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서신강해(03) 형제사랑 준수와 세상사랑에 대한 경계(요일2:3~17)_2021-11-24(수)

by 갈렙 posted Dec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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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4일(수) 수요기도회설교(오순절후스물다섯째주일)
[제  목] 요한서신강해(03) 형제사랑 준수와 세상사랑에 대한 경계
[찬  송] 찬 242장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찬 176장 주 어느때 다시 오실른지, 찬 358장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말  씀] 요일2:3~17(신약 389면)
[키워드] 형제사랑,계명준수,새계명,옛계명,성도사랑격겨,세상사랑경계,자녀들,아이들,아비들,청년들,육신의정욕,안목의정욕,이생의자랑

 

1. 서론

. 요한서신의 기본 이해

1)제 목 : 저자의 이름 및 서신의 집필 순서를 반영한 헬라어 시내 사본을 따라 한글 개역 성경 역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각각 명명됨.

2)저 자: 사도 요한, 비록 서신 자체는 저자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으나 초대 교회의 각종 전승들과 교부들의 서신들이 한결같이 사도 요한의 저작을 확증함.

3)기록연대 : 거의 같은 시기에 기록된 요한 서신들은 모두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기 전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시기(A. D. 70~100)A. D. 90-95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됨.

4)수 신 자 : 요한일서는 소아시아 지역의 일반 성도들, 요한이서는 소아시아의 한 지교회 및 그 교회의 성도들을 상징한 것으로 보이는 익명의 그리스도인 부녀와 그 자녀들, 요한삼서는 소아시아의 한 지교회의 일꾼인 가이오를 각각 수신자로 함.

5)내 용 : 요한일서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및 의와 사랑의 계명 실천, 요한이서는 분별하는 신앙, 요한삼서는 선한 종들의 교제와 관련한 권면을 주요 내용으로 함.

 

. 요한서신의 배경 이해

요한 서신들은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유다서와 더불어 일반 서신(general letters)’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분류는 특정 지교회나 개인을 대상으로 한 바울의 서신들과 달리, 보다 일반적인 대상을 수신자로 하고 있다는 특징에 기인한다. 그런데 요한이서와 삼서가 특정 교회 혹은 개인들을 대상으로 보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서신들로 분류된 것은, 오랫동안 이 서신들이 요한일서에 부가된 서신들이라고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요한일서는 당시 소아시아(AsiaMinor) 지역의 불특정 다수의 교회들 및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서신이라는 점에서 명백히 일반서신으로서의 특징을 지닌다.

 

한편 세 편의 요한 서신들은 분명 각각 독립된 편지들이다. 그러나 이 세 편은 모두 다 바른 신앙 지식의 확립 이단에 대한 경계의 두 방면을 포괄한 정통 신앙의 강조예수의 제자요 성도로서의 사랑의 실천이라는 두 개념을 기본 공통 주제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도 세 편지들은 이같은 기본 주제를 각각 다른 양상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리하여 본서에서는 이 요한의 세 서신들을 한 단위로 함께 조망하기로 하였음을 먼저 밝혀 둔다.

한편 신약 성경의 모든 서신서들은 일차적으로 각 서신서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각 서신이 누구에 의해, 어떤 수신자에게,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주어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그 서신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작업이다.

사도 요한이 이 서신들을 보낼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우선 당시 그는 에베소에서 목회사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교회사 자료에 의하면 요한은 유대 전쟁(A.D. 66~70) 발발을 계기로 에베소로 이주하였으며 30년 동안을 에베소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소아시아의 교회들을 돌보고 있었다.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며 숭배를 강요하던 도미티아누스 황제(Domitianus,A.D. 81-96) 치하의 박해를 제외하면, 요한이 마지막 남은 사도로서 대처해야 했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영지주의자들인 거짓 교사들의 활동이었다.

