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강해(20) 에스겔이 본 환상과 요한계시록과의 상관관계(1)(겔48:30~35)_2019-11-13(수)

by 갈렙 posted Nov 1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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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ZF-GbIDLkVk
날짜 2019-11-13
본문말씀 에스겔 48:30~35(구약 1230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요한계시록의축소판,하나님의보좌,새예루살렘모습,궁창,보좌에앉으신이,네생물,두루마리책,재앙의책,일곱인,일곱나팔,일곱대접심판

에스겔은 크게 2가지 환상을 본다. 하나는 "하나님의 보좌"에 대한 환상이고 또 하나는 "새 예루살렘 성(도시)과 성전"에 대한 환상이다. 전자는 1장과 10장에 나오고, 후자는 40~48장에 걸쳐 나온다. 그 중간에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재앙들이 나온다. 고로, 에스겔서의 책의 구성은 영락없이 요한계시록과 흡사하다. 그래서 에스겔서를 어떤 이는 "요한계시록의 축소판"이라고도 부른다. 그만큼 요한계시록(모든 것의 완성)을 이해하는 데 에스겔은 매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주와 다음주에는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을 비교해보기로 했다.

 

1. 들어가며

  에스겔서는 정말 놀라운 예언의 책이자 계시의 책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신약의 책이 한 권 더 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도 에스겔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경 중에서 유일하게 예언의 책이자 계시의 책인 것이다. 먼저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의 책의 구성을 보자. 놀랍게 거의 비슷하다.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이 먼저 나오고 이어서 중간에 재앙들이 나오고, 마지막에 가서 새 예루살렘 성(성전)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성 면에서 보나 내용면에서 보나 가장 많이 에스겔서를 많이 빼닮은 요한계시록을 에스겔과 서로 비교해보는 것은 대단한 유익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어쩌면 제2이사야서(40~66장)를 신약성경(마태복음~요한계시록)의 축소판이라고 정의한다면, 에스겔서는 "요한계시록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부터는 에스겔서를 요한계시록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에스겔서가 얼만 요한계시록의 배경과 바탕이 되어있는지를 살펴봄으로서, 요한계시록이 왜 예언과 계시의 완성의 책이라고 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다.

 

2. 에스겔서의 독특한 특징은 무엇인가?

  에스겔서는 요한계시록과 비교해 볼 때에 어떤 책인가? 우선 첫째로, 책의 구성에 있어서 예언서요 계시서인 요한계시록과 매우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에스겔서를 잘 알고 있거나 에스겔서를 쓰게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시대만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동일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과 하나님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보았기 때문이요, 그것을 책의 맨 앞과 맨 뒤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도 에스겔서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주변의 광경 그리고 하나님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과 성전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장차 메시야로 보낼 존재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에스겔 3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장차 보내주실 메시야는 다름이 아니라 여호와다. 여호와께서 친히 선한 목자로 오셔서 친히 이스라엘을 다스리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으로 오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분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메시야로 오실 것임을 에스겔서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셋째,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의 약 700년의 시간차가 있어, 하늘의 광경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비교해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에스겔서가 쓰여진 시기는 B.C.592~571년경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A.D.95~96년경에 쓰였다. 시간차는 약 700년 가량 나는 것이다. 하지만 하늘의 광경이 많이 달라졌다. 에스겔서에는 없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며(예를 들어, "24장로들"), 네 생물의 날개가 2쌍에서 3쌍으로 달라져 있다. 넷째, 같은 것을 묘사하고 있지만 에스겔서에는 없지만 요한계시록에는 있는 것과 에스겔서는 있지만 요한계시록에는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에스겔서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대재앙을 간단하게 묘사한다. 그것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과 사나운 짐승들이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은 3대 7중 재앙으로서 다양하고 많이 커졌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재앙은 일곱인과 일곱나팔과 일곱대접 재앙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참고로, 7인은 재앙만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에스겔서에는 자세히 기록되었으나 요한계시록에는 짧게 기록된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새 예루살렘 성에 있는 성문의 12지파의 이름들이 요한계시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에스겔서에서 나오고 있고,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에게 땅의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지에 대해 요한계시록은 언급하지 않지만 에스겔은 언급하고 있으며, 천국에 들어간 성도들의 직분 중에 제사장과 땅의 왕들이 있는데, 이들이 어떤 자격을 얻어야 그러한 직분을 얻게 되는지 에스겔서가 더 잘 묘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조금 미흡하다고 느끼는 것이 있다면 에스겔서를 통독해보기를 권해 드린다.

