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강해(14) 스데반의 놀라온 변증법적 설교(1)(행7:1~16)

by 갈렙 posted Jan 0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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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1월 07일(수) 수요기도회설교(신년감사주일)
[제  목] 사도행전강해(14) 스데반의 놀라온 변증법적 설교(1)
[찬  송] 찬 358장 주의 진리 위해, 찬 359장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찬 347장 허락하신 새 땅에
[말  씀] 행7:1~16(신약 196면)
[키워드] 스데반의 설교, 아브라함과 할례언약, 요셉의 생애, 예수님의 생애, 믿음과 율법의 상관관계, 성전의 변천, 모세와 다윗, 성전을 우상시함



1. 서론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후편이다. 이는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시면서 남기진 지상대명령이 주의 사도들에 의해 건립된 초대교회를 중심으로 실행되어 갔던 역사의 기록이다.
  이처럼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 최초 30년간의 기독교회의 역사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을 다룬 4복음서들과 연속선상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누가복음의 연작으로서 누가복음의 속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사도행전을 복음을 전파한 인물중심으로 그 내용을 구분한다면, 베드로행전과 바울행전으로 나눌 수 있다. 1~12장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복음전파를, 13~28장까지는 사도바울을 중심으로 한 복음전파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행1:8에 의한 지역적 지리적인 구분에 의해 그 내용을 구분한다면, 1~7장까지는 예루살렘에서의 교회의 설립과정과 성장과정을, 8~12장까지는 사마리아와 온 유대에서의 복음전파, 13장~21장 상반부(16절)까지는 수리의 안디옥을 중심으로 소아시아와 유럽으로의 복음 전파(여기에 1~3차 바울의 전도여행이 들어 있다), 21장하반절부터 28장까지는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의 복음전파(제 4차 바울의 로마전도여행)를 다루고 있다.
  이 중에서 사도행전3장에서 7장까지는 예루살렘교회의 폭발적이 성장과 팽창을 다루고 있다. 사도행전 6장은 예루살렘교회의 제자들이 많아지는 가운데 발생한 구제사역 때문에 사도들이 집사를 세워 그 일들을 맡기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전하는 일에 전무할 것을 결정한 사실(행6:1~6)과 아울러 새롭게 임명받은 일곱집사 가운데 하나인 스데반 집사의 역동적인 사역과 유대교 회당에서의 변론으로 인한 체포기사(행6:8~15)를 다루고 있다.
  이어지는 행7장은 예수복음의 정통성과 유대인의 오류를 역사로서 논증하는 스데반의 최후진술설교(행7:1~53)와 담대한 최후 진술설교를 마친 스데반의 순교기사(행7:54~60)이다. 이 스데반의 순교를 기반으로 인하 기돆교회에 대한 핍박이 본격적인 시작되기도 하지만, 그 핍박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안에만 머물던 복음이 이방세계로 퍼저나가게 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행7장은 행6장에서 제기된 산헤드린 공회에서 스데반이 거짓으로 고소를 받자, 대제사장 가야바가 피고 스데반에게도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에 스데반이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으로서 스데반의 설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때 스데반은 아주 긴 변론을 하게 된다. 스데반의 이러한 진술에 대해 부정적인 학자들도 있지만 이것은 스데반의 변증법적 변론으로서 유대인들의 잘못과 오류를 적나나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는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는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하여 반론을 편다. 그는 역사적 배경과 하나님의 선언을 근거로 유대인들이 성전 자체를 절대시하는 것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구약의 예증을 인용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일에 대한 잘못을 지적한다. 즉 그는 현재 유대인들은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의로운 자들을 배척하고 죽이면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데반의 변론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결코 구약성경의 내용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매우 변증적인 설교인 것을 알 수 있다.



2. 예수복음의 정통성과 유대인의 오류를 역사로 논증하는 스데반의 최후진술설굑의 첫째 단락, 족장시대의 역사(행7:1~16)


1)본문내용(행 7:1~16)
첫째, 대제사장이 스데반을 심문함(1~2절)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증인들의 증언을 인정하느냐고 심문한다. 그러자 스데반은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고 자신의 최후진술이 된 역사회고 설교를 시작한다.
둘째, 이스라엘 민족 최초의 직계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야곱의 12아들까지의 역사를 진술함(2b~8절)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고향과 친척을 떠나 당신이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하고 하셨음을 시작하고 설교를 시작한다. 이에 아브라함이 갈대우 우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으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조금의 땅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그 땅을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그의 씨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음을 언급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애굽에서 종살이할 것과 애굽에 대한 심판 및 출애굽과 가나안 땅으로서의 귀한을 예고하셨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언약을 주시자 아브라함이 그 언약대로 이삭에게 할례를 행하고 이삭은 야곱을, 야곱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을 낳았음을 언급한다.
셋째, 요셉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해 소개함(9~16절)
  이어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조상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넘겼음을 언급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하사 그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시고 마침내는 애굽의 바로를 대신하는 치리자의 자리에 세우셨음을 언급한다. 그후 애굽과 가나안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들이 그의 형제 요셉과 만나게 되고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알려진 사실을 언급한다. 이후 야곱을 비롯한 친족 75명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정착했음을 언급한다. 그리고 야곱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옛 조상들이 애굽에서 죽었으나 특히 야곱은 가나안 세겜 땅에 묻혔음을 언급한다(그러나 실제로 야곱은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묻혔고, 요셉이 세겜 땅에 묻혔다).


