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적인 신앙생활과 복음적인 신앙생활의 차이(갈3:23~4:11)_2016-04-29

by 갈렙 posted Apr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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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주소 https://youtu.be/Gh68lC_Ihb0
날짜 2016-04-29
본문말씀 갈라디아서 3:23~4:11(신약 306면)
설교자 정병진목사
주제어 율법과 복음, 율법적인 신앙생활, 복음적인 신앙생활, 자유와 용서, 정조와 불안, 임시적 제한적 보조적, 강제성과 자발성

  개신교 안에 있어도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도 있고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도 있다. 복음 안에 들어왔으면 전부 다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복음 안에 들어왔으나 삼신론에 붙들려 예수님과는 다른 성령님을 따라가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도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령님은 사실 높은 계급의 귀신이 가장한 것이지만 말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과연 복음적인 신앙생활이란 무엇인지 율법적인 신앙생활과 비교함과 동시에 복음을 떠나 성령님으로 가장한 귀신을 따라 가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을 위해 먼저는 율법과 복음을 비교해서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과 믿음의 행위를 비교할 것이다. 그러면서 율법적인 신앙생활과 복음적인 신앙생활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율법과 복음이란 과연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지만 율법이 B.C.1445년경 여호와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이라면, 복음은 A.D.30년경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그를 믿고 따라오는 사람들을 위해 유대와 갈릴리 땅에서 들려주신 말씀을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율법은 직접 여호와께로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종으로 지음받았던 천사를 통해 주어졌기 때문이다(행7:30~31, 갈3:19). 그러므로 율법이 종을 통하여 주신 말씀이라고 한다면, 복음은 아들을 통하여 직접 주신 말씀이 되는 것이다(히1:2). 그러므로 율법은 종의 법이라고 할 수 있고, 복음은 자유의 법 혹은 자녀의 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율법은 종의 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수백년동안 종으로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신 다으에 주신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종의 법도 아니고 아들의 법도 아닌 중간형태의 어떤 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간적인 성격을 지닌 율법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인지에 주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지 못할 때에는 어떤 형벌이 주어지는지에 주안점이 맞춰져 있다. 한 마디로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법 곧 죄를 깨닫게 해 주는 법으로서 인류에게 주어진 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롬3:20). 그러나 복음은 다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으로서, 장차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따라가야 할 말씀들이다. 한편  율법은 구약에 약속하신 씨 곧 아들인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 유효한 법이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율법은 임시법이요, 제한적이며 보조적인 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교사라는 것이다.

  둘째, 이제는 율법의 행위과 믿음의 행위에 대해 살펴보자. 율법의 행위란 율법에 나오는 규정들(613가지)을 지켜서 자신이 얻게 되는 의로움을 가리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 자신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율법의 행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사람이 아마도 없었다. 단지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발견한 다음,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를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의 규정들을 지켜 구원얻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간 것이다. 그러다보니 유대인들은 율법의 규정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래서 그들이 얻은 결과들이 곧 율법의 행위라고 불리운 것이다. 하지만 율법은 모든 것을 다 지켰다 하더라도 한 가지만 어기면 율법을 어긴 것이 되므로,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행위란 무엇인가? 믿음의 행위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자신의 죄를 사함을 받았다고 치자. 그가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보니, 그분이 자신을 위해 해 주신 일이 너무나 크고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아기 위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드리는 것을 믿음의 행위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라는 것이 하나님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구원받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이라면, 믿음의 행위란 믿음을 통해 구원의 여정에 들어간 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을 나타내는 행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구원의 여정 안으로 들어온 성도들은 율법의 행위를 추구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지만 믿음의 행위만큼은 쉬지 말고 계속해서 실천해 나가야 한다. 믿음의 행위는 믿음으로서 일차적인 구원을 받은 자가 자연스럽게 취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행위를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주일성수를 비교를 보자.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는 주일성수를 안식일 준수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안식일날에는 절대 놀러 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그들이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 같고 그것이 죄가 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날 예배 시간에 하나님 앞에 진실된 회개를 했으냐 아니면 그날 주의 종으로부터 생명의 말씀을 받아먹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날 놀러가지 않고 예배드렸다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믿음의 행위에 속한 자는 주일성수를 그런 식으로 행하지 않는다. 믿음의 행위에 속한 자는 그날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공급받기 위해 주일을 지킨다. 다시 말해, 일주일동안 지었던 죄를 회개함으로 용서를 받기 위해 주일날 예배에 나오고, 한 주동안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고자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는 회개를 통해 예수님의 피로 자신의 죄를 사함받고, 주의 종의 설교를 통해 영의 양식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에 속하여 주일성수를 한 자는 주일성수를 통해 액땜을 한 것이라고 한다면, 믿음의 행위에 속한 자는 그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용설르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충분히 공급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똑같이 주일성수를 하기는 했지만 그 목적이 다른 것이다. 당신은 이때까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주일성수를 해 왔는가 아니면 믿음의 행위에 속한 주일성수를 해 왔는가?

