지가 되어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니 11 이제 내 아들아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며 네가 형통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며 12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네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 13 그때에 네가 만일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든 규례와 법도를 삼가 행하면 형통하리니 강하고 담대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지어다 14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준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15 또 장인이 네게 많이 있나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 16 금과 은과 놋과 철이 무수하니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하니라

1 Chronicles 22:10 הֽוּא־יִבְנֶ֥ה בַ֙יִת֙ לִשְׁמִ֔י וְהוּא֙ יִהְיֶה־לִּ֣י לְבֵ֔ן וַאֲנִי־ל֖וֹ לְאָ֑ב וַהֲכִ֨ינוֹתִ֜י כִּסֵּ֧א מַלְכוּת֛וֹ עַל־יִשְׂרָאֵ֖לעַד־עוֹלָֽם׃

#5.

역대상 28:1–10 (NKRV)

다윗이 이스라엘 모든 고관들 곧 각 지파의 어른과 왕을 섬기는 반장들과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및 왕과 왕자의 모든 소유와 가축의 감독과 내시와 장사와 모든 용사를 예루살렘으로 소집하고 2 이에 다윗 왕이 일어서서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안할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3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라 피를 많이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4 그러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전에 나를 내 부친의 온 집에서 택하여 영원히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셨나니 곧 하나님이 유다 지파를 택하사 머리를 삼으시고 유다의 가문에서 내 부친의 집을 택하시고 내 부친의 아들들 중에서 나를 기뻐하사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셨느니라 5 여호와께서 내게 여러 아들을 주시고 그 모든 아들 중에서 내 아들 솔로몬을 택하사 여호와의 나라 왕 위에 앉혀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려 하실새 6 내게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 그가 내 성전을 건축하고 내 여러 뜰을 만들리니 이는 내(여호와)가 그(솔로몬)를 택하여 내 아들로 삼고 나(여호와)는 그(솔로몬)의 아버지가 될 것임이라 7 그가 만일 나의 계명과 법도를 힘써 준행하기를 오늘과 같이 하면 내가 그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8 이제 너희는 온 이스라엘 곧 여호와의 회중이 보는 데에서와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는 데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이 아름다운 땅을 누리고 너희 후손에게 끼쳐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10 그런즉 이제 너는 삼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택하여 성전의 건물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힘써 행할지니라 하니라
 

1 Chronicles 28:6 וַיֹּ֣אמֶר לִ֔י שְׁלֹמֹ֣ה בִנְךָ֔ הֽוּא־יִבְנֶ֥ה בֵיתִ֖י וַחֲצֵרוֹתָ֑י כִּי־בָחַ֨רְתִּי ב֥וֹ לִי֙ לְבֵ֔ן וַאֲנִ֖י אֶֽהְיֶה־לּ֥וֹ לְאָֽב׃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역대상 22:6-16과 28:1-10에서 다윗은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전쟁으로 피를 많이 흘려서 건축하지 못한다고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대신 한 아들이 다윗에게서 태어 날텐데, 하나님이 그를 통해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고 합니다(대상 22:9). 대상 22:9와 28:5를 보면 다윗은 이 아들을 '솔로몬'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다윗은 '그(솔로몬)가 성전을 건축하고,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가 되어(대상 22:10, 28:6), 그 나라 왕위를 이스라엘 위에 굳게 세워 영원까지 이르게 할 것이라'라고 합니다(대상 22:10, 28:7). 그러고 나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형통하게 될 것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성전건축을 명령합니다(대상 22:11, 28:10)