2)영적 교훈
첫째,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선용해야 한다(1절)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법의 테두리를 가지고 있기에, 대제사장 가야바도 스데반에게도 발언할 수 있는, 즉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렇다면, 왜 대제사장 가야바가 스데반에게 변호할 수 있는 진술기회를 준 것일까? 분명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라고 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데반은 그에게 주어진 그 진술의 기회를 활용하여, 유대인들 특히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얼마나 성전을 우상화하고 있고, 율법을 따라 행하지 않으며, 오히려 의인이었던 예수님을 죽였는지를 정확히 언급한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은 왜 스데반에게 변론의 기회를 주었을까? 거기에는 가야바 대제사장의 교묘한 악의가 숨어 있다. 이때 그는 피고 스데반에게 고소한 증인들의 고소내용(행6:13~14)이 사실인가를 물었다. 이는 만약 스데반이 “그것들이 사실이다”고 대답을 할 경우에는 그를 신성을 모독한 죄인으로 몰아가 사형을 언도할 심산이었다. 반대로 “사실이 아니다”라고 대답하면,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위증죄를 선고하여 그에게 상당한 형벌을 내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의를 잘 알고 있는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자기자신을 위해 변호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심문하는 자들이 진리에 떠나 있음을 명쾌하게 증거함으로써, 그들의 양심에 가책을 받게 만들고, 심지어 이를 갈게 만들어 버린다(54절).
  그렇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기회가 찾아온다. 그 기회를 너무 쉽게 낭비하지 말고 정말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함으로써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다.
둘째,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에는 상대방을 자극하는 말로 시작하지 말고,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즉 공감대를 먼저 형성할 수 있는 말부터 시작하라(2절)
  스데반은 자신이 법정에 선 것이 너무나 억울하다거나 자신이 죄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스데반은 지금 자신을 심문하고 있는 유대인들도 다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자신의 변호를 시작한다. 만약 그때 스데반이 거꾸로 이야기를 했다면 중간에서 그의 말을 끊겨지고 위증죄가 뒤집어 씌워져 곧장 판결이 내려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의 조상 아브라함이...” 다시 말해, “아버지 어머니, 형님동생이여, 제가 말을 한 번 들어보소서. 다 아시다시피 아브라함은 우리들의 조상이 아닙니까?”라로 말을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에 변호에 귀를 기울였다.
셋째,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에는 직접적인 언급보다는 간접적인 언급으로 시작하여, 죄를 정하고 있는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된 사고 속에 갇혀 있는지를 밝힌 다음, 그것을 복음과 연결하는 것이 필요하다(2~53절). 그래서 스데반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과 잘못을 아브라함과 요셉과 같은 족장들의 역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하였던 것이다.
  스데반이 고소당한 내용은 행6:13~14에 나와 있다. 그가 “이 거룩한 곳(예루살렘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했다”는 것과 “나사렛 예수가 이 성전을 헐고 또 모세가 전해준 규례를 변경할 것이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건드릴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3가지다. 예루살렘 성전이요, 할례와 안식일이다. 이 3가지를 건드리면 용서가 없다.
  첫 번째로, 예루살렘 성전은 그들의 믿음과 권위의 중심(요체)이기 때문에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성전이 없어진다면 그들이 성전에서 행하는 모든 권위를 내세울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성전을 거룩한 곳이라고 지칭했고,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성전을 여러 구획으로 나눠놓았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영역(제사장의 뜰),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영역(이스라엘의 뜰), 여자들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이방인들은 들어갈 수 없는 영역(여인의 뜰), 이방인들의 뜰 등으로 말이다. 만약 선을 넘으면 성전을 더럽히려고 하는 것이니, 죽여버리겠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이방인 디도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고 하는 누명을 뒤집어 쓴 채, 죽을 뻔 했던 일이 사도행전에 나온다.
  그런데 실제는 성전 안에 하나님이 계셨을까? 당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돈을 섬기고 있었으며, 외식하는 자들로 가득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이 가득한 성전에 하나님께서 계실 리가 없었다. 예수님 당시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 안에 있었던 것이다(요14:10~11). 당시에는 오직 인격적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었던 것이다. 오직 예수 안에만 하나님께서 계셨기 때문이다. 당시 물질적인 하나님의 성전에 대해 예수님은 기도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사56:7). 하지만 당시 성전은 기도의 장소가 아니었고, 오직 돈버는 자들로 가득한 강도의 소굴이었다(마21:13).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장터요 놀이터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기도하는 장소인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시면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셨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마21:12~13). 그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2:19-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그렇다.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시어 그의 사역을 시작할 때에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지 않았다. 