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짐에서 벗어나 진정 영생을 얻기 원한다면(마11:28,요5:40)_2018-04-22(설교전문)

by 갈렙 posted Apr 2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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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죄짐에서 벗어나 진정 영생을 얻기 원한다면(11:28,5:40)

[일시] 2018422일 주일낮예배설교안

[찬송] 11:28, 5:40(신약 18, 151)

PW: 믿음, MIW: 나아가는

T.S: 믿음이란 쉼과 생명얻기 위해 주님께로 나가는 것이다.

   

1. 서론

1)인사

오늘도 거룩한 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예배하러 나온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계시며, 예배중에 임재하시어 복을 주십니다.

오늘은 거룩한 주일입니다. 우리는 안식을 넘어서 새 창조를 시작하는 주의 날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적극적으로 주의 날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할까요? 아니면 환경이 될 때까지 그냥 기다려야 하나요?” 가장 바람직한 답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주의 날에 힘써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이제 새로 믿은 자들에게 바른 길을 제시해주기 위함입니다). 혹시 주일성수가 큰 주제라고 한다면, 좀 약한 것으로 질문해보겠습니다. 주일낮예배시간에 10분전에 와서 적어도 5분전에는 예배당 안에 앉아 있어야 하나요? 아니면 좀 늦어도 상관이 없는 것인가요?” 가장 바람직한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배시간에 늦어 헐레벌떡 달려오기보다는 일부러일찍 와서 먼저 마음을 정돈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왜냐하면, 이제 처음으로 우리교회를 찾는 이들에게 바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의 삶을 돌아봅시다. 과연 우리는 주의 날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키고 있습니까? 그리고 예배시간에 지각하지 않고 미리 와서 예배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요즘 들어와서 예배시간 5분전에 준비찬송을 하려고 하는데 찬송할 사람이 별로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대로 계속해서 이렇게 나가는 것이 좋을까요?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주일을 어떻게 하면 빠지지 않고 지킬 수 있는지 그리고 주일예배시간에 늦지 않게 나와서 예배를 잘 준비하며 드릴 수 있는지, 그 방법과 이유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2. 문제제기

 

1)본문요약 및 의문점 제시

오늘 말씀은 구원하러 오신 예수께서 현재 피곤해 지쳐 있으며 이미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는 채 있는 사람들에게 쉼을 주기 위하여 자기에게로 나아올 것을 초청하지만 오지 않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도 나아오지 않는다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피곤해 지쳐 있고 이미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는 자들에게 굳이 당신을 향해 나오라고 해서 예수님은 직성이 풀리시는 분이십니까? 그냥 너무 힘이 드니 오라고 말씀하지 않고 그냥 그들에게 쉼을 주면 아니 되는 것입니까? 예수께서는 피곤하고 지쳐있는 자들을 힘들게 하려고 그러는 것입니까? 짐이 무거워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자들을 괴롭히려고 그러는 것입니까?

그리고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다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다면 그들을 칭찬해 주실 것이지, 왜 예수님에게 나와서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성경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되어서 피곤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향하여 당신에게로 나오라고 말씀하시며, 성경을 배웠지만 당신에게로 나오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까?

 

2)청중적 접근

오늘날 나도 내 문제 때문에 시달려 힘들어 죽겠고, 몸도 지쳐 있는데도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그것도 10분전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3)본문문제배경

오늘 본문 말씀은 사실 두 가지 말씀입니다. 하나는 안식일규정에 매여 있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자들에게 안식일 규정을 지켜서 쉼을 얻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붙들어야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유대인들이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는데, 구약성경에 말씀하고 있는 이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분에게로 나와 배우려 하지 않고 오직 성경만을 파고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4)문제발생원인

주님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1:28 [현재]수고하고[있고] [이미] 무거운 짐[] [채 있는] 자들아 다 내게로(나를 향하여)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장차] 쉬게 하리라(할 것이다)

5:40 그러나 너희가 [][][계속해서] 얻기 위하여 내게(나를 향하여) [단번에] 오기를 [계속해서]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5)문제 심리묘사

믿음이 없으면, 수고하고 있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있어도 주님께로 나아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왜 힘들어죽겠는데 주님께로 나오라고 하느냐면서 불평하기만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성경책만을 붙잡고 있을 뿐 진짜 성경책을 주신 생명의 예수님에게로 나아오지 아니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성경공부만 열심히 하면 장땡이지, 무슨 예수님이냐면서 그분에게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3. 문제해결

1)인간의 헌신과 하나님의 주권(방법, 심정)

그러므로 우리 믿는 자들은 믿음으로 오늘도 날마다 일만하지 말고, 무거운 짐을 진채 힘들어하지만 말고, 우리에게 진정 쉼을 주시는 예수님에게 나아올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자들은 오늘도 성경만을 붙들려고 하지 말고 우리에게 실제로 영생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에게 나아올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과 이론만으로 공부하는 자들에게 주님에게로 나오라고 권면하시는 것인가?

