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6월 23일(수) 수요기도회설교(성령강림후넷째주일)
[제 목] 고린도전서강해(13) 사도의 권리와 절제를 통한 승리자가 받는 면류관(고전9:1~23)
[찬 송] 찬 261장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찬 365장 마음 속에 근심있는 사람, 찬 191장 내가 매일 기쁘게
[말 씀] 고전 9:1~23(신약 272면)
[키워드] 바울의사도권,자유,교회로부터부양받을권리,절제함,보상과승리상,면류관,이스트미안경기,육상선수,격투기선수
1. 서론
가. 고린도전서의 기본 이해
본 서신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여러 통의 서신 중 신약 성경에 보존된 두 편의 서신 가운데 제1서신으로서, 헬라어 원전의 제목은 ‘프로스 코린디우스 알파’ 이다. 이에 따라 한글 개역성경에서도 ‘고린도전서’로 명명되었다. 본 서신의 저자는 사도 바울(1:1,16:21)이다. 고린도전·후서의 기록 시기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는 대체로 일치하는 바, 고린도전서는 바울의 제3차 전도 여행 기간(A, D, 53-58년) 중 에베소에 머물던 시기인 A.D. 55년 봄 무렵(16:5-8; 행 20:31)에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본 서신의 수신자는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때 개척한 곳이며, 로마의 속주(屬州) 중 아가야 지방의 수도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다. 그리고 본 서신의 내용은 고린도 교회의 영적, 도덕적 무질서에 대한 책망과 권면 및 교회 생활과 관련한 제반 질문 사항에 대한 목회적 답변을 기록하고 있다.
나. 고린도전서의 배경 이해
고린도전서는 교회의 영적 · 도덕적 무질서에 대한 책망과 권면 및 신앙생활 현안들에 대한 목회적 답변의 서신서라고 할 수 있다. 신약 성경의 모든 서신서들은 일차적으로 각 서신서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각 서신이 어떤 수신자에게,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주어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그 서신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작업이다.
먼저 수신자 문제와 관련하여, 본 서신은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A.D.49-52년) 약 일년 반 동안 사역하며 개척한(행18:11)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일차적 수신 대상으로 하고 있다. 당시 고린도(Corinth)는 로마의 속주(屬州) 중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서, 여러 가지 면에서 헬라의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우선 고린도는 헬라의 상업 중심 도시였다. 헬라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좁은 지협(地峽)의 남쪽 2km 지점에 위치한 고린도는 수많은 여행자와 상인들의 필수적 통행로였다. 고린도는 좁은 지협 양쪽으로 동쪽으로는 겐그레아(Cenchrea) 항구를, 서쪽으로는 레게움(Lechaeum)이라고 하는 항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두 항구를 통해 이탈리아, 스페인, 소아시아, 페니키아, 이집트 등지로부터 온 많은 양의 상품들이 유통되었다.
또한 고린도는 문화적으로 보면 비록 아테네와 같은 교육과 문화의 도시는 아니었으나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헬라 문화의 특징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 헬라 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그 영향으로 지혜를 높이 평가하였다. 종교적으로도 치유의 신(神)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 태양의 신 아폴로(Apollo),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 등을 숭배하는 12개의 신전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거대 상업 도시들이 으레 그렇듯이 고린도 역시 다양한 외부 문화에 개방적이었으며 어떤 부도덕한 풍습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하지 않았다. 특히 성(性) 문제는 그 사회의 도덕적 척도라 할 수 있는데, 고린도는 성적으로 문란하기로 유명한 도시였다. 한 예로 고린도의 가장 높은 곳인 아크로 고린도에 세워진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1,000여 명의 신전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종교의 이름으로 매춘을 자행하는 종교적 창녀들이었다. 고린도가 성적으로 얼마나 문란하였는지 ‘고린도화하다 (Corinthianize)’ 라는 말은 곧 ‘성적 부정을 행하다’ 라는 뜻으로 통용될 정도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고린도 교회가 많은 도덕적인 문제에 직면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신약 성경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바울은 본 서신 이전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는 내용이 포함된 서신을 보낸 바 있었다(5:9). 즉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하기 이전에도 고린도 교회에는 음행을 비롯한 윤리적 문제가 심각하게 표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본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을 이미 시작하여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할 즈음에 있었는데(16:8,9), 거기서 바울은 여러 경로를 통해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1:11:16:17). 바울에게 들려온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이전에 비해 좋아졌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빠졌다는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음행 문제 뿐 아니라 심각한 분쟁까지 발생하였으며, 그 분쟁의 양상 또한 복잡하였다. 특정 사역자들의 인맥(人脈)을 중심으로 분파(分派)가 생기는가 하면, 또한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 등에 대한 입장의 차이로 또 패가 갈라져 다투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영적 은사를 받은 자들이 저마다 자기의 은사를 내세우며 자랑하였고 주의 만찬은 오용(誤用)되고 있었으며, 예배는 무질서하였다. 또한 교리적으로도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부활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마치 독소처럼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여, 당시 고린도 교회의 형편과 특징을 두 문장으로 요약하여 제시할 수 있다. 즉 고린도 교회는 분명 지식이 풍족하며 영적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다(1:5-7).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이 미성숙하고(immature) 신령하지 못한 (unspiritual) 교회였다(3:1-4).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한 목적은 이처럼 은사는 풍족하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여전히 미숙하고 육신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고린도 교회의 오류들을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교회의 분쟁, 성적 부도덕, 세상 법정에서의 소송, 결혼 및 이혼, 우상 제물의 식사, 주의 만찬, 영적 은사의 사용, 예배의 질서, 부활의 교리 등 고린도 교회가 당면한 제반 문제들에 대해 ‘목회적 관점(pastoral view)’에서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즉 고린도 교회 내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여러 목회적 상황에 대해, 목회자의 심정(a pastor’s heart)을 가지고 진심 어린 책망과 권면 및 바른 진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 서신은 특정 상황(occasion)과 문화적 맥락(cultural context) 속에서 복음의 원리가 교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1세기의 고린도 교회가 처한 제반 문제들에 대해 복음에 입각하여 그 해결 지침과 원리들을 제시한다. 바울이 본 서신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 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의 중요한 관심사들을 반영하고 있으며, 또 일부 문제는 당시의 문화적 상황 속에만 적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상 제물의 취식 문제나 여성의 예배포 착용 문제는 오늘의 문화적 상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영적, 도적적, 교리적 문제에 대해 적용하고 있는 복음의 원리는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관계없이 중요하다.