  이 두 본문은 미묘한 차이들을 갖고 있는데, 대상 22장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이야기할 때는 솔로몬을 향해서 "내 아들아"로 부르며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며 네가 형통하여 .... 여호와께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사 ...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게 하시기를 더욱 원하노라"(대상 22:11-12)라는 축복을 기록한 반면, 대상 28장에서는 솔로몬에게 "내 아들 솔로몬아"라고 부르며,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기라 ...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다윗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1] 자신의 아들과 관계된 것, [2] 개인적인 관계, [3] 상호교류적인 관계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1] 비록 이 본문들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 고백하지는 않지만 솔로몬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었고, 이는 다윗이 솔로몬의 아버지로서 "내 아들아", "내 아들 솔로몬아"라고 부르는 자신의 아버지 됨을 하나님이 솔로몬의 아버지 됨으로 투사했을 수 있다는 점을 자연스레 추측할 수 있습니다. [2] 또한 이는 앞서 신명기를 통해 표현된 모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 되는 차원의 민족의 아버지라면, 다윗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은 개인 솔로몬의 아버지 됨입니다. 특히 다윗이나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한 나라의 통치자인 왕이 신으로부터 통치를 보장받는 것으로 고대 사회에 이해하던 신의 아들 개념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3]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강제적이거나, 일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결과 역시 일회적 행동(믿음이나 헌신)에 의해서 영원히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아는 과정이 있어야 하고, 그 알게 된 하나님에 대해서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자기 본인의 의지로) 섬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찾으면 만나게 되고, 버리면 버림받는 것이 예상되는 지속적인 상호교류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는 혈연적인 아버지 관계를 넘어서는 인격적이며 사랑에서 비롯된 충성(혹은 신실함)이 요구되는 관계입니다.

 

Gerard van Honthorst ,  King David Playing the Harp , 1622

 

3. 다윗이 인식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 시편

  시편에는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시편 2:7(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은 이스라엘을 아들로 부르는 것을 듣는 직접적인 표현입니다. 그 외에도 시편 73:15(나는 주(당신/하나님)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도 시편 기자가 살고 있는 세대(generation)를 주의 아들들의 세대로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아들 개념을 자연스레 사용합니다. 또한 시편 103:13(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로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를 여호와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관계로 빗대어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잠시 제쳐두고, 시편에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한 경우만을 살펴보면 시편 68:5와 89:26에서 한 번씩 다윗을 그 호칭을 하는 주체로 삼아 등장합니다. 

 #6. 

시편 68:5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Psalm 68:6 אֲבִ֣י יְ֭תוֹמִים וְדַיַּ֣ן אַלְמָנ֑וֹת אֱ֝לֹהִ֗ים בִּמְע֥וֹן קָדְשֽׁוֹ׃

 

  시편 68편은 다윗의 시편으로 언약궤를 성막으로 옮길 때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 내용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다윗)는 하나님에게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고아와 과부는 고대사회에서 대표적인 약자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하나님은 거룩한 처소에 계신 분으로 묘사하지만, 동시에 그 하나님을 약자들을 보호하는 분으로 아버지와 재판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존귀하며 영광중에 거하는 초월적인 분이시지만, 우리 일상의 평범함 안에 있는 약함 가운데 아버지로 관계 맺는 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 

시편 89:26 그(다윗)가 내게 부르기를 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Psalm 89:27 ה֣וּא יִ֭קְרָאֵנִי אָ֣בִי אָ֑תָּה אֵ֝לִ֗י וְצ֣וּר יְשׁוּעָתִֽי׃

 