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당신에게로 나오라고 권면하시는 것일까요? 너무나 힘들고 지쳐 있으면 그냥 쉬게 해 주실 것이지, 너무나 무거운 짐에 시달려 고통받고 있는 자들을 보시면 그냥 쉬게 해 주실 것이지, 굳이 당신을 향하여 나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진정 무엇을 바라는가를 알아보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어떻게 쓰는지를 보시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를 불러 일으키지 아니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할 때 우리는 그때 자유의지를 발동합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이미 지쳐 있는데 주님께로 나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말아야 하는가? 내가 지금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서 도저히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인데, 과연 내가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이것은 사람이 과연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를 어디에 사용하는지를 선택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하나님은 항상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을 절대 지옥에 보내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만을 행하신다면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시며, 모든 사람들이 다 회개하여 구원얻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들을 결코 강제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사람일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나 강제하지는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멸망당하지 않도록 회개하기를 원하시나 강제하지는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쉬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으며,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수 있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해 놓으시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초청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 할지라도 만약 초청에 반응하지 않는 자를 구원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 그냥 쉼을 주실 수 없습니다. 그냥 영생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만약 반응하지도 않는 자에게 쉼을 주고, 안식을 주고, 구원을 주고, 천국을 준다면 즉시 사탄의 고소와 항변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사탄마저도 불못에 쳐넣을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쳐넣되, 사람은 쳐 넣으시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 인간은 정말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우리가 구원을 위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르치는 것입니까?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신다고 가르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잘못된 교리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적타락과 전적무능이라는 교리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노예의지만 가지고 있다는 이론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리는 중세시대의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 루터를 거쳐 칼빈에게서 체계적으로 집대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거스탄과 루터는 어떤 주장을 한 것입니까? 그들은 인간에게는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사람은 더 이상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고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능력만 갖추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타락이후 인류는 죄를 지을 수 있는 노예의지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결코 선을 행할 수 있는, 구원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자유의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여기에서 한 술 더 떠서, 이처럼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전적으로 무능하기에, 선을 행할 수도 없을뿐더러,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다고 정의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바울이 쓴 성경구절을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 말씀은 전도서 7:20을 인용한 것입니다.

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이 말씀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사람들 다 죄 아래 놓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말한 의인이 아닌 자는 바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죄를 짓는 인간이라는 뜻인데, 칼빈은 이것을 바꿔치기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완전히 부패했기에 전적으로 무능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거기에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만약 인간이 구원얻기 위해, 안식을 얻기 위해, 영생을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해야 할 것이 없다면, 예수께서 나를 향하여 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냥 강제로 끌어가시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준비는 다 해 놓으셨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 앞으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진정 안식을 얻고,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기를 정말 원하는지를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타락하긴 타락했어도,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며, 타락의 정도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어 초청하면 그 초청에 응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상한 갈대이며, 꺼져가고 있는 심지라는 것입니다. 상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꺾어지지는 아니했으며, 꺼져가고는 있지만 완전히 꺼진 상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12:20).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등불)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그러므로 구약시대에도 언약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와하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0:19-20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 인간이 자유의지를 사용하되,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그러므로 모든 인간을 쉼을 얻기 위해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다시 말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자신의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모시고 구원을 받게 되면 양심이 살아납니다. 자유의지가 더 회복되는 것입니다.

딤전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선한 양심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그런데 문제는 이미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 성도들이라도 좀 더 회복된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자유의지란 무엇입니까? 외부에 있는 어떤 물리적인 조건이나 내면에 있는 어떤 본능이나 욕구에 제약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의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비록 죄인이라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그러한 좀 더 회복된 자유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고 잘못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무엇 때문에 남아 있었으며,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좀 더 회복되었습니까? 먼저는 주님께로 나와서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의 지체들을 반드시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는 자가 아주 많습니다. 대체로 2가지 형태로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첫째, 회복된 자유의지를 육신의 본성을 따라가고, 죄를 짓는 데에 사용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일이 되었어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자신의 영혼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혼을 마련해주신 날을 영혼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취미생활하고 결혼식장에 가고, 등산 가는데, 육신을 위한 쾌락과 즐거움에 사용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다시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나는 지옥에 가도 좋사오니 그리로 보내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선택을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자유의지의 선택이 나오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며,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한 자는 반드시 견인하여 구원받게 하신다는 잘못된 교리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고 전적으로 무능하기에 구원의 모든 과정을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이니 내가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혹시 내가 선택한 것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죄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다 막아주시고 도와주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번 두 번 주일을 빠져보는데, 교통사고가 안 나거든요. 하루 하루 살아가는데 별 문제가 없거든요. 그러니 나중에는 양심에 화인맞은 것처럼 대놓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둘째, 그것으로 자신의 자유를 누린다고 하면서 오히려 남들의 자유의지의 선택적인 권한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앞의 것은 그 결과를 자신이 받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지만 후자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내 안에 성령께서 들어오시게 되어, 이전보다 더 죄된 본성을 이길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성령을 좇아 사는 데에 사용하지 않고서, 오히려 죄된 본성을 따라, 이 세상을 따라,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에 한 번쯤 빠지는데 그 자유의지를 사용하고, 예배시간에 늦는 데에 그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에서 벗어난 우리는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적으로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주일을 빠질 수도 있고, 주일예배시간에 늦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의지의 사용이 얼마나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율적인 자유의지의 사용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롬14~15장에 걸쳐 언급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이것입니다.