시대에 따라 교회를 분열시키고 오염시키는 문제들의 양상과 원인은 다양하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하였던 복음의 원리들, 예를 들어 교회의 유일한 기초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성령의 전으로서의 성도의 몸, 교회의 성결을 유지하기 위한 권징(勸懲)의 시행, 지식에 앞선 사랑의 중요성, 다양한 영적 은사들을 사용하는 목적과 원리, 부활의 교리 등은 어떤 문화적 맥락 속에서도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 서신은 불변하는(unchanging) 복음의 진리가, 변화하는(changing) 시대와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해 중요한 목회적 통찰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다. 고린도전서 내용분해(목차)
1) 인사말(1:1-3)
2) 고린도 교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1:4-9)
3)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열(1:10-4:21)
A. 고린도 교회의 파당에 대한 보고(1:10-17)
B. 십자가의 미련한 지혜(1:18-25)
C. 하나님이 미련한 자들을 선택하심(1:26-31)
D. 인간의 지혜 대 하나님의 영과 능력(2:1-5)
E.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성령의 계시(2:6-16)
F.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을 평가함(3:1-17)
G.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법과 타인을 평가하는 법(3:18-4:5)
H. 십자가의 지혜의 모델로서의 사도들(4:6-13)
I. 그들의 아버지 바울을 본받으라는 호소(4:14-21)
4) 근친상간, 소송, 매춘(5:1-6:20)
A. 근친상간의 사례(5:1-8)
B. 교회 안에서 죄를 관용한 것에 대해 새롭게 경고함(5:9-13)
C. 소송들에 반대하는 권고(6:1-11)
D. 창녀를 찾아가지 말라는 권고(6:12-20)
5) 성관계, 이혼, 혼인에 대한 가르침(7:1-40)
A. 혼인 안에서의 성관계(7:1-5)
B. 미혼자들과 과부들의 독신 생활 및 혼인(7:6-9)
C. 그리스도인과 혼인한 사람들 및 비그리스도인과 혼인한 사람들에게 주는 이혼에 대한 가르침(7:10-16)
D. 논의의 기저에 있는 지도 원리: 현재 상태로 있으라(7:17-24)
E. 약혼자들과 과부들의 혼인의 적절성(7:25-40)
6) 우상에 바쳐진 음식에 대한 논쟁(8:1-11:1)
A. 우상에 바쳐진 음식 문제의 소개(8:1-6)
B.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치는 위험으로 인해 그들의 행위를 논박함(8:7-13)
C. 그의 권면을 뒷받침하는 바울 자신의 예(9:1-27)
D.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부정적 예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의 행위를 논박함(10:1-13)
E. 주의 만찬의 예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의 행위를 논박함(10:14-22)
F. 이교도적 환경에서 우상의 음식 문제를 다루기 위한 실천적 충고(10:23-11:1)
7) 공적 예배에서 머리에 무언가를 쓰는 것(11:2-16)
8) 주의 만찬에서의 분열(11:17-34)
9) 공적 예배에서의 영적 은사의 사용(12:1-14:40)
A. 영적 은사의 소개(12:1-3)
B. 영적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12:4-11)
C. 몸의 지체들의 다양성과 상호 의존성(12:12-31)
D. 사랑: 가장 좋은 길(13:1-13)
E. 방언과 예언의 대조(14:1-19)
F. 예언을 선호함(14:20-25)
G. 예배를 위한 규정과 영적 은사에 대한 결론적 가르침(14:26-40)
10) 부활(15:1-58)
A. 서론: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선포와 믿음(15:1-11)
B. 죽은 자들의 부활이 만일 사실이 아닐 경우의 결과(15:12-19)
C. 죽은 자들의 부활이 사실이므로 생겨나는 결과(15:20-28)
D. 죽은 자들의 부활이 만일 사실이 아닐 경우의 결과(15:29-34)
E. 부활의 육체적 성격(15:35-49)
F. 모두가 변화될 것임(15:50-58)
11) 연보에 대한 가르침과 여행 일정(16:1-12)
12) 끝인사(16:13-24)
라. 고린도전서의 내용
고린도전서의 내용은 1:1-9의 도입부, 1:10-15:58의 본론부, 그리고 제16장의 종결부로 구분할 수 있다.