  시편 89편은 에스라인 에단(솔로몬 시대의 현인 중의 한 사람, 왕상 4:31/ 혹은 레위인 노래하는 사람, 대상 15:17,19)의 마스길(교훈)입니다. 이 중에서 3연에 해당하는 19-37절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부분인데, 26절에서 다윗이 하나님에게 "주(당신 2인칭, 남성, 단수)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이 좀 애매한데, 이 시편에서 이 고백은 다윗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동시에 실제로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19절에서 "주께서 환상 중에 성도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로 시작하면서 다윗에 대하여 말하는 내용(20)으로서 26절에서 "그가 내게 부르기를 ... 하리로다"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편 89:26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크게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는, 다윗의 생애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을 자신의 구원의 보호자로 인식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표현으로 실제로 있었을 법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하나님을 향해 나의 아버지라 부른 일이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한계도 중요하게 남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에 대한 연구에서 시편 89편이 가지는 중요성은 왕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표현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역대상 22:16과 28:6의 솔로몬과 함께 고대 왕정이 신의 아들을 통한 신탁에 기반한 것처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등장하는 것은 솔로몬과 다윗이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다윗은 솔로몬과는 구분됩니다. 시편 72편은 솔로몬의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편 기자로 여겨지는 솔로몬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합니다. "시편 72:1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공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여기서 솔로몬이 주의 판단력과 주의 공의를 사모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을 주라고 요청받는 대상은 왕, 왕의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솔로몬은 정작 자신을 볼 때 다윗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왕, 왕의 아들로 이해하고 그렇게 사용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는 왕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호칭하는 고대 근동의 관례가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정착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호칭이나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편 89편에서 다윗이 왕으로서나 개인으로서 본인이 직접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은 아주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편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모두 다윗과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호칭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되었던 솔로몬보다 더 개인적이며 인격적인, 온전한 하나님 아버지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4. 이사야가 인식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 우리 아버지

 

Providence Lithograph Company가 출판한 예언자 이사야의 그림 (1904년 경)

 

  시편 이후에는 선지서들 중 일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선지서 중에서 이사야와 예레미야에는 각각 3번씩 이 표현이 등장하는데, 먼저 이사야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서 63:15부터 64:12까지는 이사야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요청하는 기도문입니다. 이 중에서 63:16과 64:8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호칭(주(당신 2인칭, 남성, 단수)는 우리의 아버지)하는 것이 3번 등장합니다. 먼저 63:16은 두 번이나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고 부르며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모른다고 외면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실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옛날부터 그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고 하셨던 분입니다(16b). 구원자로서의 아버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구원의 요청은 [1] 우리로 주의 길을 떠나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함(17), [2] 주의 성소가 유린당함(18), [3]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이방인 같음(19)에 대한 것입니다.  그 구원의 하나님이 강림하기를 요청하고(64:1-4),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한 뒤에(5-7) 다시 '주는 우리 아버지'(8), '우리는 다 주의 백성'(9) 임을 강조하며 죄가 아니라 심한 괴로움을 받고 있는 자신들을 봐달라고, 구원을 베풀어달라고 합니다(8-12). 여기 64:8에서 하나님의 '우리 아버지' 됨은 진흙 같은 자신들을 손으로 빚는 토기장이에 비유되며, 창조자의 이미지가 강조된 것으로 하나님이 만든 것이니 하나님이 책임져달라는 간구의 근거가 됩니다. 

#8. #9.  

이사야 63: 16 주(당신)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Isaiah 63:16 כִּֽי־אַתָּ֣ה אָבִ֔ינוּ כִּ֤י אַבְרָהָם֙ לֹ֣א יְדָעָ֔נוּ וְיִשְׂרָאֵ֖ל לֹ֣א יַכִּירָ֑נוּ אַתָּ֤ה יְהוָה֙ אָבִ֔ינוּ גֹּאֲלֵ֥נוּ מֵֽעוֹלָ֖ם שְׁמֶֽךָ׃

#10.

이사야 64: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Isaiah 64:10 בֵּ֧ית קָדְשֵׁ֣נוּ וְתִפְאַרְתֵּ֗נוּ אֲשֶׁ֤ר הִֽלְל֙וּךָ֙ אֲבֹתֵ֔ינוּ הָיָ֖ה לִשְׂרֵ֣פַת אֵ֑שׁ וְכָל־מַחֲמַדֵּ֖ינוּ הָיָ֥ה לְחָרְבָּֽה׃

 