물론 이 영지주의(Gnosticism)가 체계화된 것은 A.D. 2세기경이었다. 그러나 이미 A.D.1세기 중엽의 초대 교회 시대부터 소위 전영지주의자들(pre-Gnosticism)’이 발흥하여 초대교회의 순수 신앙을 위협하였다. 신약 성경 중에서 4복음인 요한복음과 바울의 목회 서신들, 그리고 특히 요한1,2,3서와 베드로후서, 유다서 등은 이런 영지주의의 도전을 직·간접적인 배경으로 하여 쓰여졌다. 1세기 말엽에 이르자, 영지주의적 사상으로 무장한 거짓 교사들의 활동은 점점 더 활발해졌으며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협하는 중대한 세력으로 대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지주의는 지식을 의미하는 헬라어 그노시스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노시스는 물론 일반적 지식을 가리키기도 하였지만 영지주의에 있어서는 특별히 신적 비의에 해당하는 영적 지식 곧 허망한 세상일 뿐인 이 육적 세상이 아닌 참 세상인 영적 세계에 대하여 비의적 계몽에 의하여 얻게 된 지식을 가리켰다. 즉 세상은 저급하고 무가치한 물질 세계영원하고 완전한 영의 세계로 이분되어 있으며 인생은 그 영혼이 육체에 갇힌 불완전한 존재인 바 이제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영적 세계로 복귀함으로 소위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영적 세계에 속한 신적 의지로부터 계시된 지식이 필요한데 이것이 곧 영지(靈知)이며 이런 영지를 중심으로 한 이원론적 우주관과 구원관을 가진 사상이 곧 영지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영지주의헬라 사상동방 종교들의 신비 사상, 그리고 소위 중간기 시대를 무대로 하여 생겨난 유대교(Judaism)기독교의 사상혼합된 일종의 혼합 사상으로 각 시대와 지방에 따라, 심지어 각 인물에 따라 그 사상과 체계가 달랐다. 때문에 영지주의가 어떤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스스로 영지주의자라고 칭하면서 이원론 사상에 근거하여 물질은 무조건 악하고 영혼만이 선하며 인간이 이 악한 물질 세계에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초월자로부터 계시되는 지식, 곧 영지를 소유해야만 한다는 공통된 사상에 근거를 두는 일련의 무리들을 총칭하여 영지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성경의 계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화 체계를 가지고 있는 영지주의의 특징을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비성경적인 이원론(unbiblical dualism)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이원론은 기독교 교리 및 성도의 윤리적 생활에 있어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오류들 파생시키게 된다.

 

1)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특별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신비한 영적 지식에 의해 획득된다. 여기서 지식(gnosis)’이란 자신이 본래 신적 존재가 육체의 감옥을 이탈함으로써 얻어진다고 하는 지식을 말한다.

2) 인간의 육체는 악한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든지 (가현설), 아니면 예수라고 하는 한 뛰어난 인간에게 영적인 그리스도가 세례시에 임하였다가 십자가 수난 전에 떠났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케린투스파).

3) 인간의 육체는 악한 것이므로 가혹하게 취급되어야 한다(극단적 금욕주의).

4) 물질계는 원래 악한 것이므로 기존 세계의 도덕 체계를 깨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전혀 잘못이 아니다(극단적 방종과 쾌락주의).

 

이상에서 보듯이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유사한 점도 있는 듯하면서, 근본적으로는 전혀 상반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이. 비록 요한 당시 이와 같은 영지주의 신화 체계가 완성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2항과 4항의 내용을 요한일서에서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4:13: 3:4-9) 거짓 교사들의 주장이 이미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상당한 정도로 파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사도 요한 당시 영지주의 거짓 교사들의 활동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faith)과 윤리(ethics)의 양 측면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요한서신들을 기록한 목적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활동을 경계하는 것에 있었다.