1)도입부(1:1~9)
도입부에서는 당시의 일반적인 서신 형식을 따라 칭찬과 감사 등 통상적 인사를 담고 있으며, 종결부에서는 본론부에서 다 언급하지 못한 몇 가지 사항에 대한 간략한 언급 및 마지막 당부와 문안 인사를 담고 있다.
2)본론부(1:10~15:58)
그리고 본론부 1:10-15:58은 내용에 따라 다시 1:10-6:20까지의 전반부와 제7-15장까지의 후반부로 크게 양분할 수 있다. 먼저 전반부 1:10-6:20은 주로 고린도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 즉 고린도 교회 내의 분쟁 및 도덕적 무질서에 대한 책망과 권면을 다루고 있으며, 후반부 제7-15장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서신을 통해 질문한 신앙 현안들에 대해 바울이 목회적 관점에서 답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A. 전반부(1:10~6:20)
전·후반부 두 부분으로 크게 양분한 본론부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1:10-6:20은 1:10-4:21과 제5, 6장으로 다시 세분할 수 있는데, 이중 1:10-4:21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분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먼저 바울은 글로에의 집편으로부터 고린도 교회의 분열 소식을 전해들은 것을 밝히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했던 자신의 고린도 전도사역을 회상시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지혜이자 능력으로서 성도에게는 오직 예수만이 자랑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나서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들의 인맥(人脈)을 따라 분파를 지어 다투는 문제가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지적하며 책망한다. 더 나아가 교회의 유일한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도 공동체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며 우주적 연합체라는 것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분파를 지어 서로 다투는 것은 결국 그들의 교만 때문임을 지적하며 부성애(父性愛)에 기초하여 분쟁을 종식할 것을 권면한다.
이어 제5, 6장은 고린도 교회의 윤리 문제, 곧 도덕적 무질서의 문제에 대한 책망과 권면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세 가지 문제, 곧 근친상간의 죄, 성도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문제, 그리고 음행 죄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심지어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자까지도 용납하고 있는 것에 대해 지적하며, 그 죄를 범한 자에 대한 단죄를 선언함과 동시에 교회가 누룩 없는 떡이 되기 위해서, 곧 성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권징을 시행해야 함을 촉구한다. 그리고 성도간의 문제는 교회 내에서 판단할 것이지 결코 세상 법정에서 불신자들의 판단에 맡기지 말라는 방향을 제시한다. 음행 죄와 관련하여서는, 성도들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 및 성령이 거하는 ‘성령의 전’이라는 관점에서 음행 죄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성전을 더럽히는 심각한 죄임을 경고하고 있다.
B. 후반부(7~15장)
다음으로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제기한 질문에 대한 목회적 답변 형식을 띠고 있는 제7-15장은 결혼과 이혼, 우상 제물의 취식, 공적 예배시의 질서, 부활 등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제기되던 신앙 생활 현안 중 중요한 네 가지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먼저 제7장은 결혼과 관련된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미혼자의 결혼 문제 뿐 아니라, 부부 생활, 이혼 문제, 불신 배우자와 결혼했을 경우의 처신, 과부의 재혼 등 혼인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할 수 있는 각각의 경우들에 대해 구체적인 지침과 더불어 포괄적인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 8:1-11:1은 우상 제물의 취식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첨예한 의견 대립의 요소가 되었던 바,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지식적으로 옳고 그름의 차원에서가 아닌 사랑과 자유 절제의 차원에서 접근하여 답변을 제시한다. 즉 원칙적으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따라서 성도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도 자유하지만, 믿음이 약한 자를 위해서 그 자유를 절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바울은 직접 자신을 권리와 자유를 절제한 모범으로 제시하여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을 본받을 것을 촉구하고, 또한 이스라엘의 자유를 남용한 부정적인 본보기를 제시하여 성도는 자유를 절제할 것과 또한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유익을 위하라고 권면한다.
이어 11:2-14:40은 공적 예배에 관한 교훈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공적 예배의 질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여성의 예배포 착용 문제, 성찬 문제, 영적 은사의 사용 등 세 가지 문제에 상당 분량을 할애하여 교훈을 주고 있다. 먼저 바울은 여성의 예배포 착용 문제와 관련해서는 영적 질서와 창조 원리 및 당시의 문화적 규례에 따라 여성은 순종의 표시로서 예배포를 착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성찬의 문제에 있어서는, 성찬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거룩한 의식임을 일깨움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오류를 바로잡고 성찬 참여자의 바른 자세를 교훈한다.
특히 영적 은사에 관한 바울의 교훈은 특기할 만한데, 바울은 영적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조화롭게 교훈한다. 즉 교회에 나타나는 은사는 다양하지만 그 은사들은 모두 한 분 성령께 기원을 두고 있으며, 또한 각 은사들의 목적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심도있게 제시하고 있다. 영적 은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문맥 속에 사랑을 주제로 노래한 유명한 제13장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곧 모든 영적 은사들의 사용의 원리가 곧 사랑이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은사에 대한 결론적 권면에서 모든 은사를 질서있게 사용하고 또한 덕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이 방언에 비해 예언의 은사를 높이 평가하고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권하는 것은 바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차원에서 예언이 방언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이다.