  이사야에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호칭한 것은 화자가 포함된 집단인 '우리'의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구약에서 오직 이사야 선지자만 사용한 양식입니다. 이는 사복음서 중에서도 마태복음에만 나온 표현이고,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통해 알려준 독보적인 표현입니다. 서신서들 중에서는 골로새서와 데살로니가 후서(일부 사본)에만 하나님 앞에 '우리(의)'를 붙였던 것을 고려한다면 이는 이사야 당시에 무척 급진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구약에서 이사야서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는 것은, 대부분의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솔로몬이나 다윗 같은 왕에게만 허용된 소수에게 제한된 표현이거나, 우리라는 인격적 관계보다는 공적인 관계로서의 하나님의 백성, 창조주에 의해 피조된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아버지로 여겼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일정 부분 반복되는 문제로 하나님을 왕이나 심판자로서만 강조하고 인격적이고 애정 어린 관계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과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는 그 한계와는 다른 면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넘어서는 의미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서의 이해는 예수님 이전인 구약시대에도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5. 예레미야가 인식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

 

Jeremiah as painted by Michelangelo

 

  이사야서에 이어 예레미야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호칭한 것이 3번, 예레미야 3:4(나의 아버지), 3:19(나의 아버지), 31:9(이스라엘의 아버지)에서 등장합니다. 먼저 예레미야 2:1-6:30은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인데, 우리가 주목하는 표현이 포함된 예레미야 3:1-5은 하나님이 유다 족속(2:28 유다여)에게, 3:19-22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족속(3:20 이스라엘 족속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먼저 예레미야 3:4은 하나님은 유다에 대한 심판 계획을 알리고(2:26-37), 유다의 행음을 지적하는 문맥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나(유다 족속)의 아버지여 아버지(당신 2인칭)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 시오니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3:4-5a)하는 탄원은 실제로 유다 족속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예시를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족속이 이렇게 말하면서도 악을 행하여 욕심을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이는 완악한 유다에 대해 하나님의 꾸중입니다. 따라서 렘 3:4에 나타난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것은 유다가 할 수 없는 일, 그렇게 부른다고 해도 의미 없는 일임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11.

예레미야 3:1–5 (NKRV)
1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3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4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 아버지(당신)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5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

Jeremiah 3:4 הֲל֣וֹא מֵעַ֔תָּה קָרָאתִילִ֖י אָבִ֑י אַלּ֥וּף נְעֻרַ֖י אָֽתָּה׃

 

  예레미야 3:19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녀로 삼고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한 약속과 더불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떠나지 말라고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3:20(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확실히 나를 속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에서 보여주는 그 결과는 아내가 남편을 속이고 떠나는 것처럼 하나님을 속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신 호칭이 나(이스라엘)의 아버지였다는 것과 그 아버지로 고백함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을 기대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점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2.

예레미야 3:19 (NKRV)
19 내가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들 중에 아름다운 기업인 이 귀한 땅을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이스라엘)가 나(여호와)를 나(이스라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Jeremiah 3:19 (LHI)
19 וְאָנֹכִ֣י אָמַ֗רְתִּי אֵ֚יךְ אֲשִׁיתֵ֣ךְ בַּבָּנִ֔ים וְאֶתֶּן־לָךְ֙ אֶ֣רֶץ חֶמְדָּ֔ה נַחֲלַ֥ת צְבִ֖י צִבְא֣וֹת גּוֹיִ֑ם וָאֹמַ֗ר אָבִי֙תִּקְרְאוּ־לִ֔י וּמֵאַחֲרַ֖י לֹ֥א תָשׁוּבוּ׃

 

  예레미야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예레미야 31:9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문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고하는 것으로, 울며 돌아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이스라엘이 간구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넘어지지 않도록 하고, 물이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그려지는 풍성하고 평탄한 역사를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의 이유, 근거가 바로 하나님이 스스로 말하는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됨입니다. 

#13.