요한서신의 첫번째 서신인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성육하신 그리스도를 듣고, 보고, 만진직접적 목격자로서 성육신의 실재(實在)에 대해 증언하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들을 단호히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정죄한다. 그리고 물질은 본래 악하다고 하며 육체적 방종을 일삼고 죄를 짓는 것을 옹호하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반박하며,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파괴하는 것임과 죄를 범하는 자들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임을 경고한다. 더 나아가 성도들은 빛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의를 적극 행하며,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형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자면, 사도 요한은 일서에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과 달리 하나님의 참된 자녀임을 테스트할 수 있는 다음의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신학적으로 (theologically) 참된 성도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 둘째, 윤리적으로 (ethically) 참된 성도는 불의를 행치 않고 빛 가운데서 의를 행한다. 셋째, 사회적으로 (socially) 참된 성도는 형제에 대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한다. 이 기준에 비추어 독자는 자신이 진정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는지를 확인하며, 또한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무엇을 힘써야 할 것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서신의 두번째 서신인 요한이서소아시아 지방의 한 지교회 및 그 교회 성도들을 각각 상징한 것으로 보이는 한 익명의 부녀 및 그 자녀들을 수신 대상으로 보낸 서신으로서, 역시 거짓 교사들의 해악을 염두에 두고서 기록한 서신이다. 1세기와 2세기 동안에는 주로 순회(巡廻) 전도자들 및 교사들에 의해 복음 전파가 이루어졌다. 당시 성도들은 이러한 순회 전도자들을 집안에 맞아들여 여행에 필요한 비용과 물품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영지주의 거짓 교사들 역시 이러한 관행에 편승하여 성도들의 집에 침투하였으므로, 본 서신에서는 성도들이 이러한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여 집안에 들이지도, 심지어 인사도 하지 말 것을 경계하고 있다. 성도들이 순회 전도자들을 따뜻이 맞아들이는 일은 분명 선한 일이지만, 그 와중에 분별없이 거짓 교사들을 환대하게 된다면 진리가 아닌 이단(異端)의 전파를 돕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즉 요한이서는 사랑을 실천하는 중에서도 비진리에 대해서는 분별하여 경계할 것을 당부하는 서신인 것이다.

 

요한서신의 세번째 서신인 요한삼서는 일서 및 이서와는 약간 성격을 달리한다. 먼저 수신자 문제에 있어서 삼서는 일반 교회나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일서, 이서와는 달리 가이오(Gaius)라고 하는 한 특정 인물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도 영지주의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는 일서나 이서와 달리 교회 내의 디오드레베(Diotrephes)라고 하는 한 악한 지도자를 경계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삼서는 앞의 두 서신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이며, 그 상황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요한이 파송한 순회 전도자들이 소아시아의 한 교회에 도착했을 때, 그 교회의 독재적 지도자인 디오드레베는 그 순회 전도자들을 접대치 않고 모욕을 주었다. 게다가 그는 순회 전도자들을 환대하고자 하는 그 교회의 성도들을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였다. 이에 요한은 그 교회의 충성스러운 일꾼인 가이오에게 보내는 본 서신을 통해 디오드레베의 문제를 언급하며 간접 경고할 뿐 아니라, 가이오에게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즉 요한삼서는 교만하고 독재적인 지도자를 경계하면서, 섬김의 지도력 (servant leadership)을 교훈하는 서신이라고 할 수 있다.

 

 

. 요한서신의 내용 구조

 

1) 요한일서

요한일서는 전체를 한 덩어리로서 읽거나 특정 구절들을 통해서 은혜받기는 좋지만, 그 속에서 구조를 발견하고 분석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은 서신이다. 우선 요한일서는 문안 인사와 본론 및 결론으로 구성되는 당시 그레코로만 서신들의 전형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다. 또한 내용에 있어서도 주제 전개의 과정이 뚜렷하지 않다. 바울 서신들과는 대조적으로, 요한일서에서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직선적(linear) 논리 순서가 아니라 순환적(circular)으로 전개되고 있다. 마치 한 소리가 들린 후 또 다른 소리가 뒤따르며 공명(共鳴)되는 효과를 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요한일서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구조 분석이 가능한데, 이는 역으로 그만큼 명확한 구조 분석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구조 분석 역시 논리 전개상 전환을 이루는 뚜렷한 마디를 발견하고 그것에 기초했다기보다, 내용의 전체적 파악을 위해 불가피하기에 어느 정도 임의적으로 구분한 것임을 밝힌다.

먼저 1-2장은 하나님과의 교제 (fellowship)의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서신의 서두인 1:1-4에서 요한은 직접적인 목격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실재(實在)를 증언하며, 그러한 자신의 증언은 수신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게 하기 위함임을 밝힌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토대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어 1:5-2:11에서 요한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 및 실천사항으로서, 성도는 빛 가운데에서 행하며, 혹 죄를 범하였을 경우 자백하고 회개해야 하며, 또한 형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함을 밝히고 있다. 이어 2:12-29에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들이 경계해야 할 두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세상을 사랑하지 말 것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를 멀리하라고 하는 내용이다.