이어 제15장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부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 기독교 신앙의 근거이자 성도들의 부활의 보증이 되는 그리스도 부활의 의의, 부활 이후의 몸의 상태, 부활 신앙과 성도들의 삶의 실질적 관계 등을 심도있게 제시함으로써 당시 고린도 교회에 퍼져 있던 부활에 대한 회의적인 관점에 대해 효과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3)종결부(16장)
마지막으로 본 서신의 종결부인 제16장은 본론부에서 다루지 않은 몇 가지 문제에 대한 간략한 언급 및 마지막 권면과 인사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게 질문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예루살렘 성도를 위한 연보의 문제에 대해 바울은 그 연보 수집 및 전달 방법에 대한 지침을 제시한다. 그리고 바울 자신의 고린도 교회 방문 계획 및 디모데와 아볼로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 후, 교회 내 충성스러운 일꾼들에 대해 존경과 복종을 보이라는 마지막 권면과 인사로써 본 서신을 마무리하고 있다.
마. 고린도전서 메시지 요약
1) 타락한 세속 문화 속에서의 교회의 위상 정립
본 서신에 언급되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윤리적 문제들 중 상당 부분은 당시 고린도의 혼탁한 도덕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교회 내 근친 상간자를 용납할 정도로 심각했던 음행의 문제는 고린도의 부도덕한 분위기에 교회가 그대로 물들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본 서신의 행간(行間)에는 불신 세계의 사람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고린도 교회의 위상에 대한 바울의 깊은 탄식이 서려 있다. 세속 문화에 대해서 각 지교회가 어떤 위상을 정립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본 서신 전반에 걸친 행간의 메시지이다.
2) 분쟁하는 교회를 향한 메시지
고린도 교회는 분쟁으로 갈라져 있는 교회였으며 분쟁의 양상도 복잡하였다. 특정 사역자를 따라 패를 갈라 다투고, 특정 사안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 따라 또한 서로 반목하였다. 교회의 분쟁이 어디 고린도 교회에만 해당되는 문제이겠는가? 오히려 분쟁과 반목이 없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이 아닌가? 바울 사도는 분쟁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부성애적(父性愛的) 책망과 권면 및 분쟁의 원인과 해결 방안에 대한 심도 깊은 교훈을 본 서신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비록 분쟁의 양상과 종류는 다르다 할지라도, 분열과 반목에 빠져 있는 모든 시대의 교회들은 바울의 책망과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윤리 실천과 신앙 성숙의 관계
고린도 교회는 지식과 영적 은사들이 풍성한 교회였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성숙한 성도들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아이의 유치성을 벗어나지 못한 자들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분파를 형성하여 서로 다투고, 교만하고, 세상 법정에 소송하고, 남의 유익보다 자신의 유익만 중시하는 등 윤리적으로도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 성숙의 기준은 얼마나 많은 은사를 가지고 능력을 행하는가에만 달려 있지 않다. 성숙한 신앙은 윤리적인 면에서도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본 서신 전반에 흐르는 교훈의 맥락이다.
4) 성도의 몸은 곧 성전
바울은 음행 (sexual immorality)의 문제를 다루는 부분에서 성도가 음행 죄를 피해야 할 보다 본질적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도의 몸은 곧 성전(holytemple)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적 처소였다면, 신약 성도들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內住)하시는 실제적 임재의 처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음행의 죄를 비롯하여 몸으로써 짓는 죄를 멀리해야 할 본질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5) 지식에 앞선 사랑의 중요성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중요 현안으로 떠올랐던 우상 제물의 식사 문제에 대해 가부(可否)의 차원에서 해결을 시도하지 않는다. 사실 우상 제물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그 자체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정작 문제가 된 것은 그 문제를 둘러싼 고린도 교인들의 태도였다. 즉 그것을 지식의 차원에서만 해결하려고 하고, 교회의 덕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바울은 이 문제를 지식에 앞서 사랑으로 해결하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즉 옳고 그름을 따지는 지식의 차원을 떠나, 자기보다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세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복음의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면,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지식에 앞선 사랑이 문제 해결의 중요한 원리이다.
6) 영적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diversity and unity)
고린도 교회는 영적 은사가 풍성하였으나 저마다 자기 은사를 자랑할 뿐 그 은사들을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세우는 데 잘 활용하지 못했다. 바울은 제12장에서 각각의 성도들은 다양한 은사를 받았는데, 그 은사들을 주신 분은 동일한 성령이시며,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 것은 교회의 유익이라고 하는 공통의 목적을 위해서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달리 말하면 영적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교회는 각 사람이 가진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고, 또한 다양한 은사들을 교회의 유익을 위해 활용할 수 있게 된다.
7) 사랑과 건덕
은사 사용의 대원칙. 바울은 제12-14장의 긴 지면을 할애하여 영적 은사에 관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사랑과 건덕(love and edification)을 은사 사용의 대원칙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은사의 바른 활용은 사랑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며, 그 은사 활용의 목적은 오직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과 건덕의 원칙 위에 은사들이 활용될 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더욱 조화와 질서 속에서 아름답게 성장해 갈 것이다.