예레미야 31:9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여호와 7절)는 이스라엘의 아버지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Jeremiah 31:9 
 בִּבְכִ֣י יָבֹ֗אוּ וּֽבְתַחֲנוּנִים֮ אֽוֹבִילֵם֒ אֽוֹלִיכֵם֙ אֶל־נַ֣חֲלֵי מַ֔יִם בְּדֶ֣רֶךְ יָשָׁ֔ר לֹ֥א יִכָּשְׁל֖וּ בָּ֑הּ כִּֽי־הָיִ֤יתִילְיִשְׂרָאֵל֙ לְאָ֔ב וְאֶפְרַ֖יִם בְּכֹ֥רִי הֽוּא׃ ס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레미야에 나타난 이 세 번의 호칭은 모두 하나님이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본문들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4와 3:19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잘못을 두고 하나님은 자신을 "나의 아버지"라 불리기를 원하셨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고, 31:9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며 자신을 가리켜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구약에 편만하게 깔려있는 정서로 하나님은 아버지 됨으로 자녀의 보호자와 공급자가 되고 사랑을 나누며 함께하는 삶을 기대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편의 다윗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였음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6. 말라기가 인식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

 

An 18th century Russian  icon  of the prophet Malachi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성경으로 예수님이 태어나기 약 400년 전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이 2번 등장합니다. 먼저 말라기 1:6은 하나님이 제사장들의 죄를 꾸중하면서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제사장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아들 된 제사장이 아버지 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2:10은 말라기 선지자가 유다와 이스라엘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고 가증한 일을 행하는 것에 대해 질책하면서,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한 분, 같은 아버지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한 아버지를 가진 형제임에도 그 형제에게 거짓을 행한 것은 우리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언약을 욕되게 하는 것임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라기 선지자 역시 하나님을 유다와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우리의 '아버지'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그 하나님을 인격적인 관계의 '우리 아버지'로 호칭하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14. 

 

말라기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이스라엘)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하나님)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Malachi 1:6 (LHI)
6 בֵּ֛ן יְכַבֵּ֥ד אָ֖ב וְעֶ֣בֶד אֲדֹנָ֑יו וְאִם־אָ֣ב אָ֣נִי אַיֵּ֣ה כְבוֹדִ֡י וְאִם־אֲדוֹנִ֣ים אָנִי֩ אַיֵּ֨ה מוֹרָאִ֜י אָמַ֣ר׀ יְהוָ֣הצְבָא֗וֹת לָכֶם֙ הַכֹּֽהֲנִים֙ בּוֹזֵ֣י שְׁמִ֔י וַאֲמַרְתֶּ֕ם בַּמֶּ֥ה בָזִ֖ינוּ אֶת־שְׁמֶֽךָ׃

#15. 

말라기 2: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Malachi 2:10 הֲל֨וֹא אָ֤ב אֶחָד֙ לְכֻלָּ֔נוּ הֲל֛וֹא אֵ֥ל אֶֽחָ֖ד בְּרָאָ֑נוּ מַדּ֗וּעַ נִבְגַּד֙ אִ֣ישׁ בְּאָחִ֔יו לְחַלֵּ֖ל בְּרִ֥ית אֲבֹתֵֽינוּ׃

 

  이렇게 말라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서로 다른 형태를 띱니다. 한 번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을 아버지라 말씀하시고(God -> huMan), 다른 한 번은 말라기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huMan -> God) 표현했습니다. 이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로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이해하는 것이 그 이전의 시기보다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 : 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가?

  지금까지 여섯 명의 왕과 선지자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문맥과 아버지 됨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구약의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이 여섯 명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무척 의아합니다. 또한 모세와 이사야, 예레미야, 말라기가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아버지 됨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표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제한적인 맥락에서 신앙의 근거로 사역한 것은 아쉽습니다. 그나마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나의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불렀을 가능성이 높고, 자신의 아들에게도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알고 믿었다는 점과 고아들의 아버지로 부른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신학에 비추어도 손색이 없다 할 정도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대해 가장 깊은 이해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하나님이 먼저 계시하신 것이지만, 선지자와 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되고, 다시 하나님이 자신을 개인과 공동체의 '아버지'로 계시하시기를 반복합니다. 이를 중심으로 도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을 '아버지'로 표현한 경우는 노란색(G -> H)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경우(H -> G)는 파란색으로 표현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개인의 아버지가 되는 관계인지, 공동체(이스라엘, 고아들, 제사장들, 유다와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는 관계인지도 구분해 놓았습니다. 