  셋째, 이제 마지막으로 율법적인 신앙생활과 복음적인 신앙생활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오늘날 성도들이 신앙생활하는 모습만을 가지고 우리는 그가 과연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분간하기는 쉽지 않다. 그 결과들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둘 다 똑같이 열심히 주일성수하고, 둘 다 똑같이 열심히 헌금생활하고 있고 열심히 전도생활하고 있으며, 봉사생활도 하고 있고 기도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 일들을 행하는 목적과 내면의 상태는 정 반대다.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자는 오직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신앙생활한다. 그러므로 나중에 가서는 마지못해 의무로서 행하게 된다. 만약 그들이 그 일들을 다 수행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큰 일 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자에게는 기쁨이 없다. 메말라 있다. 의무감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율법적인 성도라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이 해야 일들을 다 준행한 상태라면, 그들은 자신의 행위들을 자기의 의로 생각한다. 한편 자기처럼 그 일들을 행하지 못힌 자들은 용납하지 못한다. 또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규정대로 살지 않는 자들이 용서가 안 된다. 왜냐하면 자신은 정말 잘 했고 그래서 의롭고 깨끗한 자인데, 남들은 그렇게 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하나님이 무서워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징계나 심판이 무서워서 어떤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버림받아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자신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하나님의 성령까지 보내주셨으니 자신이 받은 그 큰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까를 생각하며 사는 자들이다. 일종의 자발적인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기에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님께서 어떻게 보시느냐가 관심사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할 뿐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자신이 섬기는 자로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은 모든 것에 자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떤 행동이 믿음이 약한 지체를 죄짓게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기꺼이 제한하는 자이다. 자신은 자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육체를 쳐복종시키고 있는 사람이다(고전9:27).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믿음이 약한 지체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추가할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이미 복음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님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자가 있어서, 자신은 이제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귀신을 성령님으로 잘못 알고 따라가고 있는 경우다. 이런 쪽에 속한 사람들은 대개가 신사도나 빈야드운동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세 분 하나님으로 믿어 삼신론을 신앙하는 이들이나 양태론자들 중에 이제 하나님은 성령님이시다고 믿는 자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성령님은 하나님으로서는 같지만 예수님과는 인격이 다른 영이라고 믿고 있음으로 예수님 말고도 성령님을 더 알아야 하고 그분을 더 체험해야 한다고 하면서 은사주의쪽으로 가버리는 것이다. 마치 성령께서는 지금도 자신의 귓가에 이쪽으로 가라, 저것을 사라는 음성을 들려준다고 믿으면서 그것을 성령의 음성으로 잘못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귀신의 음성일 뿐이다. 사실 성령께서 어떤 음성으로 인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영이요, 예수님이 누군지를 가르치는 영이시기 때문이다(요14:26, 15:26).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은 예수님이 아닌 어떤 음성을 직접적으로 듣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이 기록된 복음서들과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워서 아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누군지 예표론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구약의 율법말씀과 회개를 선포하는 선지자들의 글을 읽고 듣고 배워서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의 율법말씀과 예언들을 읽고 듣고 배워야 우리는 오늘날에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님의 인도를 잘 받는 길이다. 성령님은 오직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그분이 누군지를 가르쳐주는 영이심을 꼭 기억하라. 그렇지 않으면 금방 빗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잘 증거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힘입어야 하지만, 그 핵심은 다른 데에 있지 않고 예수님이 과연 누구시며 그분은 과연 무슨 말씀을 하셨으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아는 데에 있다. 그래야만 성령님의 인도를 제대로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은 혼란의 시대다. 그리고 율법적인 신앙형태를 통해서 목회자가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또 어떤 이는 니골라당처럼 복음 안에서는 어떤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아니 더 나아가 귀신의 가르침을 성령님의 가르침으로 알고 따라가는 자들도 있다. 아니다. 이것들은 다 잘못된 신앙형태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그분이 행하신 일을 믿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야 그리고 하나님 자신으로 믿어야 한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동떨어져 있는 세 하나님 중의 한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미 부활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신 예수님이시다. 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낸 거룩한 영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이 누구신지 드러내고 그분의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게 하신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을 회개케 도와주어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성령님이나 성령의 은사를 말하거나 추구하는 자들이 주변에 있다면 조심하라. 그들은 복음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아니다. 그들은 귀신의 영을 좇아사는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건투를 빈다.

2016-04-29 율법적인 신앙생활과 복음적인 신앙생활의 차이(갈3;23~4;11).ts_00005198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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