8) 공적 예배의 바른 시행
고린도 교회는 여성의 예배포 착용 문제, 성찬의 잘못된 시행, 은사의 남용 및 오용 등의 원인으로 인해 공적 예배의 질서가 무너졌다. 공적 예배의 질서가 확립되지 못했다는 것은, 곧 그 교회 성도 신앙 생활 전반이 무질서하고 체계가 잡히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가 지나치게 경직되고 율법적이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반대로 아무 원칙도 질서도 없는 것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무질서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혼란과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모든 공적 예배는 반드시 조화와 질서 속에 드려져야 한다.
9) 부활 신앙과 성도의 삶
교리의 문제는 성도의 실제적 삶과 직결된다. 즉 성도들의 신앙과 사상과 삶의 태도는 그들이 믿고 있는 특정 교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자 기독교 신앙의 토대로서, 부활에 대해 불신한다면 모든 것은 무너지고 만다. 바울은 소위 ‘부활장’ 이라 불리는 제15장에서 기독교 신앙이 허공 위에 세워지지 않은 것임을 보여준다.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하는 확고한 역사적 사실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부활과 최후의 승리를 보증한다는 것을 제시한 후, 성도들이 부활 신앙에 굳게 서서 주의 일에 수고하는 자들이 되기를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부활이야말로 성도의 최대, 최고의 소망이며, 주 안에서 인내하고 수고하는 모든 삶에 확실한 보상이 될 것이다.
2. 사도로서의 바울의 권리 및 자발적인 권리 제한의 모범(고전9:1~14)
1)본문내용(고전9:1~14)
첫째,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함(1~2절)
바울자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자이며 사도임을 천명한다. 예수를 직접 목격한 사실과 자신의 선교로 인한 고린도교회의 존재자체를 바울 자신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한다.
둘째, 바울 자신도 사도로서 여타 다른 사도들처럼 교회의 부양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천명함(3~7절).
바울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변론을 시작하겠을 밝힌다. 이어 바울은 자신도 여타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결혼하여 가족들과 함께 교회로부터 부양받을 권리가 있음을 밝힌다.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잇는 사도로서의 권리에 있어서 자신과 바나나만이 예외가 아님을 반문형석으로 강조한다. 군사가 자비량하지 않음과 포도심은 자가 그 실과를 먹음과 양떼를 기르는 목자가 양떼의 젖을 취하는 등의 비유를 통해 사도로서 교회의 부양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거듭 강조한다.
셋째, 모세 율법 역시 복음 사역자에 부양받을 권리를 인정함(8~10절).
곡식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한 율법조항을 인용한다. 이 조항의 본질은 소들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농부가 그 수고에 대한 응분의 댓가를 받을 권리가 있음도 밝힌다.
넷째, 자신은 복음사역을 위해 스스로의 권리를 제한하고 있는 중임(11~12절)
신령한 것을 뿌린 복음사역자들이 일신에 꼭 필요한 육신의 것을 거두는 것이 과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여타 사역자들이 권리를 가졌다면 바울 일행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자신이 이 당연한 권리를 절제하고 있는 것은 복음사역에 장애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다섯째, 복음사역자들이 복음으로 생활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당연함(13~14절)
성전 종사자들이 성전에서 나는 것으로 생활하는 예를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복음사역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즉 복음사역에 상응한 부양을 받아 사는 것은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
2)영적 교훈
고전 7~15장은 고린도교회가 바울에 제기한 각종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을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 7장에서는 결혼문제를, 8장에서는 우상의 제물 취식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9장은 8장과 전혀 다른 새로운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연장선상에서 지식에 앞서는 사랑과 자유절제의 원리를 자기자신을 모범으로 삼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9장은 사도로서 월등한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위해 자기권리를 기꺼이 포기한다는 점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어 형제를 실족하게 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랑에 근거한 바울의 목회원리를 일관되게 진술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복음을 전하는 자는 누구나 교회 공동체로부터 부양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1~3절)
둘째, 복음사역자들이 교회공동체로부터 부양을 받을 권리는 4가지 측면에서 합당하다. 첫째는 일반관습의 측면에서 – 군사, 포도원, 목자 – 둘째는, 율법규정을 따라서, 셋째는 구약의 제사장의 관습을 따라서, 넷째로, 예수님의 지시사항이므로.
둘째, 성도들은 목회자가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목회자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4~5절).
베드로를 위시한 다른 사도들은 아내를 동반하여 교회에서 생활비와 선교비를 받으면서 활동했다. 단지 요한과 바울 사도는 아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초기부터 생계비와 선교비를 자기들이 일하여 충당하였다. 하지만 원래 교회는 목회자의 셍계를 책임져야 한다. 오직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셋째, 사역자들은 최선의 복음전파를 위해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6절).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이 전도한 교회로부터 생계비와 선교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복음전파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넷째, 목회자들이 교회로부터 생계비를 받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7절). 이는 일꾼이 노동에 대한 응분의 댓가를 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9절).