 

표2. 아버지 호칭의 관계

 

  '표 2. 아버지 호칭의 관계'를 보면, 15번의 용례는 6개의 부분으로 구분 지어진 틀 안에서  (G -> H)와 (H -> G)가 통일성 있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2]의 다윗은 (G -> H)로만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계시로 다룹니다. [4]의 이사야나, [5]의 예레미야 역시 (H -> G)와 (G -> H)로 일관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말라기만 유일하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하시고, 사람이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호칭한 것이 한 번씩 등장합니다. 

* 시편의 경우에는 다윗의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실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H->G)이지만, 문맥상 다윗이 그렇게 하리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므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아버지로 표현한 것(G->H)이 됩니다. 이에 그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포함해서 (노랑과 파랑의 합인) 녹색으로 표시했습니다. 

  그 외에 표 2를 통해서 흥미롭게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개인의 아버지로 인식한 모든 경우는 다윗과 관련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윗이 공동체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몰랐던 것도 아닙니다(ex. 고아들의 아버지). 이런 점들을 종합하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구약에도 엄연히 존재했고, 하나님에 의해서, 선지자와 왕을 통해서 고백되었던 내용입니다. 특히 창세기에서는 희미했던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하나님과 친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특히 다윗에 의해서 선명하고 온전하게 드러나고, 말라기에 와서는 하나님과 사람이 번갈아 가며 '아버지'됨을 이야기한 것은 점진적으로 아버지 됨의 계시가 발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 호칭 연구: 예수님의 '아버지' 어휘 사용에 관하여"란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복음서의 기록 순서를 따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는 빈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신약 전반에서 자연스럽게 '아버지'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무슬림(모세 오경만을 공유함)이나 유대교(구약을 공유함)는 마치 이 글에서 살핀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로 계시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격적이고 상호교류적인 온전한 관계 맺는 데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이런 한계는 그들만의 것이라기보다는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도 흔하게 마주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신약 이후의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가톨릭은 사제를 'father'로 부르기까지 하면서도 하나님을 초월적 능력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왕으로 대하거나 도덕군자가 되라고 재촉하는 심판자로 오해하기 일수입니다. 하나님을 찾음으로 만나고, 떠나지 않고 섬김으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아버지 됨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이 자라며 보고 듣고 경험한 아버지상을 거꾸로 하나님께 투사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정작 그에 합당한 샬롬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세에게 아버지 됨은 민족의 아버지로, 이스라엘을 지으시고(created), 만드시고(made), 세우시는(made) 분이시니 그에 합당하게 보답해야  합니다(신 32:6), 다윗은 솔로몬의 아버지이지만 하나님이 솔로몬의 아버지 되심을 알고 믿었으며, 나의 아버지로 고백했습니다. 또한 그 아버지 됨은 일회적이고 영구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격적이며 상호교류적 관계로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 것이 요구되고(대상 28:9),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삼가라, look, consider, be careful/ 대상 28:10) 이사야에게 있어서는 타인을 정죄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을 포함시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요청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예레미야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보호자로서의 아버지(3:4)이자, 자신을 떠나지 않기를 기대하는 아버지(3:19)입니다. 또한 예레미야에게 계시된 아버지는 회복케 하시는 분으로 인도하시고 간구할 때 넘어지지 않게 하시며,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말라기에서 나타나는 아버지는 주인을 종이 공경함 같이, 두려워함같이 대해야 하는 분이시자, 우리의 한 아버지로 우리가 서로 거짓을 행하는 것을 멈추어야 할 이유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다르지만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보시기에 심히 좋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상속자로 내게 주신 삶, 가정과 직장과 교회, 이 나라와 세계를 돌보는 수고를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샬롬. 

로마서 8:15–17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출처] https://shalomvil.tistory.com/123?category=271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