다음으로 3:1-4:6 하나님의 자녀(children of God)로서의 성도의 신분 및 그에 합당한 생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부분에서 요한은,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주를 대면할 장래의 소망을 가진 자들이며 또한 그 소망을 간직하였기에 현재의 삶에서 성결하게 살아가야 함을 선언한다. 그리고 죄와 불법을 자행하면서도 죄를 죄로 인정치 않는 마귀의 자녀들의 행태와 대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의를 행치 않으며 오히려 의를 적극 행하는 자들이어야 함을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이어 4:7-5:3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사랑의 계명 실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은 온전한 사랑이 모든 심판의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참사랑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더 나아가 보이는 형제 사랑의 실천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입증해야 함을 권면하고 있다.

마지막 5:4-21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실 본 서신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것으로서, 서두에서도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실재에 대해 증언한 바 있는 요한은 이제 서신의 말미에 이르러 재차 이 문제를 반복 강조하며, 예수께 대한 성도들의 믿음을 견고히 세우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성도는 능히 세상을 이긴다는 것, 또한 성육하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바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 본 서신의 주요 목적임을 밝힘으로써 (5:13) 성도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서신의 마지막 종결 부분에서 요한은 신약 서신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문안 인사나 축도를 생략한다. 대신 연약함 때문에 죄를 범하는 형제들을 위해 중보기도할 것을 당부하고, 그리스도는 성도를 악에서 지키시는 분이시며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시라는 것을 선언함으로써 서신을 마무리하고 있다.

 

2) 요한이서

13구절의 짧은 내용으로 이루어지는 요한이서의 내용 구조는 간략 선명하다.

먼저 1-4절에서는 진리 안에서의 행함을 강조하는 문안 인사이다. 자신을 장로로 밝힌 저자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빌며, 수신자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에 대해 큰 기쁨을 표한다. 이어 5,6절에서는 사랑의 계명을 지속적으로 실천할 것을 격려하며 권하고 있다.

이어 7-11은 본 서신을 기록한 직접적 목적인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요한은 예수께서 육체로 임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거짓 교사들집으로 맞아들이지도 말고 심지어 인사조차 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다.

이어 12, 13절에서는 조만간 수신자들을 직접 찾아가 면대할 계획임을 밝히며 문안 인사로써 서신을 마무리하고 있다.

이상의 짧은 서신을 양분하자면 1-6절은 수신자들을 격려하며 사랑의 지속적인 실천을 권면하는 내용이고, 이하 7-13절은 사랑의 실천 중에서도 비진리에 대해서는 분별하고 경계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3) 요한삼서

15구절의 짧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 요한삼서의 내용 구조 역시 요한이서와 마찬가지로 간략 선명하다.

우선 1,2절은 문안 인사로서, 수신자 가이오에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강건하기를 축원한다. 이어 3-8절에서는 진리 안에서 행하며 특히 순회 전도자들을 환대하는 가이오에 대한 칭찬과 격려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어 9,10절에서는 가이오가 속해 있는 교회의 지도자에 대한 책망과 경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요한이 보낸 순회 전도자들을 환대하지도 않고 그들을 환대하려는 성도들까지도 교회에서 내어쫓는 디오드레베의 악행을 책망하며 간접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11,12절에서는 가이오에게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당부하며, 참된 일꾼인 데메드리오를 추천한다. 마지막 13-15절은 마지막 문안 인사 부분이다. 여기서 요한은 서신의 내용이 간략한 것은 조만간 가이 오를 직접 방문할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임을 밝히며 평강을 위한 축원 및 마지막 문안 인사로써 서신을 마무리하고 있다.