 

3.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 보좌의 환상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에스겔이 환상 중에 올라가 본 하늘에는 한 마디로 궁창과 하나님의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이와 네 생물이 있었으며, 하나님의 음성과 천사들의 날개 부딪히는 소리가 있었다. 에스겔 보았던 하나님의 보좌는 수정같이 맑은 궁창 위에 있었으며, 그 보좌의 모양이 남보석 같았고 그 보좌 위에 사람같은 한 분이 앉아 계셨다(겔1:26~28). 그분의 허리 위의 모양이나 허리 아래의 모양은 달아오른 금붙이와 같은 광채가 사방으로 나고 있었고, 무지개가 그 보좌에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네 생물들의 머리 위에 수정같이 맑은 궁창(펼쳐진 광활한 공간)이 있었다(겔1:22).

  그런데 에스겔은 보좌를 보기 전에 먼저 본 것은 보좌 주위에 있는 네 생물이었다(겔1:5~21). 네 생물은 하늘에 있는 그룹천사 형상을 지니고 있었는데(겔10:15,20), 그들은 꼭 사람의 모습같았다(겔1:4~13). 그들의 모습은 특이했으니, 각각 사방으로 네 개의 얼굴을 가졌고, 네 개(2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 네 생물의 사면 얼굴모습은 송아지(그룹), 사람, 사자, 독수리의 얼굴이었다(겔1:10, 10:14). 네 생물들의 밑에는 횃볼같이 타는 바퀴같은 것이 있었고 이 바퀴에 둘러가면서 눈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 생물이 가고자 하면 바퀴가 들려져서 이동하였다(겔1:15~21). 그리고 날개가 부딪히는 소리는 놀랍게도 "많은 물소리" 같았다(겔1:24, 3:13). 그리고 네 생물의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 모양 같은 것이 있었다(겔10:21).
  그러나 계시록에 나오는 네 생물은 얼굴 모습이 다르다. 각 생물들은 오직 한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날개는 늘어나서 6개(3쌍)의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요한이 그 생물이 모습을 한 쪽면만을 봐서 한 면만이 보여진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당시에는 더이상 4면의 얼굴보다도 한 면의 얼굴만을 가져도 상관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의 네 생물의 날개는 모든 것이 완성된 후이기 때문인지, 그들의 권위가 훨씬 더 올라가 있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네 생물의 날개가 두 쌍에서 세 쌍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700년이 지난 후에는 그만큼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것에 대한 보상이 주어진 것 같다.

  그러나 확연히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에스겔을 비롯한 다른 구약의 성도들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 있는 24장로들과 거기에서 경배하고 찬양하고 있는 성도들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왜 그런 것일까? 그 이유는 아직 구약의 성도들이 부활체를 입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부활체를 입으신 분이기 때문이다(고전15:20). 그러니까 예수께서 부활체를 입기 전까지 구약의 성도들 중에는 부활체를 입은 자가 아직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영체로서 천국에 있는 낙원에 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로서 부활체를 입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게 되었고, 그후에 구약의 성도들은 한꺼번에 부활체를 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때 구약의 대표 성도들 12명이 12개의 보좌 위에 앉게 되었고(아마도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등이 앉아 있지 않을까 추정해본다), 그리고 신약의 12사도들(가룟유다를 대신하여 사도바울이 앉아있을 것이라고 추정해본다)도 12보좌에 앉게 된다. 그리고 그후로 신약의 성도들은 죽으면 곧바로 부활하여 생명의 부활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뵈옵는다.

