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왜 바울을 부르셨는가?(행9:3~9)_2022-05-15(주일)

by 갈렙 posted May 1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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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께서는 왜 바울을 부르셨는가?(9:3~9)

[일시] 20220515(주일) 오전9, 11

[찬송] 25장 면류관 벗어서, 200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508장 저 북방 얼음산과

PW: 믿음, MIW: 갱신

T.S: 믿음이란 오늘도 새롭게 계시해준 온전한 말씀을 따라 자신을 갱신하며 주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1. 서론

1)인사

오늘도 거룩한 주일을 맞아, 주님 앞에 예배하러 나온 우리 성도님들을 하나님께서 진심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 가운데 계시며, 예배중에 임재하시어 복을 주십니다.

우리는 지난 주까지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천국복음을 전파하러 오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오셨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저 하늘에 준비된 장소적인 천국을 모른 채, 상태적인 천국만을 알고 있는 생각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역시 천국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입니다.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그러므로 이 세상의 종말도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어야 오는 것입니다.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거주지)[]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다다를 것이니라)

그런데 이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던 예수께서 이제 그의 사역을 12제자들을 불러 맡기셨습니다.

10:5-8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7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천국복음 전파사역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불러내서 사용하신 12제자들은 이미 천국에 있을 때부터 사명을 주어서 이 땅에 보내졌으며 때가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12사도들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또 다른 부류의 사도로서 바울을 불러내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어린양의 12사도들로서는 만족할 수가 없어서였을까요? 아니면 그들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래서 오늘은 왜 예수께서 사도 바울을 따로 부르시어 그를 사도라 부르시고 그에게 사역을 맡기게 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오늘 우리 동탄명성교회와 같은 부르심을 받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 문제제기

 

1)본문요약 및 의문점 제시

오늘 본문 말씀은 부활승천하신 주 예수께서 사울을 직접 찾아와 만나시더니 그가 앞으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려줄 자가 있으니 다메섹 도성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왜 사울을 직접 찾아오신 것일까요?

예수께서는 왜 그날 초자연적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신 것일까요?

예수께서는 이미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뽑으신 12제자에게 어떤 일을 맡기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아직 한 명도 죽지 않고 다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을 불러서 그에게 어떤 일을 맡기신 것인가요?

 

2)청중적 접근

3)본문문제배경

오늘 본문 말씀은 A.D.34년경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지 약 4년이 지난 어느날,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220km 떨어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울을 만나시어 그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그의 이름은 바울입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 성경에 등장할 때에는 사울 등장합니다.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13: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그러니까 바울이 가진 원래 히브리식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그가 또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바울이라는 로마식 이름도 있었기에, 그가 주님을 만난 이후 헬라와 로마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잘 부를 수 있는 로마식 이름인 바울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사울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저의 생각은 구약의 사울왕이 타락한 선민의 대명사였기에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4)문제발생원인

문제는 그가 예수 믿기 전에는 겁나게 예수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생각했고, 그를 믿고 따르는 자는 있지도 않은 예수님을 부활했다고 믿고 따르는 미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가만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는 그런 자들은 없이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며 또한 스데반을 죽일 때에 찬성투표를 하였으며,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격분하여 외국의 성에까지 가서 박해를 하였습니다(26:10~11). 오늘 사건도 그가 대제사장에게 찾아가 권한 위임을 받아 다메섹에 있는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오려고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해보다 더 밝은 빛 가운데서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26:13). 그러자 그와 동행하던 자들까지 다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그러자 그는 즉시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알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고, 단지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는 말 상대방을 높이는 말주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자신이 누군지를 그에게 알려주신 후에 그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9:5~6[직역] 그런데 그가 말하였다. “주여, 당신은 누구시니이까?” 그런데 그분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바 예수다. 그러나 너는 일어나라. 그리고 너는 도시 안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반드시 행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네게 [장차] 발언될 것이다

그에게 주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 성 안에 들어가면 그것을 알려줄 자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5)문제 심리묘사

믿음이 있어도 자신이 무슨 사명으로 이 땅에 보내어졌는지 모르면, 계속해서 자기의 길만을 고집하며 걸어가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도 자신이 무슨 사명으로 이 땅에 보내어졌는지 모르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을 서슴치 않고 행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잘 모릅니다.