15:1-3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어떤 음식(제사고기나 술이나 마약 등)을 먹어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형제는 그것을 보고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믿음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믿음이 약한 자는 그 행동을 보고 시험에 들 수 있으며, 나쁜 길을 그대로 따라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주일날에 이미 구원을 얻은 채 있는 우리 성도들은 안식일처럼 규정에 따라 살지 않아도 되니, 그날 직장에 나갈 수도 있고, 가족의 애경사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본 믿음이 약한 형제는 실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를 잘못된 사용입니다. 하나님게서는 자유의지를 영생을 얻기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요, 다른 형제들도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우라고 주신 자유의지입니다. 한 마디로, 주일에 빠지라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일예배시간에 늦게 와도 좋다고 허용하는 자유의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믿음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하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데 사용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4. 영적 법칙

믿음이란 자신의 자유의지를 육체나 자기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가고 형제를 살리는 데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5. 복과 결단

1)

. 헌신자가 받는 복

유대인들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했습니다.

. 청중의 더 큰 복

그러나 우리는 자유의지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죽은 다음, 안식도 얻고 영생도 얻기 때문입니다.

 

2)결단

저는 과거 10년간을 우리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십일조하고, 자발적으로 예배에 지각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새벽기도회에도 나오고 금요기도회도 나오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봉사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올 사람이 없어서 새벽기도회에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고, 금요기도회를 폐지해야 할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지금도 예배시간 5분전이 되었는데도 예배당 안에 몇 명이 앉아 있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에게 남아있고 회복된 자유의지를 보다 더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을 찾고 주님께 봉사하고 주님께 기도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편안함을 위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앏니다. 이것이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도 잘 앏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항상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사람이 지각하고, 오후찬양예배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교회에 직분을 주려면 시험해보고 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진 자유의지를 육체를 복종시키고, 주의 일에 열심을 내는 데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교회의 중직자로 세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보고 후배들도 예배시간에 지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고 예배시간에 자기도 빠질 것입니다. 그 사람을 보고 봉사도 하지 않고 이리 저리 요령만 피울 것입니다.

 

. 결단의 필요성과 방법

이제는 고쳐야 합니다. 자유의지는 육체를 따라가라고 주신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자유의지로 죄를 지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로 일하는 데에 늘 빠지고 자신이 혜택을 누리는 데에만 쓰라고 주신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 결단의 축복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에 사용해야 합니다. 피곤하고 지쳐 있어도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에 자유의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무거운 짐이 있어도 주님께 나아가는 데에 자유의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 안다고 깝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데 자유의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제는 고쳐야 합니다. 고치지 않으면 첫째, 이 교회에 새신자가 잘못된 것을 배우고 따라갈 것입니다. 둘째, 이 교회에 더 이상 새신자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 한 번 드리려고 왔는데, 기존 성도들이 늦게 늦게 꾸역꾸역 들어오는 것을 볼 때에 이 교회는 게을러터진 교회라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10년을 새롭게 써나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왜 우리교회가 부흥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를 믿음으로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에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무겁다고 짐을 내려놓는 데에 자유의지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유의지를 육체를 쳐복종시키는데, 무거운 짐이 있어도 믿음으로 반응하는 데에 사용합시다.

<하나님의 장자의 명령과 선포>

1)감사와 회개

주여,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 후에도 여전히 조금은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인간의 자유의지는 주님의 초청에 반응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인간의 자유의지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양심이 청결해짐으로 더 회복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회복된 자유의지는 육체를 따르고 죄지으라고 주신 자유의지가 아님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회복된 자유의지를 조심히 사용하지 않으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실족하게 할 수도 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육체를 따르지 않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죄에게 나를 내주지 않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자유의지라도 맘대로 사용하지 않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믿음 약한 형제를 한 번 더 생각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자유의지를 나를 기쁘게 하는 데에 쓰지 않겠나이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자유의지를 맘껏 사용해도 된다고 가르치는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죄된 본성과 육체를 따라가게 유혹하는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자유의지를 사용하되 조심히 분별하여 사용할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더라도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로구나.

2. 인간의 자유의지는 주님의 초청을 반응할 수 있을 정도는 남아 있었구나.

3. 회개하고 예수믿으면 청결한 양심이 됨으로 자유의지가 더 회복되는구나.

4. 자유의지는 내 것이라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구나.

5. 자유의지는 죄된 본성이나 육체대로 살므로 맘대로 죄지으라는 자유의지가 아니었구나.

6. 자유의지는 새신자를 위해서라도 잘 사용해야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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