  그때 에스겔은 보좌로부터 나오는 전능자로부터 큰 음성이 들었다.  이때 “보좌 위에 앉으신 이"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은 꼭 “맑은 물소리”와 같았다(겔43:2). 그런데 전능자의 "맑은 물소리"같은 음성은 “그룹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도 같았으며 “군대가 떠드는 소리”와도 같았다(겔10:5, 1:24).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많은 물소리"와 같은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인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계1:8,21:6,22:13). 더욱이 예수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처럼 들리기도 했지만(계1:15) “나팔같은 큰 음성”으로 들리기도 했다(계1:10, 4:1). 또한 천국에서 “많은 물소리”의 음성은 “구원받은 백성들의 찬양의 음성”이기도 했다(계19:6).

 

4. 두루마리 책과 책을 먹는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어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손을 내밀어 에스겔에게 한 권의 두루마리 책을 건네주신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서 먹으라고 하신다(겔2:8~9). 그런데 두루마리 책은 안팎으로 글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글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겔2:10). 그것은 장차 에스겔이 예언할 계시의 내용이었는데, 그것의 내용은 재앙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입에 넣어준 책은 먹기에는 달기가 꿀 같았다(겔3:3). 비록 재앙의 말이 기록되기는 했어도 그 말씀은 엄연히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에 보면, 사도요한도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에 대한 환상을 보았고(계5:1), 또한 작은 두루마리는 자신이 직접 받아서 먹게 된다(계10:2). 먼저, 사도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어린양이 일곱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 책을 받더니, 그 인봉을 떼는 장면을 보게 된다(계5:1,5,7~8). 그때 두루마리 책에는 "장차 되어질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재앙의 내용도 들어 있다. 그렇다. 요한계시록에는 2개의 두루마리 책이 나온다(계5:1, 10:2). 하나는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 책인데(계5:1), 큰 책이었고 봉인되어 있는 책이다. 그리고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6~22장에 나오는 “장차 될 일”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펴놓인 채 있는 “작은 두루마리 책”이 하나 더 나온다(계1:2,8~10). 그것은 이미 봉인된 책들이 다 풀어졌고 여섯째 나팔재앙까지 다 떼어진 상태이므로 이제 "작은 두루마리"가 된 것이다. 예수께서 재림을 준비해야 하시기 때문에 힘센 천사에게 그것을 위임한 것이다. 이것은 일곱째 나팔의 재앙이 기록된 책이다. 그런데 이때 사도요한이 받아서 먹었던 "작은 두루마리"도 사실은 에스겔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먹었을 때에는 사도요한의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다. 하지만 그것이 뱃속에 들어갔을 때에는 쓰게 되었다(계10:9~10). 그것 안에 수많은 재앙들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5. 장차 일어날 재앙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에스겔이 받아서 먹었던 두루마리 책에 기록되어 있는 재앙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된 것이었다(겔2:10). 그리고 그 내용을 살펴보니, 재앙들은 하나님께서 ‘칼’과 ‘기근’과 ‘전염병’과 ‘사나운 짐승’으로 예루살렘을 파멸시키겠다는 것이었다(겔5:16~17, 6:11~13, 7:5~10,15~16).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인의 봉인된 두루마리의 내용도 역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을 담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재앙은 아니다. 왜냐하면 첫째인을 뗄 때에 나온 흰 말은 재앙이 아니기 때문이다(계6:8). 아마도 복음전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둘째인으로 인한 붉은 말, 셋째인으로 인한 검은말, 넷째인으로 인한 청황색말의 출현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재앙을 가리키는 것이다(계6:2~8). 그런데 이때 사용된 재앙은 "칼과 기근과 전염병"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땅의 짐승들"에 의한 재앙도 들어있었기 때문이다(계6:8). 여기서 "땅의 짐승들"이란 요한계시록 13장에 등장하는 땅의 짐승들(계13:11)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자 다섯째인이 떼어질 때부터 사람이 죽어가는 재앙이 임하기를 시작하였다. 곧 다섯째인이 떼어지자, 짐승에 의한 순교자 재앙이 발생하였으며(계6:9~11), 여섯째인이 떼어질 때에는 해와 달과 별들로 인한 자연 재앙이 임하여 사람을 해치게 되었다(계6:12~17). 고로, 일곱개의 인은 예수승천이후 재림전까지 지구상에서 일어날 일을 언급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일곱째 인은 총7개의 나팔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첫째 나팔과 둘째 나팔과 셋째 나팔과 넷째 나팔의 재앙은 지해강천(땅과 바다와 강과 하늘)에 있는 생명체 1/3을 죽이는 재앙이었고(계8:1~13), 다섯째 나팔부터는 짐승을 통해 사람을 죽이는 재앙이었다(계9:1~12). 그리고 여섯째 나팔은 온 인류가 죽은 아마겟돈전쟁을 예비하는 것이었다(계9:13~21). 그리고 일곱째 나팔이 불어지는데, 일곱나팔은 일곱개의 대접재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일곱대접 심판은 짐승의 치하에 내리는 재앙들이다(계16:1~21). 이때 첫째와 둘째와 셋째와 넷째 대접 재앙은 지해강천(땅과 바다와 강과 하늘)의 생명체 전부를 죽이는 재앙이었고, 다섯째 대접재앙은 짐승의 보좌에 내리는 재앙이었으며, 여섯째 대접재앙은 사탄의 삼위일체(용, 짐승, 거짓선지자)가 모여 인류를 아마겟돈으로 모으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일곱째 대접재앙은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지는 재앙이었다. 이는 큰 성 바벨론인 음녀가 죽는 재앙을 가리킨다.