복음사역자들이 교회로부터 생계비와 선교비를 받는 것은 일종의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미쓰도스)이다.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는 것과 같다. 일한 사람은 응분의 댓가를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다섯째, 복음사역자들은 돈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복음전파에 소망을 가지고 사역해야 한다(10절).
여섯째, 목회자는 잘 참는 자가 되어야 한다(12절).
바울사도는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범사에 참는다고 말했다. 그는 당연한 권리를 내려놓고 즉 생계비를 받을 권리를 내려놓고 스스로 충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첫째로 물질에 대한 욕구를 내려놓아야 한다. 둘째로, 자기의 생각이나 사상에 대한 욕구를 내려놓아야 한다. 셋째로 목회자는 혈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일곱째, 목회자의 생활비의 규례는 주님이 모범을 보이라고 정하신 바이다(14절).
주님께서는 복음전하러 갈 때에는 전대를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다.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받은 것으로 충당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마10:9~10). 이것은 예수께서 친히 정하시고 실천하신 바이다.
마10:9~10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3. 사도의 권리와 자유를 절제하는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고전9:15~23)
1)본문내용(고전9:15~23)
첫째, 바울이 자신은 사도러서 당연한 권리인 부양받을 권리들을 쓰지 않았음을 밝힘(15절)
자신은 사도로서 당연한 권리인 피부양의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이를 밝히는 것은 부양을 요청하는 것도 결코 아니며, 이렇게 사도의 권리를 논증하는 이유는 복음전파에 아무런 장애가 없도록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셨다는 그 자랑을 헛되이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둘째, 자신이 사도의 권리들을 쓰지 않는 것은 진정한 상급을 위해서임을 밝힘(16~18절).
자신이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랑이 되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는 복음사역이 마땅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며,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임을 고백한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복음전도의 일을 하면 상을 받을 것이지만 실상은 직분을 맡은 자로서 당연한 의미를 수행하는 것임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상받을 행위를 무엇이겠냐고 자문한 뒤에 그것은 자발적으로 복음전도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들을 자신이 스스로 절제하고 다 사용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셋째, 자신이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임을 밝힘(19~22절)
자신이 자유인으로서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다. 자신이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율법없는 이방인에게는 율법 없는 이방인처럼 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얻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라고 밝힌다. 마찬가지로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가 되고 또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든지 그들처럼 된 것은 그들 중 몇 사람이라고 구원하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라고 한다.
넷째, 자신의 모든 행동의 동기는 복음을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힘(23절)
자신의 모든 것은 복음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복음의 축복에 동참하고 또 다른 사람과 나누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2)영적 교훈
바울은 고전9:1~14에서 자신이 사도적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한 뒤에,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사도적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고전9:15~23에서는 이미 앞단락에서 권한절제의 목적을 밝히고 있으나, 더욱 직접적으로 그 목적을 본서 독자들에게 밝힌다. 이러한 새로운 단락에서 바울은 다시 명시적으로 자신이 부양받을 권리를 절대 쓰지 않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고린도교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을 신앙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지 않고 ‘자유’라는 이름하에 마음대로 사용했던 데 반해 바울은 일반관습과 율법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바 있는 자신의 특권마저도 복음의 원활한 전파를 위해 고사했던 것이다. 실제로 바울은 1차전도여행 때부터 제3차전도여행 때까지 자기의 전도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스스로 충당하며 복음을 증거한 바 있다. 그는 제1차 전도여행 때에는 바나바와 동역하며 노동했고(고전9:6), 제2차와 제3차 전도여행 중에는 데살로니가(살전2:9), 고린도(행18:3), 그리고 에베소(행20:34)에서 노동하였다고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첫째, 성도가 자랑할 것은 자신이 주를 위해 포기한 것과 주를 위해 희생했다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15절).
둘째, 성도는 죽음을 당할지라도 주님을 위한 희생의 자세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15절).
주를 위한 자기의 희생정신은 성도의 충성생활을 핵심요소다.
셋째, 복음전파는 성도의 자랑의 근거가 되지 않아야 한다(16~17절). 왜냐하면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그러한 직분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가 다메섹도상에서 주님을 만날 때부터 전도의 사명을 통고받았다.
넷째, 복음증거를 소홀히 하면 하나님의 준엄한 징계를 피하지 못한다(16절).
바울은 복음전파를 부득불 할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소홀히 할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였다. 복음전파를 소홀히 하면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이라는 각오로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다섯째, 주님 앞에 성도들이 받을 보상(임금)은 마땅히 자신의 복음의 말미암아 쓸 수 있는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것에 있다(18절).
여섯째, 일한 것에 대해 보수로 주어지는 보상(미쓰도스)과 경기장에서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브라베이온)은 다른 것이다(17, 24절).
성도가 천국에 가서 받을 것은 보상도 있고 상도 있다.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상은 면류관이다.
일곱째, 자유자라도 복음전파를 위해 종이 될 때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19절).