 

 

 

2.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의 표징인 형제사랑 계명 준수(요일2:3~11)

1)본문내용(요일2:3~11)

첫째,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그리스도의 계명의 말씀을 지킴(3-6)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써 입증될 수 있다(3) 따라서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로서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자이다(4).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속에서 온전하게 된 성숙한 성도로서 그러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본받아 행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계명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은 옛 계명이면서 동시에 새 계명임(7-8)

사도 요한이 쓰는 사랑의 계명은 수신자들이 처음 듣는 새 계명이 아니라 줄곧 있어 왔고 그들이 이미 들은 바 있는 옛 계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사랑의 계명은 언제나 새 계명이다. 사랑의 계명이 옛 계명인 동시에 새 계명인 것은 그리스도와 성도 모두에게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계명이 새 계명이 되는 것은 사랑의 본질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어두움이 사라지고 죄된 세상에 사랑의 빛이 비취었기 때문이다.

셋째, 형제 사랑의 실천은 빛 가운데 거하는 증거임(9-11)

빛 가운데 거한다고 하면서도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여전히 어두움 속에 거하는 자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걸려넘어질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속에서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해 방황하게 된다. 그것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이다.

 

2)영적 교훈

본문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관점에서 성도의 신앙과 생활을 다루고 있는 제1, 2장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한 성도의 기본 자세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심에 대한 증거를 보도하고 있는 1:5-2:2에 이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의 표징으로서의 형제 사랑 계명 준수에 대한 논증을 보도하고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3-6절에서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와 연합된 자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임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의 하나님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적 앎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 준수를 통하여 체험하게 되는 실제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노라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반드시 그의 계명을 행하게 마련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요한은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고 있는 이다.

다음으로 7-11에서는 그리스도의 계명준수의 핵심이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특별히 요한은 여기서 형제 사랑의 실천 계명이 결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수신자들이 이미 가진 옛 계명이요 또한 새 계명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사랑의 계명이 구약 시대부터 줄곧 있어 왔고(19:18 ; 22:37~40) 그러면서도 그 계명은 영원 불변의 진리인 동시에 사랑의 본질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어두움이 사라지고 죄된 세상에 사랑의 빛이 비취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께서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13:34)고 말씀하신 것이다.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22:37-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첫째,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는 말과 같다(3~4).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는 형제사랑을 실천한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그들은 형제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고 있었다.

둘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관계적인 앎(기노스코)이어야 한다(3).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신비로운 지식, 자기들만이 아는 영지를 깨닫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진리가 그 사람 안에 들어있지 않는 것이다(4).

넷째,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그분 안에 거하는 자다(5).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신비적인 지식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다섯째, 새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옛 계명에서 나온 것으로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다(7).

옛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19:18). 그리고 새 계명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말에 있어서는 공통분모를 가졌다. 여기에는 유대교적인 노선과 기독교적인 노선에 차이가 없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을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혀 있는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하였고, 신약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에 임한 영으로서 자비롭고 은혜가 풍성하고 사랑으로 다스리는 우등한 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웃사랑이라는 계명은 그들이 알고 있는 구약의 하나님과 다른 것이다.

여섯째, 예수님의 말씀은 질적으로 새로워진 한층 더 높아진 새 계명이다. 왜냐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5:44)

예수께서는 구약의 계명을 가져왔지만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한층 더 승화된 새로운 차원의 계명을 명령하셨다.

일곱째, 빛 가운데 행하는 자는 형제를 미워하지도 않고 스스로 걸려넘어지지 않는다(9~10).

여기서 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으로 거룩한 성품을 뜻한다. 그러므로 안에 걸어가고 있는 자는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증오심을 갖고 적대감을 갖는 것은 스스로 빛 가운데 걸어가지 않는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 자기를 실족하게 만들지 않는다.

여덟째, 어둠 가운데 걸어가는 자는 그 어둠이 자신의 눈을 멀게 하여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게 한다(11).

아홉째,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3).

열째, 세상은 심는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법칙대로 움직이고 있다(4).

열한째, 예수님을 철저히 의지할 때에 선한 행실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5).

열두째,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6).

열셋째, 사랑은 모든 계명의 요체다(7).

열넷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8).

열다섯째, 중생한 성도는 형제를 지속적으로 미워할 수 없다(9).

열여섯째, 주님의 사랑은 휴머니즘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을 가능케 한다(10).