 

6. 에스겔은 어떻게 공간을 초월하여 이동할 수가 있었는가?

  이제는 에스겔이 어떻게 공간을 초월하여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보게 되었으며, 여러 장소로 순식간에 이동하여 그곳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았는지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통해서, 에스겔의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한 뒤 그를 하나님의 보좌에도 데려갔을 뿐만 아니라, 여러 장소에 순식간에 이동시켜 그곳의 사정을 정확히 보게해 주었다. 이러한 예는 겔8:3과 11:1의 경우에 나온다. 이때 에스겔은 바벨론에 있있지만 순간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때로는 바벨론의 그발강가의 델아빕에 갔다 올 수 있었고(겔3:12,14),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가서 볼 수 있었다(겔8:3). 그리고 겔11:24의 경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이동하여 그의 영이 바벨론지역에서 포로인들이 일하고 있는 일터로 데려다 주기도 하였다. 영이 빠져나가서 순식간에 이동을 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요한계시록에도 고스란히 나온다. 사도요한의 몸은 밧모섬에 있었지만 그의 영은 몸에서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가서 주님이 보여주시는 계시와 환상을 보고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계1:10, 4:1~2).

 

7. 나오며

  에스겔서는 제1장과 10장에서,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을 소상히 소개해준다. 그러니 이 책은 구약성경의 책들 가운데에서 몇 안 되는 독특한 계시서에 속한다. 그리고 에스겔이 예언할 때에는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요한처럼, 온갖 재앙이 기록되어 있는 두루마리를 먹고 예언을 한다. 그렇다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4가지였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한 재앙 뿐 아니라 땅의 짐승들로 인한 사망 재앙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대도 아마도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문제는 온갖 재앙을 받고 있는 자라도 다시 회복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회개"를 통한 방법이다. 이것은 다음 주에 더 소상히 다루도록 하겠다.

 

2019년 11월 13일(수)

정병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