믿음이 있어도 자신이 무슨 사명으로 이 땅에 보내어졌는지 모르면,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그것에 열심을 냅니다.

믿음이 있어도 자신이 무슨 사명으로 이 땅에 보내어졌는지 모르면, 누군가는 하늘에서부터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 땅으로 보냄을 받았으며, 지금도 그 일에 협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잘 모른 채 살아갑니다.

믿음이 있어도 자신이 무슨 사명으로 이 땅에 보내어졌는지 모르면, 천국에서 들어가서 받을 상이 이미 예비된 채 이 땅에 자신이 보내어졌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믿음이 있어도 자신이 무슨 사명으로 이 땅에 보내어졌는지 모르면, 하늘에 자신을 위한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영광스러운 지위와 신분이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않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자신이 무슨 사명으로 이 땅에 보내어졌는지 모르면, 자신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만들고, 천국에서 왕노릇하는 자가 되는 길을 제시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믿음이 있어도 자신이 무슨 사명으로 이 땅에 보내어졌는지 모르면, 자신도 소경으로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라오는 다른 사람들도 역시 같이 그리로 들어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3. 문제해결

1)인간의 헌신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서 하늘에 준비된 모든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하나님의 주권(방법, 심정)

 

. 사울(뒤에는 바울’)이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조금 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그는 예수 믿기 전에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전혀 모르고 살아가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의 실제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 예수님과 비슷할 것 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유대인들 중에는 바리새인의 분파에 속해 있던 엘리트 유대인이었습니다.

3:5-6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런데 그는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랐기에 나사렛 이단 괴수를 따르는 자들을 가만 두지 않겠다고 벼르고는 그 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씩씩거리고 날뛰던 다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출세를 위하여 예수믿는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는 데에 앞장서는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에 있는 형제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 길을 재촉하다가 도상에서 주의 방문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도 살펴보았지만 주님은 한가이 놀고 있는 사람을 불러 사용하지 않으습니다. 무엇이든지 열심이 있는 사람을 불러 사용하십니다.

 