 

 

3. 각 연령층의 성도들을 향한 사도적 격려 및 세상 사랑 경계(요일2:12~17)

1)본문내용(요일2:12~17)

첫째, 아비들 및 청년들의 두 연령 계층을 향한 신앙적 격려(12-13)

먼저 수신자들 전체를 가리켜 자녀들(테크니아)’이라고 칭하며 그들에게 이 서신을 써 보내는 것은 이미 그들의 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하심을 얻었기 때문임을 밝힌다. 다음으로 수신자들 중 비교적 높은 연령층의 성도들을 아비들(파테레스)’이라고 칭하면서 그들이 태초부터 계신 이 곧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는 것을 각성시킨다. 이어 수신자들 중 비교적 젊은 연령층의 성도들을 청년들(네아니스코이)’이라고 칭하면서 그들이 악한 자 곧 사단을 이기었다고 격려한다.

둘째, 두 부류의 연령층 모두를 향한 신앙적 격려의 반복(14)

전체 성도들을 아이들(파이디아)’이라고 재차 칭하며 그들이 아버지 곧 하나님을 아는 자들임을 거듭 각성시킨다. 그리고 성도들을 다시 아비들청년들로 나누어 부르며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또한 사단을 이긴 자들이라고 재차 격려한다.

셋째, 성도로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경계(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치 말라고 경계한다(15a).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5b).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6).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도, 세상의 정욕도 모두 소멸될 것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살 것임을 선언한다(17)

 

2)영적 교훈

앞선 3-11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로서 형제 사랑 계명 준수를 촉구한 요한은 이제 12-17절에서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경계한다. 이러한 본 단락은 다시, 성도들을 향한 신앙적 격려를 주는 12-14세상에 대한 사랑을 경계하는 15-17로 구분되는데, 12-14절에서는 특히 두 연령 계층을 구별하여 각 대상에게 적합한 교훈을 주고 있다.

한편 본 단락에서 요한은 수신자들을 자녀들’, ‘아이들’, ‘아비들’, ‘청년들로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각 호칭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이견이 있다. 먼저 자녀들이나 아이들신앙이 아직 어리거나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상태에 있는 성도를 지칭하며, 아비들영적 지식 및 신앙 생활에 있어 성숙한 상태에 있는 성도, 그리고 청년들영적으로 강해서 악한 것을 능히 이기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를 지칭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혹자는 요한이 자신의 수신자들에게 자녀들’, ‘아이들’, ‘아비들’, ‘청년들로 묘사한 것은 요한 공동체 안에 분파가 있었을 가능성을 나타낸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들자녀들은 요한공동체 내의 모든 성도들을 지칭하고 아비들청년들은 교회 중직자들로서 장로, 집사들을 지칭한다고 본다(Kasemann, Cullman).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자녀들아이들본서신 전체 수신자들을 지칭하는 노사도 요한의 애정 어린 호칭으로 보고, 아비들비교적 연령층이 높으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에 대한 호칭으로, 또한 청년들상대적으로 젊고 활기차게 주의 일을 하는 자를 지칭하는 호칭으로 보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는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자기들의 죄들이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다(12).

둘째, 보다 더 성숙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태초부터 계신 이곧 선재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13).

셋째, 영적 전투의 최전방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적들과 대치하여서 강력하게 버틸 수 있는 영적 힘을 소유한 청년들은 악한 자와 싸워 이기는 자들이다(13).

넷째, 악한 자는 사탄마귀로서, 성도들의 영적 전투의 대상이다(13,14).

가인이 악한 자에게 속하여 아우를 죽였다. 이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요일5:19).

다섯째,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긴 자들이다(13).

여섯째, ‘자녀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사랑받는 자녀를 지칭하는 칭호라면, ‘아이들은 스승과의 관계에서 스승으로부터 훈련과 교육과 양육을 받는 칭호를 가리킨다.

일곱째, 그리스도인의 시작은 죄사함을 받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12).

여덟째, 악한 자와 싸워 이길 수 있게 해주는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14).

6:16-17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아홉째, 성도는 사탄이 왕노릇하고 있는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아니 된다(15).

열째,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육체의 욕망, 눈의 욕망, 생애의 자랑이다(16).