그분은 예수님 안에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스데반의 설교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유대종교지도자달들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시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곳을 우상시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게 갇혀계시는 하나님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가 들고나온 설교의 중심인물이 바로 4명이다. 하나는 아브라함이요, 또 하나는 요셉이요, 또 하나는 모세요, 마지막 하나는 다윗이다. 하나님을 당신을 믿고 따르는 그들과 함께 하셨지 결코 일정한 장소에 그들을 오라고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시고 이방지역에는 안 계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와 하란에 있을 때에 영광이 하나님이 거기에 있었다고 말하며, 요셉에 애굽에 있을 때에도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세가 광야에 있을 때에도 거기에 함께 하셨고, 다윗의 10여년을 도피생활을 할 때에도 다윗과 함께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데반은 할례언약에 대해서도 언급한다(8절). 할례란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성급히 행동하느라 사라의 몸종인 하갈의 육체를 통해 자식을 얻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를 13년간이나 떠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나타나시어 그에게 명령하신 것은 남자라면 누구나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더 이상 육체를 믿고 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살겠다는 표시를 자신의 범죄한 고추에 하라는 것이 할례다. 즉 남자는 할례를 통해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할례의 의도가 변질되고 말았다. 그래서 스데반은 말한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은 못한 사람들아(51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체에 할례만 받으면 아브라함의 씨로서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문제는 스데반이 아브라함과 할례의 문제를 언급한 것은 언약에 대한 믿음이 모세의 율법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스데반이 모세의 율법을 거슬렀다고 주장하자, 모세의 율법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의 약속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다. 아브라함의 씨요 다윗의 씨로서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지, 성전을 신성시하고, 육체할례만을 붙들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넷째, 변증은 과거의 예증을 통해 현재의 진리와 실제를 말하는 것이다(9~16절)
   이 세상에 오게 될 메시야의 예표로서 가장 합당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스데반집사는 그런 사람을 요셉으로 보았다. 형들의 시기심 때문에 억울하게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다가, 나중에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다가 감옥에까지 갇혔지만, 술맡은 관원장의 꿈해석을 통해 애굽의 둘째 치리자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 요셉의 일생이 바로 종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그리고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신 예수님을 그대로 말해주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죄없으신 예수님을 죽여놓고도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음을 스데반은 요셉을 통해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52절). 율법은 결코 죄없는 자를 죽이도록 말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53절).
행7:52-53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사도행전 7:1~16에 나오는 장자권의 명령과 선포>
1)감사와 회개
주여, 변증이나 설교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유대인들은 물질적인 성전을 우상시하고 있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성도에게는 고난과 죽음 후에 비로소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내게 주어진 많은 기회를 성질 때문에 놓쳐버렸음을 회개하나이다.
주여, 내게 주어진 많은 기회를 지혜롭게 사용하지 못했음을 회개하나이다.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내게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말을 할 때도 지혜롭게 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어떤 장소에 끌려가든지 당황하지 않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내 안에 계시는 성령만을 의지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고난과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한 가지를 들어도 열 가지를 깨닫는 자게 되겠나이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두려움과 공포로 성도를 위축하게 만드는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조급함과 성질을 부추겨 내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영들은 떠나가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담대하게 말할지어다. 두려울수록 성령님을 의지할지어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사람을 설득할 때에는 지혜롭게 말하는 것이 필요하구나.
2. 누구에게든지 반드시 한 번 이상은 기회가 주어지는구나.
3.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선용해야 하는구나.
4. 말을 시작할 때에는 자극적인 말보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말부터 해야겠구나.
5. 하나님은 갇혀계시지 않고 어디서든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과 함께 하시는구나.
6.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믿음과 순종을 배워야하고, 요셉을 통해서는 고난과 인내를 배워야 하는구나.
7. 고난과 역경 끝에 기쁨과 영광도 오는 것이로구나.

5)훈련의 기본원칙 열 번 복창
‘단순, 반복, 지속, 강행’
6)장자권의 발동, 명령과 선포 일곱 번 복창
‘있을지어다. 그대로 되니라, 좋았더라’ ‘복이 있을지어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다운로드하기] 2015-01-07 사도행전강해(14) 스데반의 놀라운 변증적 설교(1)-아브라함과 요셉에 대해 설교하다(행7;1-1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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