여덟째, 성도라도 전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융통성을 갖추어야 한다(20~22절)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때로는 유대인처럼 되어야 하고,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방인처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는 복음전파에 방해받지 않도록 할례를 받게 했지만(행16:1~3), 헬라인 디도에게는 예루살렘에 데려가면서도 할례를 받지 않게 했다(갈2:3). 본인도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율법에서 자유로운 자였으나 결례의식을 행하기도 했다(행21:21~26). 전도하려면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아홉째, 성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목적이 복음에 동참하기 위한 것이라야 한다(23절)
4. 운동경기자의 비유와 바울자신의 모범 제시를 통한 성도의 절제 권면(고전9:24~27)
1)본문내용(고전9:24~27)
첫째, 신앙생활을 운동경기에 비유함(24절)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자들 중에 상을 얻는 자는 오직 하나 뿐이다. 성도들 역시 상을 얻기 위해서 힘껏 달려가야 한다.
둘째,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해 절제가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함(25절)
경주에서 승리를 위해 애쓰는 자는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 세상에서 경주자들이 썩을 면류관을 위해 절제한다면 성도들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더욱 절제해야 한다.
셋째, 바울이 자신의 절제의 모습을 모범으로 제시함(26~27절)
바울 자신이 현재 그토록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있으나 이는 목표없이 달음질하는 것이 아니며, 허공을 치며 싸우는 것도 아니다.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타인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신으 정작 버림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2)영적 교훈
바울은 고전9:24~27의 말씀을 통하여, 운동경기자의 비유와 바울자신의 모범제시를 통하여 성도가 절제할 것을 권면한다. 바울은 당시 고린도에서 매3년마다 시행하고 있던 이스트미안 경기의 종목인 육상과 격투를 통하여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얼마나 경기자가 절제하고 있으며,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지를 말한다.
첫째, 경기장에서 경주하는 운동선수는 오직 한 사람만 상(면류관)을 얻는다(24절)
일하는 것에 대해 보상을 받는 것과 경기장에서 경주하는 자가 받을 상은 다르다. 일하는 자는 일하는 만큼의 보상이 주어지지만,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자는 우승자에게만 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당시 우상숭자는 승리의 면류간을 썼다. 여기서 면류관은 스테파노스라는 것으로서, 경기에서 우승한 자를 뜻하는 화관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둘째,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절제가 필요하다(25절)
운동선수가 절제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 헬라세계의 금언이었다. 특히 당시 운동선수는 자신의 우승을 위해 숙련된 코치의 지도를 10개월 이상씩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금주, 엄격한 절식, 식이욥버, 심지어 성관계의 절제조차도 요구되었다고 한다.
셋째, 성도는 이 땅의 썩어질 월계관을 위해서 경주하는 경기자가 아니라, 하늘에서 받을 썩지 아니할 월계관을 받기 위해 달려가는 자들이다(25절)
넷째, 성도들의 경쟁의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이며, 이차적으로는 자신의 죄된 육신의 본성이다(26절). 성도가 싸워야 할 1차적 대상은 사탄마귀다. 그리고 둘째로는 자기자신이다.
다섯째, 영적 전쟁에 참가하는 경기자는 분명한 자신의 목표가 설정되어야 한다(26절).
여섯째, 영적 전쟁에 참가하는 자는 악한 자와의 싸움을 할 자이기 때문에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자신의 몸을 복종시킬 수 있어야 한다(27절)
일곱째, 성도는 경기장에서 자신이 지게 되면 구원에서 탈락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영적 싸움에 직면해야 한다(27절)
여덟째,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주어진다(24절).
신앙의 경주에 들어온 성도가 천국에 갔을 때 다 상을 받는가? 전혀 아니다. 오직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우승자만이 상을 받는 것이다.
아홉째,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첫째는 법대로 경주해야 하고, 둘째로 목표를 분명하게 바라보고 가야 하며, 셋째는 끝까지 완주해야 한다(24절).
열째, 우리가 신앙의 경주에서 승리하려면 우리는 날마다 신앙의 훈련을 해야 한다(25절).
이것을 위해 첫째는 절제의 훈련을 해야 한다. 둘째는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한다. 셋째는 자기강화의 훈련을 해야 한다.
< 고린도전서 9:1~23에 나오는 명령과 선포 >
1)감사와 회개
주여, 복음사역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복음사역자는 자신이 가진 권리라도 복음전파를 위해서는 절제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복음사역자에게는 기본적으로 교회로부터 생계비과 선교비를 부양받을 권리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복음사역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전파사역을 자발적으로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자신에게 주어진 정당한 복음의 권리라도 결국 천국에 가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보상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한 영혼이라고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형편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신앙은 경주와 같아서 천국에서 쓸 승리의 면류관은 오직 경주에서 승리한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모든 성도는 모든 일에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죽는 그날까지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 자라야만이 결국 이기는 자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권리를 다 쓰지 않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자발적으로 일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친구가 되어주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주여, 이제는 내 몸을 쳐 복종시키겠습니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아야 복받은 것이라고 속이는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이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영적 전쟁에서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구원은 받을 수 있다고 속이는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영적 전쟁에서는 무조건 승리할지어다. 자기의 몸을 쳐 복종시킬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자유가 주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마음껏 쓰는 것만이 자유는 아니었구나.
2. 복음사역자들은 누구든지 교회로부터 부양받을 권리가 있구나.
3. 복음증거자에게 주어진 권리라도 그것을 다 쓰지 않은 것이 결국 보상으로 주어지는구나.