우리 성도는 영의 열망, 영적인 눈에 대한 열망, 이 땅에 것이 아니라 하늘에 것에 대한 자랑으로 가득해야 한다.

열한째, 육신의 욕망이란 육체 안에 들어있는 타락한 본성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의 악한 욕망을 가리킨다(16).

열두째, 안목의 정욕이란 눈을 통해서 추구하게 되는 죄악된 욕망을 가리킨다(16).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서 탐하게 된 것, 다윗의 목욕하는 장수의 아내를 탐하게 된 것도 다 안목의 정욕에서 나온 것이다.

열셋째, 이생의 자랑이란 세상적인 소유에 대한 자랑들로서 허탄한 자랑을 가리킨다(16).

여기서 이생비오스로서 조에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육신이 좋아하는 자랑거리와 재산을 가리킨다.

열넷째,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심판의 때가 되면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므로, 어떠한 소망도 줄 수 없다(17).

열다섯째, 기독교는 죄사함의 은혜가 있는 종교다(12).

열여섯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체험에서 우러나는 지식으로서, 인격적인 지식이어야 한다(13).

열일곱째, 그리스도의 승리는 곧 그분과 연합한 우리의 승리다(13).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곧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이서, 그분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가 되는 것이다.

열여덟째,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어서 영적 전쟁에 사용해야 한다(14).

열아홉째, 세상은 이중적인 의미여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로서의 세상이 있고, 사탄마귀의 지배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반역하는 세상이 있다(15).

스무째, 성도는 말씀으로 세상의 죄악을 이겨야 한다(16).

예수께서 광야의 시험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항하는 것이엇다.

스물한째, 성도는 세상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17).

 

< 요한일서 2:3~17에 나오는 명령과 선포 >

1)감사와 회개

주여, 하나님을 알고 그분 안에 거하며 빛 가운데 걸어다니는 성도가 어떠한 성도인지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인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빛 가운데 걸어가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키는 자인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새 계명은 옛 계명에서 나온 것으로서 한층 더 승화되고 발전된 것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성도에게도 영적 성장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성도는 자녀들과 아이들, 청년들과 아버지들의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자녀들과 아이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를 아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청년들은 악한 자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인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아비들은 예수께서 태초부터 계셨던 이 곧 선재(先在)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자임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성도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의 것들 곧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형적 없이 사라지는 날이 온다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2)장자권 누림의 결단

주여, 이제는 주의 계명을 지키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이웃 형제를 사랑하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빛 가운데로 걸어가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악한 자와 싸워 이기겠나이다.

주여, 이제는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않겠나이다.

3)장자권의 누림, 명령과 선포

이제까지 나로 하여금 자신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요 빛 가운데 걸어가는 자라고 속여온 악한 영들은 떠나가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게 꼬드기는 악한 영들은 결박을 받으라.

내 영혼아, 깰지어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이웃 형제를 사랑하고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멀리할지어다.

4)오늘의 말씀의 핵심

1. 형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님을 알고 주님 안에 거하며 빛 가운데 걸어가는 자였구나.

2.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둠 가운데 있는 자요, 자신이 장차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자로구나.

3. 태초부터 계셨던 예수의 이름으로서 모든 사람이 죄사함을 받으며, 악한 사탄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구나.

4.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있지 아니하는구나.

5.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어느날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날이 오게 되는구나.

 

5)훈련의 기본원칙 열 번 복창

단순, 반복, 지속, 강행

6)장자권의 발동, 명령과 선포 일곱 번 복창

있을지어다. 그대로 되니라, 좋았더라’ ‘복이 있을지어다.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요한일서 헬라어 직역

 

요한일서 1장 헬라어 직역

(01) 그것이 태초(시작)로부터 있어 왔다. 우리는 그것을 들은 채 있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그것을 본 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자세히(주의 깊게)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손들로 그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만졌다.

(02) 그리고 그 생명이 나타나게(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본 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증언한다(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영원한(시대의) 생명을 너희에게 전한다(전하고 있다). 이는 아버지에게서(아버지와 함께) 있어왔던 바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우리에게 나타나게(드러나게) 되었다.