. 바울의 부르심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우리는 지난 몇 주를 통하여 공생애 기간에 주님께서는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에게 자신의 일을 맡기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바울이라는 사람을 주님께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울에게는 이전에 12사도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첫째, 부활하신 예수께서 직접 오셔서 그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 읽지는 않았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실 때에는 대부분 바울처럼 하시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다메섹에 있던 교회의 지도자 아나니아의 경우를 보면, 그때 주님께서는 환상 중에 투영체로 오셔서 어떤 것을 보여주시고 말씀을 하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오셔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류 역사상 없었던 일이 그때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니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둘러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두 눈을 뜨고 그것을 보면 바울의 눈이 그만 멀고 말았습니다. 그만큼 그에게는 인류 역사에 엄청나게 중요한 사역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사명 자체가 다른 12사도들보다 3배가 더 많습니다. 12사도들의 대표는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2:7~8).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왕들과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까지 전파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왕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하도록 천국에서부터 사명을 주어 보내신, 보다 큰 그릇이었다는 것이다.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아들들)에게(앞에서) 전하기(운반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15-16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따로 구별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부르셨던) (하나님) 16 그의 아들을 이방[인들][] []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계시하기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 왜 예수께서는 베드로 말고 따로 바울을 들어서 사용하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베드로 말고 왜 바울을 따로 부르셨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더 귀하게 쓰임받는 사람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왜 첫 번째 어린양의 12사도 이외사도바울을 따로 불러서 사용했던 것일까요? 만약 베드로를 비롯한 어린양의 12사도들에게 어떤 일을 맡겨서 그 일을 하게 할 수 있었다면 왜 바울을 따로 불러내었겠습니까? 다시 말해, 우리는 바울이 받은 사명을 통하여, 왜 하나님께서 그를 따로 불러내었는지를 아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할례자인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왕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택한 주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12제자들 말고도 따로 주님이 직접 오셔서 그를 선택하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이 특별하게 3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하도록 선택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그는 길리기아의 다소 사람이자 헬라파 유대인으로 자라났기에 유대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소양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태어난 채 있고), 이 성[]에서 자라(양육받은 채 있으며), 가말리엘의 문하(발들 곁)에서 우리[] 조상<>율법의 엄한(엄밀함을 따라) 교훈을 받았고(훈련받은 채 있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사람들이 있는 것 같이) 하나님께 대하여(하나님의) 열심이 있는 자(열정적인 자로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유대 본토에서 태어나게 하지 않으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유대인이었지만 그의 부모가 작은 소입이 아닌 길리기아의 다소라는 대도시에 태어나서 살면서 헬라어와 라틴어를 사용할 수 있었고, 또한 아버지를 따라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헬라어를 마음대로 구사할 줄 알았고 글로도 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쓴 편지 13이 신약성경으로 남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8~10세 쯤에 예루살렘의 친척집이나 결혼한 누나 집으로 보내어져 거기에서 초등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15세쯤 되었을 때에는 힐렐 학파의 거장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율법의 엄한 교훈 곧 바리새파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가말리엘은 유대 3대 랍비 가운데 하나인 힐렐의 손자로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관대한 입장을 보였고, 율법 해석이나 할라카적 결정에 대해, 문자적인 해석을 취하는 고지식한 샴마이학파를 따르지 온건한 태도를 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하는 율법 규정은 샴마이학파에서는 문구적으로 적용시켜 안식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안식일에 소가 구덩이에 빠져도 건져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한 안식일에 전쟁이 터져도 저항하지 않았고 도망치지도 못하게 했던 샴마이학파였지만 힐렐학파에서는 율법의 정신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므로 전쟁이 났을 때에는 방어차원에서는 안식일에도 방어는 할 수 있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방인에게 보다 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할례자의 벽을 쉽게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더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던 바울이 선택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 그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계시해주시는 온전한 말씀을 순종하여 계속해서 자신의 역량을 갱신하여 나갔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의 생각은 고착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도 처음에는 그리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의 초기의 편지들을 살펴보면, ‘믿음애 대해서는 강조하는데, '회개하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비롯하여 데살로니가전후서에도 회개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로마서에도 딱 2번 언급하는데(2:4~5) 그것도 간접적으로 말할 뿐 '회개하라'고 하는 직접적인 명령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가 초기에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만큼 이방인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으므로, 그들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었기에, 믿음을 강조하다보니 초기 편지에는 '회개하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점차 회개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방인일지라도 회개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20:20-21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26:19-20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계속해서] 회개하고(회개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실행]하라 전하므로

또한 그의 종말론을 보면 그도 처음에는 당대에 예수께서 오실 것이라는 임박한 종말론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첫 번째 편지를 보낼 때(A.D.54~55)에는 자녀들을 굳이 결혼시키지 말라고 조언했습니다.

고전7:25-26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하지만 그는 나중에 주님의 재림이 지연된다는 것을 알고는 디모데후서를 쓸 때(A.D.66~67)에는 개인이 죽었을 때에 천국에 들어가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 입장을 선회하였습니다.

고전15:51-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살전4:16-17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장차]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있고] 남은(남겨져 있는)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장차] 있으리라

딤후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부터] [장차] 건져내시고(구해내실 것이다) []의 천국에(안으로) 들어가도록 [장차]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또한 그의 구원관과 천국관처음에는 오직 믿음으로 죄사함받는 구원관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을 무렵이 되었을 때에는 믿음만으로 구원얻는다는 선포적인 구원관에서, 점차로 구원을 일종의 경주와 노정으로 묘사하면서, 나중에는 그 길을 다 마칠 때에 이미 갖고 있는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구원의 여정은 곧 천국에서 상을 받기 위한 달리기와 같다고 언급하면서, 누구든지 천국에 가기를 원하는 자는 상얻기를 사모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경주하라고 언급하였습니다. A.D.54~55년 썼던 고린도전서에는 상을 얻도록 달음질하라고 권면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A.D.60~62년경에 썼던 빌립보서에서도 역시 푯대를 향하여 부름을 상을 얻기 위해 자신이 달려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직전인 A.D.66~67년에 쓴 디모데후서에서는 그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있는데, 이제 주님이 주실 의로운 상이 자신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고전9:24-25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9간주하지) 아니하고 오직 한[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딤후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싸워 온 채 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마친 채 있다) [그리고 나는] 믿음을 지켰으니(지킨 채 있다)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예비되어 있다)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에 내게 [갚아]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마련이 되어 있다)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믿음으로써 죄사함을 받은 구원관에서 나중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관으로 구원관의 개념을 새롭게 정리하였고, 천국에 들어가되 면류관을 얻는 구원을 추구해야 한다면서, 주님께서 주신 온전한 계시의 말씀으로 자신을 갱신하여 나갔던 것입니다.