4.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상대방의 눈높이가 되어야 하는구나.
5. 신앙은 경주와 같아서 승리하는 자에게만 면류관이 주어지는구나.
6. 마지막에 가서 버림받지 않으려면 오늘도 내 몸을 복종시켜야 하는구나.
5)훈련의 기본원칙 열 번 복창
‘단순, 반복, 지속, 강행’
6)장자권의 발동, 명령과 선포 일곱 번 복창
‘있을지어다. 그대로 되니라, 좋았더라’ ‘복이 있을지어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 고린도전서 9장 헬라어 직역 ]
(0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의 주님을 본 채 있지 아니하느냐? 주 안에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02) [같은 종류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그러나 적어도 너희에게는 내가 사도이다. 왜냐하면 나의 사도의 직분의 인침은 주 안에서 너희이기 때문이다.
(03) 나를 심문(비판)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나에게 속한 변론은 이것이다.
(04) 우리가 먹고 그리고 마시도록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느냐?
(05) 우리가 남은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역시 자매인 아내를 데리고 다니도록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아니 하느냐?
(06) 혹은 오직 나 자신과 바나바도 일하지 아니하도록 권세를 가지고 있지 아니 하느냐?
(07) 누가 언제든지 자기자신의 봉급으로 자기를 위하여 군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재배하고서 그리고 그것의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혹은 누가 양떼를 치고 있으면서 그리고 양 떼의 젖에서부터 먹지 않겠느냐?
(08) 내가 사람을 따라 이것들을 발언하고 있지 않느냐? 율법도 역시 이것을 말하고 있지 아니 하느냐?
(09)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 안에 그것이 기록된 채 있기 때문이다. “너는 곡식을 밟아 떨고 있는 소에게 장차 망을 씌우지 말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 아니지 않느냐?
(10) 혹은 그분이 우리들 때문에 전적으로 말씀하심이 아니냐?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들 때문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밭을 갈고 있는 자는 소망으로 인하여 밭을 갈도록 빚지고 있다.” 그리고 곡식을 떨고 있는 자는 동참하기 위하여 소망으로 인하여 곡식을 [떠는 것이다]
(11) 만일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들을 씨뿌렸다면, 우리 자신들이 너희의 육체적인 것들을 장차 거둘지라도 과하다고 하겠느냐?
(12) [같은 종류의] 다른 이들이 너희들의 권세에 참여하고 있다면, 더더욱 우리 자신들은 [참여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권세를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것을 참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떤 장애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13) 신령한 일들을 하고 있는 자들은 성전에서부터 있는 것들을 먹고 있으며, 제단에서 섬기고 있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있느냐?
(14) 이와 같이 역시 주께서도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자들에게 복음에서부터 [계속] 살고 있도록 지시하셨다.
(15) 그런데 나 자신은 이것들을 하나도 이용하지 않은 채 있다. 그런데 나는 이것들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그것이 내 안에서 되지 않기 위하여. 왜냐하면 나에게는 더더욱 죽은 것이 좋기 때문이다. 이는 아무도 나의 자랑거리를 공허하게(헛되게) 하지 않기 위함이다.
(16) 왜냐하면 만일 내가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한다 할지라도 자랑이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에게 불가피하게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장차] [스스로]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기 때문이다.
(17) 왜냐하면 만일 내가 자발적으로 이것을 실행한다면 나는 상(댓가, 임금, 품삯)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억지로 한다고(자발적으로 아니한다고) 할지라도 나는 직분(직책)을 맡고 있는 채 있기 때문이다.
(18) 그런즉 내 상(댓가, 임금, 품삯)이 무엇이냐? 이는 내가 복음을 전파하고 있을 때에 대가 없이 복음을 제공하고, 복음 안에서 나의 권세를 충분히 사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19) 왜냐하면 내가 모든 사람에서부터 자유롭게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종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함이다.
(20) 그리하여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 이는 내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나 자신을 율법 아래에 있는 주이 아니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내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함이다.
(21) 율법 없는 자들에게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오히려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내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하기 위함이다.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 이는 내가 약한 자들을 얻기 위함이요,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들이 된 채 있기 위함이다. 이는 내가 전적으로 어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23) 내가 복음 때문에 모든 것들을 행하고 있다. 이는 내가 그것에 공동참여자로 있기 위함이다.
(24) 경기장(스타디움)에서 달리고 있는 모든 자들이 참으로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취하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아온 채 있지 아니 하느냐? 너희도 확실히 상을 얻기 위하여 이와 같이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어라.
(25) 그런데 경기에서 이기려고 경쟁하는 모든 이는 모든 것들에 절제한다(자제한다. 제어한다, 삼간다). 그러므로 저이들은 실로 썩어질 승리관(월계관, 면류관)을 받기 위하여 [절제하나지만] 한편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받고자 [절제한다].
(26) 그러므로 나 자신은 이와 같이 달음질을 하고 있다. 목표가 없는 것처럼 하지 않고, 이와 같이 권투하고 있다. 내가 허공을 치고 있는 것같이 하지 않는다.
(27) 오히려 내가 내 몸을 ‘혹독하게 다루고’(거칠게 다루고), 종으로 끌고가는(예속시키는) 것은 내가 남[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내 자신이 [단번에] 버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