(03) 우리가 본 채 있고 그리고 들은 채 있는 바를 우리도 역시 너희에게 전한다(전하고 있다). 이는 너희도 역시 우리와 함께 교제(참여)를 갖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제(참여) 역시 아버지와 함께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다.

(04) 그리고 우리가 이것들을 쓴다(쓰고 있다). 이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된 채 있기 위함이다.

(05) 그리고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들은 채 있는 바 그리고 우리가 알리고 있는 바 이것이 그 소식이다. 하나님은 빛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분 안에는 어둠이 하나도(어떠한 종류도) 없으시다는 것을.

(06) 만일 우리가 그분과 함께 교제(참여)를 가지고 있다 말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어둠에 안에서 [계속] 걸어다니고 있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를 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07) 그분 자신이 빛 안에 있는 것처럼 만일 우리도 빛 안에 [계속] 걸어다니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함께 교제(참여)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아들의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아포)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08) 만일 우리가 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번에]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미혹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는 것이다.

(09)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계속] 시인한다면(자백한다면) 그분은 신실하고 의로우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있는] 죄들을 [단번에] 용서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모든 불의로부터(아포) [단번에]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은 채로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로고스)이 우리 안에 있지 않는 것이다.

 

요한일서 2장 헬라어 직역

(0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들을 너희들에게 쓰고(기록하고) 있다. 이는 너희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만일 누가 죄를 짓는다면(범한다면), 우리는 아버지를 향하여(함께) 보혜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02) 그리고 그분은 친히 우리의 죄들에 관하여 화해제물(화목제물)이시다. 그런데 오직 우리에게 속한 것들에 관하여만이 아니라 오히려 역시 온 세상의 [죄에] 관하여도[니라].

(03) 그리고 우리는 이것 안에서, 우리가 [계속]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있다면 우리가 그분을 알아온 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04) 내가 그를 안 채 있다고 말하면서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그리고 진리가 그 사람 안에 있지 아니한다.

(05) 그런데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계속]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사람 안에서 온전하게 된 채 있다. 이것 안에서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안다.

(06) 그분 안에 [계속] 머문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자는, 저분이 걸어다니셨던 것과 같이 역시 그 사람 자신도 그분과 같이 [계속] 걸어다니도록 [마땅히] 해야 한다.

(0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질적으로] 새로운 계명을 너희에게 쓰고 있지 않다. 오히려 너희가 처음부터(시작부터) [지금도] 가지고 있었던 바 옛 계명을 [쓰고 있다]. 옛 계명은 너희가 들었던 바 그 말씀이다.

(0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질적으로] 새로운 계명을 쓴다. 그분 안에서와 그리고 너희 안에서도 참된 것이다. 왜냐하면 어둠은 지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 빛이 이미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09) 그 빛 안에 [계속] 있다고 말하고 있는 이이지만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자는 이제 어둠 안에 있는 것이다.

(10)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 자는 그 빛 안에 머문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서 걸림돌(거리낌,실족함,)이 있지 않다.

(11) 그런데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고 있는 자는 어둠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둠 안에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가는 장소를 알지 못한 채 있다. 이는 그 어둠이 자기의 눈들을 멀게 하였기 때문이다.

(12) 아이들이여, 내가 너희에게 쓴다. 왜냐하면 너희의 죄들이 그분의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용서된 채 있기 때문이다.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다. 왜냐하면 너희가 태초부터 있는 분을 알아온 채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다. 왜냐하면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긴 채 있기 때문이다.

(14) 어린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다. 왜냐하면 너희가 아버지를 알아온 채 있기 때문이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다. 왜냐하면 너희가 태초부터(시작부터) 있는 이를 알아온 채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다. 왜냐하면 너희가 [영적으로] 강하고(힘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물고 있으며 그리고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긴 채 있기 때문이다.

(15) 너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있어라.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고 있어라]. 만일 누구든지 세상을 [계속]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있지 않다.

(16) 이는 세상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육체의 욕망과 눈들의 욕망과 이생(생애,생계,살림,재산)의 허풍떪(자랑)이다. 그것은 아버지에게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요 오히려 세상에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17) 그리고 세상도 지나가게 되고 그리고 그것의 욕망도 지나가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 자는 영원히(그 시대까지)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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