또한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단지 하나님이라고 말했지만 나중에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라고 분명하게 전파했습니다. 그가 A.D.54년 가을에서 55년 초에 썼던 로마서에서 그는 예수님을 찬양받으실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A.D.66~67년경에 쓴 디모데후서에서는 그분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9:3-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4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육신을 따라서는)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부터(에크) 나셨으니(있으니) []는 만물 위에 계셔서(있는 분이자),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정관사 없음)이시니라 아멘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이런] []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되셨도다).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받게 되셨도다). 천사들에게 보이시고(보여지셨도다) 만국에서 전파되시고(전파되셨도다)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되셨도다).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올려지셨도다)

고로 하나님은 그를 깨우쳐 주실 때, 금방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진전된 계시를 따라 그것을 추구하고 따라가는 바울을 매우 기뻐하였으며, 그래서 그를 계속 쓰신 것입니다.

 

3)청중의 문제와 해결

 

4. 영적 법칙

믿음이란 오늘도 새롭게 계시해주시는 온전한 말씀을 따라 자신을 갱신하면서 하나님께서 위에서 주실 상을 향하여 부지런히 달려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5. 복과 결단

1)

. 헌신자가 받는 복

. 청중의 더 큰 복

 

2)결단

오늘날 우리가 지금 나누고 있는 말씀들은 전에는 없던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기록되어 있던 말씀입니다. 다만 그것을 이제야 비로소 눈을 열어 깨닫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회개의 중요성과 단순히 믿음구원이 아니라 천국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 예수께서는 한 분의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이 마지막 시대에 주님이 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왜 다른 사도들이 있는데도 바울을 들어쓰셨을가요? 그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고칠 줄도 알았고, 주님께서 더 진전된 계시의 말씀을 깨우쳐 주시면 즉시 그것을 깨닫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주어진 사명을 잘 완수했기 때문입니다.

 

. 결단의 필요성과 방법

. 결단의 축복

 

 

 

<하나님의 장자의 명령과 선포>

1)감사와 회개

주여, 주님께서는 왜 바울을 따로 부르셔야 했는지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바울은 하나님께서 들어쓰시려고 작정하고 이 땅에 보내셨으며 때가 되자 그를 불러내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바울은 유대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개방된 사람이었기에 주께서 그를 쓰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바울은 주께서 깨우쳐 주면 얼마든지 자신의 부족함을 고칠 수 있는 유연한 사람이었기에 그를 쓰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바울은 주님이 계시해주는 진전된 계시를 따라 충성했기에 그가 쓰임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옛것에 사로잡혀 주님이 깨우쳐주는 진전된 계시에 눈을 뜨지 못했나이다.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소서.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주께서 들어쓰시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날마다 배우는 자가 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진전된 계시를 따르는 자가 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시대적 소명을 다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내 할 본분과 위치를 망각하지 않겠습니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옛 것에만 도취하게 하여 새 양식을 먹지 못하게 막는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이제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미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깨우쳐 주는데도 그것에 반응하지 못하게 막는 악한 영들은 결박을 받으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이 시대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놓치지 말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시대마다 소명자들이 있어 왔구나.

2.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준비된 그릇을 지금도 사용하시는구나.

3. 주님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계시를 밝혀주심으로 시대를 향한 소명적 부름에 귀 기울이게 하시는구나.

4. 예수님 이외에 온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구나.

5. 오늘도 새롭게 깨우쳐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라야 주님께 쓰임받을 수 있구나.

6. 옛 것을 고집하는 자는 주님의 말씀에 유연하게 대처하기가 어려울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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